[시민기자의 눈] 왕이 두 명 태어난다는 영화 ‘명당’에 대한 유감
[시민기자의 눈] 왕이 두 명 태어난다는 영화 ‘명당’에 대한 유감
역사적 사실과 동떨어진 내용 많아
  • 이기웅 예산 시민기자
  • 승인 2018.10.09 14: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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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명당> 포스터

 

이기웅 예산 시민기자
이기웅 예산 시민기자

 

[굿모닝충청 이기웅 예산 시민기자] 한국 사람이라면 명당 터에 조상을 모시고 후손들이 발복(發福)을 받는 것에 대부분 관심을 갖는다.

지난 추석 연휴를 전후해서 <명당>이란 영화가 개봉되면서 흥선대원군 아버지인 남연군을 모신 가야사터가 다시 한 번 관심을 받고 있다.

필자가 말하는 영화의 핵심은 가야산 멸운암의 처사 정만인과 흥선대원군, 그리고 가야사와 남연군묘다.

명당을 찾아주면 해인사의 해인을 가지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가야산의 2대 천자 지지와 홍성에 있는 오서산의 만대 영화 지지 중 어느 것을 택하겠느냐고 물었고 흥선대원군은 2대 천자 지지를 택했다는 것은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야사이다.

가야산의 가야사에 불을 질러 장소를 확보한 뒤에 남연군을 이곳으로 이장한 것은 사실이다.

흥선 대원군이 1846년 이곳에 아버지를 이장하고 7년 후 둘째 아들을 얻었는데 그가 고종이었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영화 <명당>에는 역사가 없다.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허구와 역사를 잘 결합시키려 노력했다”고 밝힌 만큼 가야사 실화와 흥선대원군, 정만인 등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다.

그럼에도 전체적인 시나리오가 허구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1865년 세워진 남연군신도비. 높이는 320cm이다.
터의 좋은 기가 흐른다고 전해지는 남연군묘 앞 바위. 금탑자리라고도 전해진다.
보덕사는 조선왕실의 마지막 원찰이며 1871년(고종 8) 창건된 절이다

 

영화는 지나치게 명당과 발복지지의 기(氣)에 몰입하다 보니 정작 다뤄야 할 역사를 올바로 보여주기에는 충분치 않은 영화다.

흥미 요소라 해도 허구적인 시나리오는 보는 시간 내내 영화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흥선대원군과 지관 정만인에 관한 실화를 바탕으로 하나 조선 후기의 정치사와 오페르트, 내포지역의 천주교사 등 중요한 역사는 아예 없거나 사실과 너무 다르다.

전체적으로 스토리가 좀 아쉬웠다.

영화의 주요 등장 무대이고 인물인 천년 고철 가야사와 정만인 그리고 흥선대원군에 대한 남아있는 기록이 많으니 좀 더 고증이 있었어야 한다.

영화의 무대가 되는 가야사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백제시대부터 명찰이 있던 가야사 터는 2대 천자 지지의 명당이라 멸운암의 처사 정만인이 흥선대원군에게 전하며 1846년 불태워지게 된다는 게 대체적으로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기록이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이 불태웠다고 전해지는 가야사에 관한 기록에 잘못이 있어 바로잡는다.

결론적으로 흥선대원군이 주목하는 명당 터에 있었다는 가야사는 1846년에는 없었다.

현재 사료에 부족함을 느끼고 있지만 가야사는 백제시대의 창건해(예산군지) 고려와 조선 등 최소한 3번 이상의 중창이 있었으며 1753년 이전에 폐사하게 된다.

흥선대원군이 불태웠다고 알려진 가야사는 임방(任埅, 1640~1724)이 남긴 수촌집에서 가야사 갑인년(伽倻寺甲寅)에 천년 고찰에 범각, 가야사탑, 귀부의 빗돌에 관한 내용이 있어 최소한 1674년에는 범각과 탑과 비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1753년 가야산을 여행한 이철환(李嚞煥, 1722~1790) 등 다수의 시인묵객들이 남긴 기록상 가야사는 1753년 이전에 이미 폐사했으며 주변에 있던 묘암사, 남전, 보웅전, 인암 등이 가야사로 대신해 불리워지고 있다는 기록을 남긴다.

흥선대원군이 불태웠다고 전해지는 가야사는 1674~1753년 이전에 폐사하며 가야사로 불리워진 절집은 그 터 주변에 있던 묘암사 등이다.

그러니 흥선대원군이 1846년 불태운 절은 묘암사와 보웅전인 것이다.

당시 가야사터에 있던 5층 금탑과 보웅전에 묘셔진 3개의 철불이 불타게 되며 가야산에 있던 모든 전각이 사라지게 된다.

또 한 사람 운양 김윤식(金允植m 1835~1922) 선생이 1893년 가야산을 여행하며 남긴 가야사에 관한 흥미로운 기록이 있는데 면양행견일기(沔陽行遣日記)에 다음과 같이 당시의 모습을 남긴다.

