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아픔을 가슴에 속삭이는 언어의 마력
사회적 아픔을 가슴에 속삭이는 언어의 마력
서평-이민호 시집 ‘피의 고현학'
  • 김병호
  • 승인 2012.07.11 11: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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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녹녹치 않다. 그래서 시를 읽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고 서점에서 시집을 찾아보기 어려워진다. 사람들에게 시는 더욱 시시해진다. 그러나 반대의 과정도 가능하다. 시는 돈이 안 되기에 시를, 시집을 만들지 않는다. 시는 찾아보기 힘들어지고 더 시시해진다. 그래서 시는 그냥 녹녹치 않게 살기로 작정한다.

출판계를 통틀어 보더라도 시는 음식물 쓰레기통 옆에서 떨고 있는 찬밥이라는 사실은 확실하다. 그러나 오히려 출판되는 시집은 많다. 아이러니이다. 이 모순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이렇다. 시인이라는 타이틀은 다른 예술가의 명함보다 따기 쉽다. 시의 재료인 언어는 우리가 말문이 트이면서부터 사용해온 것이기에 그렇다. 여기에 적당한 수업료를 지불하면 시적 완성도와 상관없이 적당한 문예지를 알선해주는 선생님이 여럿 계시고 그 문예지와 적당한 타협을 보면 등단이라는 절차를 거칠 수 있다. 다음으로 조금 더 적당한 비용이 오가면 시집이 한권 탄생한다. 이제 지인들에게 시인 XXX라는 사인을 넣은 시집을 한권씩 돌리면서 출판기념회를 마치면 근사한 통과의례는 완성된다.

아마추어로서 시를 쓰고 시를 사랑하는 적지 않은 사람들을 욕보일 의도는 없다. 다만 시를 통해 진중하게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은 관심 밖이고 시로 일깨워야하는 진실의 풍문을 외면한 채, 다만 시인이라는 명함에 관심이 꽂힌 사람들과 그들을 이용해 돈벌이에 여념 없는 몇 출판사에 하고 싶은 말이었다.

이런 와중에 진지한 무게로 밀고나가는 시인선을 우리 지역에서 찾을 수 있음은 작지 않은 위안이다. 출판사 애지에서 발간하는 애지시선이 그것이다. 대전과 충남을 묶어 거의 유일하게 전국적인 인지도를 가진 시인선을 선보이고 있는 이 출판사는 아무래도 좀 고집스러워 보인다. 그리고 이곳에서 따끈한 새 시집이 나왔다. 시인 역시 고집스럽다.

시인 이민호의 『피의 고현학』이다. 94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시인의 두 번째 시집으로 제목부터 녹녹치 않다. 깐깐한 완벽주의자인 시인이 고고학考古學이 아닌 고현학考現學을 앞에 내세우고 다가왔다. 과거를 연구하듯 현시대를 대상으로 곰곰이 살펴보고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시를 보면 현대와 같이 곰곰이 울고 있는 시인을 발견한다.

국수 면발에도 마디가 있다/ 밤새 울어 퉁퉁 불은 눈언저리가 있다/ 후르르 삼키며 컹컹 목이 메는 곡절이 있다 (「읍揖 차린 잔치」부분)

아마 동네에 조사弔事가 있는 모양이다. 온 마을 밥상들이 달려 나와 모인 아침, 누군가 퉁퉁 불은 눈언저리와 메인 목으로 국수를 삼키고 있다. 시인의 눈은 유난히 국수 면발을 바라본다. 그리고 면발이 숨기고 있던 마디를, 눈언저리를, 곡절을 발견한다. 슬픈 역사를 발견한다. 이 시인은 이렇게 조근조근 슬프다.

깨우지 않아도 발딱 일어나 웃기부터 하는 어린 자식들 눈에 낀 곱을 떼 주며 앞으로 살며 흘릴 눈물의 곱도 함께 슬쩍 떼 낸다 (「흙다짐」부분)

둘러앉아 한 송이 포도를 나누어 먹으며/ 조금 있으면 우리 모두는/ 자줏빛 혓바닥을 갖게 될 것이라고/ ……/ 집은 왕십리 산동네/ 재개발지역/ 조금 있으면 우리 모두는 (「원시가족」부분)

시인은 모든 이들의 바닥에 깔린 슬픔을 바라볼 때나 사회적 아픔을 어루만질 때나 깐깐하게 졸여서 진액만을 받아낸다. 그래서 서정은 좀 더 꼭꼭 숨었고 그래서 훅 다가오지 않지만 슬픔은 더욱 아련해지고 사건은 가슴 쪽으로 다가오며 속삭인다.

시는 눈으로 읽고, 입으로 읽고, 냄새로 읽고, 가슴을 찌르며 읽고, 손으로 쓰다듬으며 읽고, 그리고 모든 감각을 꺼놓고 읽는다. 시가 죽었다면, 죽을 이유가 있다면, 아직 살아있다면, 살아갈 핑계가 있다면, 그래서 사서 확인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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