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재 콩트, 살다보면…] 컵라면 덮개와 냄비 받침
[정덕재 콩트, 살다보면…] 컵라면 덮개와 냄비 받침
  • 정덕재 시인
  • 승인 2021.06.04 16:4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굿모닝충청 정덕재 시인] “선배님, 그동안 낸 시집 모두 몇 권이나 팔렸어요?”

장마철도 아닌데 연일 비가 내렸다.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리는 요란한 빗방울은 비구상 미술 작품을 연상케 했다. 창밖을 바라보며 모닝커피를 음미하고 있는데 동태탕 후배가 다가와 작년에 펴낸 시집을 첫마디로 꺼냈다.

“맨날 아파트값만 얘기하는 사람이 오늘은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하네.”

“너무 그러지 마세요. 저도 책 자주 보는 사람이에요.”

책상에 보고서 이외에 책 한 권 없는 후배의 관심 분야는 주로 부동산이다, 어느 지역에서 재개발이 이뤄진다느니, 장기적으로 보면 어떤 지역이 좋다느니, 부동산중개사 수준의 정보를 자주 쏟아내곤 했다.

“조국 전 장관 책이 많이 팔린다는 뉴스를 보니까, 갑자기 선배 책이 생각나더라고요.”

“많은 정도를 넘어 거의 빛의 속도로 팔리고 있지.”

“선배님도 알고 계셨구나.”

발간 며칠 만에 10만 부를 훌쩍 넘었다는 소식은 출판계뿐 아니라 글을 쓰는 작가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되고 있다. 이 책은 지금의 민감한 정치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독자의 관심을 끌 수 있는 타이밍이 적절했다. 물론 저자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판매는 기대했을 것이다,

“일부 서점에서는 물량을 확보하지 못해 팔지 못할 정도라고 하던데.”

“우와 대단하네요. 근데 선배 책은 얼마나 팔렸는데요?”

“무명시인의 시집이 팔리면 얼마나 팔리겠냐. 아침부터 속 긁지 말고 가서 일이나 해.”

물론 시집이 엄청나게 팔리던 시대도 있었다.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 서정윤의 <홀로서기> 그리고 이해인 수녀의 시집들이 백만 권 이상을 팔렸던 시절이 있었다. 시집 백만 권 돌파가 정상적인 독서 시장인지 의심이 들기도 했지만,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부러웠던 것은 사실이다. 요즘 시집은 만권 이상만 팔려도 베스트셀러로 불릴 정도다. 조국 전 장관의 책처럼 짧은 시간에 집중적으로 판매되는 건 그리 흔한 사례는 아니다.

“작년에 나온 선배님 시집 제가 다섯 권이나 사서 지인들한테 나눠준 거 기억하시죠?”

“그래서 내가 삼겹살에 소주 사줬잖아. 인세로 따지면 내가 큰 손해를 본거지.”

일반적으로 책값의 10%가 저자의 몫으로 돌아온다. 만 원짜리 시집 한 권을 팔면 천원의 수익이 생긴다. 저자의 지명도에 따라 변동 폭은 있지만 나는 네 권을 팔아야 식당에서 소주 한 병을 마실 수 있다.

“이제부터는 선배 시집 나오면 제가 술을 사야겠네요. 그것도 모르고 술을 얻어먹었으니 그야말로 벼룩의 간을 빼먹은 셈이네요.”

동태탕 후배는 측은한 표정을 지으며, 부동산에나 관심을 가지라는 말을 억지로 참는 눈치였다.

“근데 엊그제 새로 들어온 직원한테도 시집 주셨어요? 선배 시집이 그 친구 책상에 있던데.”

“아니, 준 적 없는데.”

“그럼 신입이 직접 샀나 보네요. 무명시인의 시집을 다 사고 훌륭한 청춘이네.”

동태탕 후배는 무명이라는 낱말에 힘주어 말하고 자리에 돌아갔다.

