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문화사랑-기고] 아팠던 날도 지나고 나면 한 폭의 그림*
[세종문화사랑-기고] 아팠던 날도 지나고 나면 한 폭의 그림*
  • 김혜옥 세종시문화재단 예술사업본부장
  • 승인 2021.06.01 12: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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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옥 세종시문화재단 예술사업본부장.(굿모닝충청=세종 신상두 기자)
김혜옥 세종시문화재단 예술사업본부장.(굿모닝충청=세종 신상두 기자)

#1. 인생을 바꾸는 데 사과 하나면 충분하다

그림 그리는 94세 김두엽 할머니의 시작은 사과 한 개였다.(「그림 그리는 할머니 김두엽입니다」 2021, 북로그컴퍼니). 평생 평탄치 않은 삶을 살았고, 생계를 위한 밥벌이의 고단함은 노년이 되어서도 끝나지 않았다. 일흔 넘어 한글을 익힌 할머니는 당신 표현에 의하면 홀린 듯 마룻바닥 위에 있던 하얀 종이 위에 연필로 그려 본 사과 한 개로 인해 84세에 예상치 못했던 예술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잠깐 만났던 10대의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의 아련함도, 집 앞 동산을 넘어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시집가던 스무살의 두려움도, 택배기사로 생계를 이어가는 아들의 하얀 자동차의 수고로움도, 할머니 그림 속에서는 꿈같이 자유롭다. 밥 먹는 것도 잊고, 딸네 집에 가서도 자꾸만 그림 생각이 나서 집에 오고만 싶어지는 그런 할머니의 그림을 대하면서 어느 강철심장인들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특히 그림에 대표선수로 등장하는 만발한 꽃들은 할머니만큼이나 해맑은 웃음으로 위로를 건넨다. 영혼의 정화라는 고상한 말을 쓰지 않더라도 너무도 정직한 그 마음에 가 닿을 수밖에 없다.

세종시문화재단은 지난해 어르신(65세 이상)을 대상으로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 ‘나의 그림책 핵교’를 운영했다.(굿모닝충청)
세종시문화재단은 지난해 어르신(65세 이상)을 대상으로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 ‘나의 그림책 핵교’를 운영했다.(굿모닝충청)

#2. 그래, 이만하면 잘 살았지

세종시문화재단에서는 작년에 처음으로 어르신(65세 이상)을 대상으로 한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 ‘나의 그림책 핵교’를 운영했다. 코로나 19로 바깥출입이 어려워진 점을 고려해 비대면으로 진행하면서 지역예술가들과 함께 교육용키트를 만들고, 안내영상도 제작해 전달드렸는데 가장 어려웠던 건 혹여라도 있을지 모르는 감염에 대한 우려였다.

많은 분들이 신청하셨다가 중도에 포기한 것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일이었다. 평소에는 다들 ‘내가 살아온 얘기를 하면 책이 한권이다, 몇날 며칠을 얘기해도 모자르다’라고들 하셨지만, 막상 내 삶을 되돌아보고 그걸 글로 써보는 일은 힘들었던 상처조차도 정면으로 마주봐야하는 것이어서 적잖이 머뭇거려야 했고, 나를 주인공으로 놓는 것은 그동안의 살아온 삶과 배치되는 것이어서 당황스럽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내 삶은 그렇게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만큼 자랑꺼리가 아닌데 하는 쑥쓰러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과정을 잘 이겨내신 열여섯 분의 어르신 작가들 덕분에 ‘그래, 이만하면 잘 살았지’라는 제목으로 그림책 한 권이 출간되었다. 농사짓는 틈틈이 참여하면서 난생 처음 만져본 수채화 붓이 낯설어 포기하고 싶다며 참 많이도 애태우셨던 임길자(80세) 어르신은 “이거 안했더라면 내가 남은 인생 참 후회됐을 거 같아”라고 수줍게 환한 소감을 남기셨다.

#3. 원더풀라이프

어르신들의 문화예술 이야기가 언제부터인가 심심찮게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는 건 다행이다. 평생 문화예술과 무관한 삶을 살아왔을 확률이 높은 편인데다가, 상대적으로 그 즐거움을 느낄만한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한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공의 영역에서는 어르신을 위한 문화예술에 우선순위를 둘 필요가 있다.

영화 원더풀라이프(1998, 고레에다 히로가즈)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하나의 기억’만을 안고 죽음(삶이 아닌)을 마무리하는 내용이 주된 줄거리를 이룬다.

나라면 어떤 기억을 선택하게 될까? 삶을 되돌아보면서 가장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떠올려 볼 때, 자식의 성공도 좋고 가족들과의 행복했던 모습도 좋지만, 내 마음에 품고만 있었던 소중한 꿈을 펼쳐 보이는 순간은 어떨까? 그리고 주변사람들로부터 기꺼이 박수 받고 응원 받는 모습은 어떨까?

살면서 고통을 피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아챌 나이가 되어버렸다. 다만, 평생 그 고통을 떠안고 사는 게 아니고 ‘아팠던 날도 지나고 나면 한 폭의 그림’으로 여유 있게 바라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세종시문화재단은 이제 ‘그림책 핵교 2기’를 준비하고 있다. 어르신들의 어떤 삶이 그려질지, 하나하나의 그림에 담길 긴 이야기를 만날 설렘과 함께 말이다.

(*그림그리는 할머니 김두엽입니다. 소제목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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