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재 콩트, 살다보면…] 라일락 꽃이 피면
[정덕재 콩트, 살다보면…] 라일락 꽃이 피면
  • 정덕재 시인
  • 승인 2021.04.25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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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꽃.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라일락 꽃. 사진=게티이미지뱅크

[굿모닝충청 정덕재 시인] 라일락꽃이 피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1996년쯤일 것이다. 내가 살던 대전 변두리 아파트 102동 화단은 다른 동과는 다르게 깨끗하고 꽃들이 풍성했다. 102동을 관리하는 경비 아저씨가 두 분이 있었는데, 한 분은 수시로 조는 모습이 목격됐고, 또 한 분은 호미를 들고 화단을 가꾸거나 빗자루를 들고 길을 쓰느라 앉아있는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았다.

꽃을 가꾸는 아저씨는 60대 중반 가량으로 공공기관에서 근무하다 퇴직했다. 대화를 나눌 때마다 전 직장에서 근무했을 때의 자긍심이 대단하다는 것이 느껴졌다. 사람들과 말을 나누기를 좋아한다는 게 큰 장점이자 약간의 단점이었다.

“내가 일할 때는 말이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선진국이 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많이 했다고. 내가 하는 일이 선진국으로 가는 초석이 된다는 생각으로 일을 했지”

그분은 대화 중에 선진국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이를테면 멀리서 담배꽁초를 버리는 사람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공중도덕을 잘 지켜야 선진국이 될 텐데, 선진국은 깨끗해야 되거든’ 이렇게 말을 한다. 누군가 자동차를 주차금지 구역에 세우기라도 하면 ‘주차를 제대로 해야 선진국이 될 텐데, 선진국은 주차를 잘해야 되거든’ 이런 식으로 선진국이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했고, 한자성어를 종종 섞어 썼다.

4월 중순 어느 날. 집에 들어가는데 경비실 앞에 아저씨가 서 있었다. 적당한 취기를 들킬 것은 분명했다. 왜 숨을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알 수 없지만, 숨을 참고 아저씨 곁을 쏜살같이 지났다. 하지만 아저씨의 사자성어는 어김없이 발걸음을 잡았다.

“화향백리 주향천리라는 말을 아시나?”

“그럼요. 꽃향기는 백리를 가고, 술향기는 천리를 간다는 뜻이죠.”

“그렇다면 오늘 밤에는 술향기에 실린 꽃냄새가 천 백리를 가겠구만.”

“그게 무슨 말씀.....”

“여기 피어 있는 꽃 냄새 좀 맡고 올라가 보셔. 화향백리라더니 정말 진해.”

아저씨가 가리키는 경비실 옆 화단에는 연보라색 라일락 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무더기로 핀 라일락은 밤바람에 하늘거렸다.

“아, 라일락 꽃이네요.”

“내가 말하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는 사람들이 많아. 하지만 자네는 글을 쓰는 작가니 이런 걸 그냥 지나치면 안 되지.”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게 밝혀진 것은 아저씨의 단순한 추리 때문이었다. 당시 나는 한 방송국에서 원고 쓰는 일을 하고 있었다. 뭐 대단한 일은 아니었어도, 내가 쓴 글이 TV와 라디오에 나온다는 게 조금은 신기한 시절이었다. 그때는 인터넷 검색이 없었던 시기라서 어쩔 수 없이 신문을 많이 봐야 했다. 아파트 단지에서 조간신문 여섯 개를 한꺼번에 구독하는 유일한 집이라는 사실도 아저씨의 순찰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신문을 많이 봐야 견문이 넓어지지. 근데 단순히 견문을 넓히려고 신문을 이렇게 많이 보는 건 아닐테고 무슨 일을 하는지 물어봐도 되나?”

이렇게 시작한 질문에 나는 신분을 밝힐 수밖에 없었고, 그 다음부터 말을 건네는 빈도수가 부쩍 늘어났다. 방송국 사정을 궁금해 하는 질문도 자주 이어졌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묻는 것처럼 말투도 자연스러워졌다.

“우리는 라디오를 자주 들어서 그러는데, 거기 나오는 노래는 누가 골라서 트나?”

“그거야, 피디들이 하기도 하고, 디제이가 직접 고르는 경우도 있고, 청취자가 요청하는 경우도 있고.....”

“그럼 말이야. FM 아침 11시 프로 담당자한테 내 말 좀 전해줘. 이 프로는 비만 내리면 맨날 유리창엔 비라는 노래를 틀어주는데, 좋은 노래도 한 두 번이지 좀 바꿔서 틀면 안 되나. 작년 장마철에는 내가 일주일에 네 번이나 유리창엔 비를 들은 적이 있다고. 김정호의 빗속을 둘이서, 채은옥의 빗물, 배따라기의 비와 찻잔 사이, 비와 관련된 노래가 얼마나 많은데 비만 내렸다 하면 주구장창 유리창엔 비만 틀어대니.....”