 

내 시집을 가지고 있다는 신입직원의 책상이 궁금했다. 점심시간 무렵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서 간 구획정리 차원에서 나눠놓은 칸막이 건너편으로 갔다. 신입의 자리를 흘낏 쳐다보았다. 업무 이외의 말을 걸기에는 사무실이 조용했다. 더군다나 복도에서 한 두 차례 인사만 나누었을 뿐, 제대로 말을 섞어본 적이 없는 직원이다.

서류 더미가 쌓여있는 책상 한구석에 낯익은 시집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반가웠다. 어떤 연유로 시집을 샀는지 궁금했다. 점심을 같이 먹자고 할까, 커피라도 한잔하자고 말을 할까, 어떻게 말문을 틀지 잠시 고심하는 사이, 점심을 먹으려는 직원들이 하나 둘 일어났다. 신입은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신입이라고 일을 많이 시키나 보네요.”

나는 무심코 지나가다 본 것처럼 한마디 던졌다.

단발머리 신입은 고개를 돌렸다. 고개는 내 얼굴을 향했어도 손은 키보드 위에서 바쁘게 움직였다.

“우리가 인사도 제대로 못 나눴죠?”

그제야 신입은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이름을 밝히자 반갑게 웃음을 지었다. 웃을 때 눈이 작아지면서 눈썹은 만화 캐릭터처럼 움직였다. 귀여웠다. 책상 위에 있는 시집을 들어 보였다.

“저는 이름하고 얼굴하고 따로 알고 있었네요. 반갑습니다. 선배님들이 얘기해 주시더라고요. 회사에 글 쓰는 분이 계시다고. 저도 한때는 문학소녀였거든요.”

“반갑네요. 그래서 이 시집을 산 건가요?”

“네. 회사 앞에 알라딘 중고서점 있잖아요. 어제 선배들이랑 거기에 갔더니 있어서.”

중고서점이라는 말에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중고서점에서 내 책을 샀을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근처 대형서점이나 인터넷서점에서 구매한 것으로 짐작했다.

“별 감동이 없거나 재미가 없어서 책을 팔았나 보네요. 그럼 싸인이나 해줄까요? 이렇게 인연이 된 기념으로.”

“싸인요?”

갑자기 신입의 눈썹이 일자 모양이 되었다. 난감한 표정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는 눈썹의 변화였다.

“싸인은 안 해주셔도 되는데. 여기 싸인이 있어서요.”

“나는 싸인해 준 기억이 없는데......”

나는 말꼬리를 흐리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저자가 싸인을 해서 누군가에게 주었는데, 그분이 중고서점에 내다 팔은거죠.”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책 표지를 넘기면 책을 받은 사람의 이름이 또렷하게 적혀있을 것이다. 그 사람이 누군지 확인할까 망설이는 동안, 여직원은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팔았는지 확인 안 하시는 게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저도 말씀 안 드릴게요.”

 

자리에 돌아와 앉아 창밖을 보았다. 이른 점심을 먹고 산책하는 직장인들의 발걸음은 여유로웠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허기가 밀려 왔고 식욕은 빠른 속도로 떨어졌다. 내 시집을 중고서점에 판 놈이 누군지 알고 싶은 생각이 떨쳐 지지 않았지만, 신입직원의 조언대로 참기로 굳게 다짐했다. 의자 뒤 벽면에 바짝 붙어있는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머그컵에 가득 따랐다. 목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냉수는 뱃속을 짜릿하게 자극했다. 잠시 혼미했던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바쁘셨어요? 점심도 못 드셨다면서요?”

동태탕 후배가 아이스커피를 들고 와 말을 걸었다.

“오늘도 동태탕 드셨나? 너 지금까지 동태 삼천 마리는 먹었지? 올여름엔 바닷가에 가서 제사라도 한번 지내라고.”

“제사는 왜요?”

“동태를 많이 먹게 해줘서 고맙습니다 하고 용왕님께 제사를 지내라는 거지.”