‘1893년 5월 초 6일  아침에 비가 오더니 저녁에 개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아직은 비가 내렸다. 주인과 손님이 걱정하며 앉아 있었는데 오후에 날이 개었다. 마침내 석운, 초하, 도운, 이생, 태현, 문생, 추, 월해스님, 김일관, 시동, 장성록, 이우린, 최생, 시철과 함께 가야동(伽倻洞, 현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으로 동행했다. 원당곡을 경유해 다시 쌍룡폭포를 보았다. 비 온 뒤라 물소리가 매우 커 전에 비해 좋았다. 이로부터 가야동에 도착하니 산길이 구불구불하고 곳곳마다 물소리가 시끄럽게 했다. 남연군묘에 도착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가야사의 유적이다.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남연군묘 모습

 

산세가 웅장하고 사방을 에워싼 듯 멀리서 바라보니 맑고 깨끗했다. 예부터 이 산은 왕기가 있다고 일컬었는데 과연 이곳으로 묘소를 이장한 뒤에 성인이 탄생하고 이어서 용흥(임금)의 경사가 있었으니 지관들이 풍수를 떠드는 것을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다. 산을 가꾸고 소나무를 기르고 각(閣)을 짓고 비(碑)를 세우는 등의 일들이 능소(陵所)보다 덜하지 않다

보덕사는 동북쪽 기슭에 있었는데 역시 갑자년 이후로 나라에서 세운 것이다.

1871년(고종 8)에 왕실에서 세운 보덕사에 관한 기록이다.

보덕사는 흥선대원군의 부친 남연군(李球, 1788~1836)을 가야사 금탑 자리에 모시기 위해 가야산의 안쪽에 있던 가야사(묘암사. 보웅전 등)를 비롯해 모든 절을 불태우는데 왕실에서 가야사를 대신해 가야산의 동쪽에 속하는 서원산 계곡에 1871년(고종 8) 창건한 절이다.

조선왕실 마지막 원찰이 되기도 하며 초대 주지는 서울 개운사에 있던 벽담 도문이었다.

1893년 운양 김윤식이 보덕사에 하루를 머무는데 당시 스님이 30명이 있고 불당과 승려들이 거쳐하는 건축물 외에 어필각, 칠성각이 있다는 기록을 남겨 비교적 큰 규모의 사찰임을 알 수 있다,

어필각과 칠성각은 1950년 한국전쟁으로 전소되며 중창하지 못하고 현재는 비구니 사찰로 운영된다.

가야사는 백제시대의 창건해 최소한 3번 이상의 중창됐으며 가야산 계곡에 백암사지와 용현사지, 보원사지 등 100개소 이상이 폐사지로 가득하다.

가야산의 절집 그 중심에 있던 가야사는 동국여지승락의 기록에 수덕사 보다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고 적고 있다.

그 규모는 현재 상가리 마을의 중앙에서부터 산자락까지 전체가 사역으로 파악된다.

가야사는 1753년 이전에 폐사하게 된다.

오늘날 1500년 장대한 가야사의 모습을 알길 없다.

다만 사역과 남아 있는 석축과 부족하지만 문헌을 통해 추정할 뿐이다.

문헌과 발굴을 통해 밝혀야 하는 것이다.

예산군 측은 땅속에 숨어버린 1500년 유적의 민낯을 찾는 발굴에 착수한다고 한다.

그 터는 남연군의 묘가 조성되고 일부는 경작지로 일구어지며 일대가 훼손되었지만 다행이 땅 속 깊은 곳에 숨겨진 1500년의 흔적은 여전히 가야사 역사를 밝히는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게 분명하다.

다음 달부터 발굴을 시작하는 대상은 이철환 등이 말하는 그곳으로 나옹화상(懶翁和尙)이 세웠다는 가야사의 금탑이 세워졌던 터의 뒤로 금당이라고 추정되는 곳이다.

가야사는 왜 갑자기 사라졌는지 가야산에 왜 티벳 양식의 5층 석탑이 세워졌는지 풀어야 할 숙제들이 많다.

땅 위에 역사는 흘러가고, 땅 밑에는 역사가 잠겨있다

결국은 발굴을 통해 답이 있을 듯하다.

또 가야산을 연구하는 모임 가야산 역사문화 연구소에서는 16세기부터 10세기까지 가야산과 가야사에 관한 문집을 번역 중이니 많은 것이 밝혀질 것이고 지역을 위해 활용됐으며 한다.

모처럼의 가야산과 상가리 이야기 영화 명당 엉터리 역사를 구겨 넣은 느낌이다. 감독과 작가는 가야산의 역사를 더 살펴봤어야 한다.

사실과 동떨어진 내용은 역사에서 너무 멀리 나가며 영화는 즐거움도 없었고 명분도 없었으며 역사적 사실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스토리텔링 한 각본이 반전을 보여주지 못한 아쉬움은 크고 무리한 설정이 영화에 몰입하기 힘들었다.

왕이 두 명 태어난다는 가야산의 명당 흥미로운 소재와 좋은 배우, 그러나 관객의 냉정한 평가는 아쉬운 영화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 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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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ㅡ 2019-03-16 21:23:21
영화는 영화일뿐 역사를 볼려면 다큐를 봐라 잘난체 말고 토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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