아저씨는 기억력이 좋은 청취자였다. 실제로 그 프로그램 담당피디는 비가 내리는 날이면 햇빛촌의 노래 ‘유리창엔 비’를 선곡하고, 눈이 오는 날이면 이정석의 노래 ‘첫눈이 온다구요’를 선곡한다. 첫눈이 내린 이후 두 번째 눈이든 세 번째 눈이든, 눈만 오면 기다렸다는 듯이 첫눈이 온다구요를 선곡했다.

집에 올라가던 나를 붙잡고 라일락 향기를 맡고 가라는 아저씨의 간섭은 훌륭했다. 하루에도 여러 번 오르내리는 계단 옆에 라일락 꽃이 피어 있다는 것을 외면하고 지냈다는 사실에 죄책감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스스로의 무심함을 질책하는 계기가 되었다. 재작년 펴낸 시집에 <미스 김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시를 실을 때도 이 아저씨의 얼굴이 잠시 스쳤다.

미스 김

어느새 늙어 미시즈 김이 되었군요

멋진 미스터를 만나

꽃 같은 날들을 보낼 줄 알았는데

당신의 눈물에

꽃물이 밴 것은 긴 세월 탓이겠지요

타자기 앞을 떠난 지 오래됐지만

자판의 자음과 모음은

눈을 감아도 떠오른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사월에 피는 라일락이

오월 중순이 되도록 피지 않아 걱정했어요

앞으로 더 늦어진다는 말에

잠시 멈칫했어요

미스 김이 미시즈 김이 되고

그랜드마더가 됐으니

꽃이 늙으면

피는 것도 늦어진다는 걸 알았어요

그래도 내 마음속에는

여전히 나폴거리는

미스 김이에요

고마워요 미스 김 라일락*

늦어도 좋으니

여름 오기 전

분 냄새 나는 봄밤에 만나요

아저씨는 간섭과 조언 사이의 경계를 잘 조정하는 덕목이 있었다. 라일락 꽃이 지고 난 뒤 한 달쯤 지났을까. 계단을 오르는 나를 불러 세웠다.

“내가 운전을 한 지가 20년가량 됐는데 이게 요즘은 현대인의 필수품이야. 물론 지금도 시골에선 동네에 자가용 한 대가 들어오면 저 차가 어디로 가나 한참을 쳐다보기도 하지만 말야, 바야흐로 마이카 시대니까 운전은 시대적 요구라고 할 수 있지. 요즘은 보문산 뒤편에서 연습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하더라고.”

아저씨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더 많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아저씨가 마이카시대를 언급하기 2주 전에 승용차를 샀다. 주차장에 당당히 서 있는 파란색 경차 티코를 보면 마음이 흡족했다. 나는 아침에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어주고 오 분 가량 있다가 시동을 끄고 내렸다. 이런 행동은 저녁에도 반복했다. 무려 2주일 동안 같은 자리에서 파란색 티코가 반 바퀴도 구르지 않은 채 엔진 소리만 들려주고 있으니, 눈썰미 좋은 경비 아저씨가 이 광경을 놓칠 리 없었다.

그때 나는 운전면허가 없는 상태에서 차를 샀다. 지금도 왜 그랬는지 알 수 없다. 기계는 무조건 돌아가야 생명이 길어진다는 영업사원의 말을 기억하면서, 나는 그냥 시동을 걸고 끄는 일을 성실하게 수행했다. 운전의 시대적 요구를 말하는 아저씨가 보기에 참으로 답답했을 것이다. 결국 아저씨는 운전 연습하기 좋은 보문산 뒤편 길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시동을 끄고 켜는 생명연장의 과업은 열흘가량 더 이어졌다.

“차가 굴러가니까 신기하지?”

면허증을 따고 운전석에 앉아 바퀴를 굴러가게 하는 신통한 재주를 발휘하자. 언제 옆에 왔는지 아저씨가 축하의 말을 건넸다. 그렇다. 차가 굴러가는 것은 당연한 게 아니라 신기한 일이었다. 아저씨가 추천한 보문산 뒷길은 초보자가 연습하기엔 적당했다. 옆자리에 있는 여자친구의 안전벨트를 메어주면서 서로의 입술이 가까워지는 장면은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운전석에만 앉으면 심장이 벌렁벌렁해지고 직진만 하기에도 벅찬 초보운전은, 아저씨의 조언 덕분에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지금도 운전을 하다가 라일락 꽃을 보면 그때 그 아저씨의 모습이 스치곤 한다.

* 해방 이후 미 군정 당시 군정청 소속 식물 채집가 엘윈 미더가 서울의 산에서 자라고 있던 작은 라일락 종자를 채취, 미국으로 가져가 개량해 ‘미스 김 라일락’이라는 품종을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 식물자료 정리를 도왔던 한국인 타이피스트 미스 김의 성을 따서 꽃 이름을 붙였으며, 이후 우리나라에 역수입되어 관상식물로 키우고 있다.

정덕재 시인
정덕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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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재 시인
199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으로 등단. 시집 ‘비데의 꿈은 분수다’, ‘새벽안개를 파는 편의점’, ‘나는 고딩아빠다’, ‘간밤에 나는 악인이었는지 모른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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