“점심 못 드셨다고 말씀도 삐딱하게 하시네. 무슨 꼬이는 일 있어요?”

“일은 무슨, 급하게 처리할 게 있어서 못 먹었어.”

“아무리 급해도 오늘 점심을 놓치면 평생 못 먹는 거 아시면서.”

후배는 점심시간 직전에 일어난 상황을 모르는 눈치였다.

“아침에 말씀드렸던 그 신입 말이죠. 선배님 완전 팬인 모양이에요. 방금 전에 오다 보니까 선배 시집을 들고 휴게실에 가던데요.”

점심시간에 시집을 읽는다는 말에 다시 궁금증이 유발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휴게실로 향했다. 복도 끝 휴게실 한쪽 면은 유리창으로 마감이 되어 있다. 유리창은 눈높이까지 반투명 시트지를 붙였는데, 고개를 빼고 들여다보면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 파악이 가능했다.

신입은 정수기 앞에서 컵라면에 물을 따르고 있었다. 키보드를 바쁘게 치느라 점심시간을 놓친 모양이었다. 잠시 안쓰러운 마음이 스쳤다. 탁자 위에는 푸른색 표지의 시집이 놓여있다. 컵라면에 물을 다 따른 신입은 탁자 앞에 앉았다. 그리고 익숙한 동작으로 시집을 컵라면 위에 살포시 올려놓았다. 시집은 컵라면 덮개로 손색이 없었고, 신입의 손은 스마트폰 액정을 휘젓기 시작했다. 명료해진 정신이 다시 혼미해졌다. 다음에는 두툼한 표지로 출간했던 첫 시집을 선물로 줘야겠다는 생각이 벼락처럼 스쳤다. 시집의 용도를 담은 시를 보여주면서 말이다.

냄비 받침의 역할

하드커버로 제작한
첫 번째 시집 <비데의 꿈은 분수다>가
냄비 받침이 된 적이 있다
직접 목격하지는 않았지만
표지에 남아있는 둥그런 자국 하나로
냉철한 의심을 던졌다
그 누구도 라면 냄비를 올려놓았다고
진술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된장찌개를 올려놓았다고
실토하지 않았다
책꽂이에서 먼지 쌓인 시집이
식탁 위로 나온 것만으로
감사한 일이 아니냐고 묻는 이가
혐의를 받기에 충분했다
시집 표지에 인쇄된 둥근 디자인을 보면
청국장 된장찌개 김치찌개가
보글거린다
냄비 받침 시집은
언어의 그릇으로
마침내 따뜻한 생명을 얻었다

----------------------------------------------------------

▲정덕재 시인
199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으로 등단. 시집 ‘비데의 꿈은 분수다’, ‘새벽안개를 파는 편의점’, ‘나는 고딩아빠다’, ‘간밤에 나는 악인이었는지 모른다’ 등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굿모닝충청(일반주간신문)
  • 대전광역시 서구 신갈마로 75-6 3층
  • 대표전화 : 042-389-0080
  • 팩스 : 042-389-0088
  • 청소년보호책임자 : 송광석
  • 법인명 : 굿모닝충청
  • 제호 : 굿모닝충청
  • 등록번호 : 대전 다 01283
  • 등록일 : 2012-07-01
  • 발행일 : 2012-07-01
  • 발행인 : 송광석
  • 편집인 : 김갑수
  • 창간일 : 2012년 7월 1일
  • 굿모닝충청(인터넷신문)
  • 대전광역시 서구 신갈마로 75-6 3층
  • 대표전화 : 042-389-0087
  • 팩스 : 042-389-0088
  • 청소년보호책임자 : 송광석
  • 법인명 : 굿모닝충청
  • 제호 : 굿모닝충청
  • 등록번호 : 대전 아00326
  • 등록일 : 2019-02-26
  • 발행인 : 송광석
  • 편집인 : 김갑수
  • 굿모닝충청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굿모닝충청.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mcc@goodmorningcc.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