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호의 인문학 서재] 인간사의 흥망성쇠
[임영호의 인문학 서재] 인간사의 흥망성쇠
  • 임영호 동대전농협조합장
  • 승인 2021.07.29 09:24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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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史記)
사기(史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보다 뛰어난 역사서는 없습니다. 《사기》는 중국이라는 세계를 무대로 하지만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을 떠나 인간 군상(群像)에 관한 깊은 통찰에 관한 보고(寶庫)라 할 수 있습니다. 《사기》는 자신의 위치에 따라 살아가는 데 지향해야 할 모범과 준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사마 담의 유지(遺志)

《사기》는 사마천 사후에 후대의 사람들이 붙인 것으로 당시에는 태사 공서(太史公書)로 불리었습니다.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 담(司馬談)은 대대손손 가업인 사관(史官)입니다. 천문과 역사, 역법을 관장하는 점쟁이나 무당에 가까운 비천한 지위로 태사공(太史公)에 올랐습니다.  

사마천
사마천

사마천은 아버지 사마 담을 기려 태사공이 지은 책이란 뜻으로 태사 공서(太史公書) 혹은 태사공 서기(太史公書記)라 하였고, 태사공 서기의 약칭이 바로 《사기》입니다. 사마천은 기원전 145년 한(漢) 경제(景帝) 지금의 산시성(山西省)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죽음은 아무런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한무제(漢武帝)의 일생과 비슷하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사기》는 사마천의 강직한 개성이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흉노 정벌에 실패했으나 평소 사람됨을 알고 있는 장수 이릉(吏陵)을 변호했다가 한무제의 노여움을 사서 황제를 속였다는 죄목으로 사형을 언도 받았습니다. 돈 없는 사람이 속죄금 대신에 받는 남근(男根)이 잘리는 궁형(宮刑)을 당합니다. 

이때가 사마 천이 《사기》를 저술한지 7년째 되는 해였습니다. 아직 초고를 완성시키지 못했던 그는 수치 속에서 구차한 삶을 살아가지만 그의 아버지 태사공 사마 담(司馬談) 유훈인 《사기》를 완성하려고 모든 치욕을 참아냅니다. 죽음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어떻게 죽느냐가 어려운 것입니다. 사마천은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남아 본격적으로 집필에 몰두하였고, 2년 후에는 오히려 예전의 태사령(연봉 600석)보다 직급이 올라가 중서령(연봉 1000석)이 되었습니다.

그에게 가장 큰 효(孝)는 후세에 이름을 날려 부모를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참을 수 없는 내적 고통과 영혼의 깊은 상처를 《사기》를 통하여 승화시켰습니다. 크게 쓰임을 받지 못했지만 육체적인 고난과 정신적인 역경을 이겨낸 위대한 인물들의 전기를 쓰면서 마음의 위안을 삼았습니다. 

사마천은 어려서부터 반듯하고 정확하게 글자를 배웠습니다. 당시 엄혹한 현실은 관리나 백성이 글을 올릴 때 글자 한자라도 정확하지 않으면 문책을 받거나, 글자 한 자를 잘못 쓰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습니다. 문자를 중요시하는 관료 제도와 사마 담의 엄격한 가정교육 속에서 사마천은 사기를 집필하는데 필요한 기본을 철저히 익혔습니다.

기전체 역사기술의 시작

사마천의 역사 기술은 기전체(紀傳體)입니다. 기전체는 역사 사실을 기록할 때 본기(本紀), 세가(世家), 표(表), 서(書), 열전(列傳)으로 구성하는 방법으로 인물 중심으로 서술하는 전통적 역사 서술법입니다. 《사기》는 총 130편에 52만 6500자의 글자로, 중국 상고(上古) 시대의 황제로부터 한무제(漢武帝)까지 2천수백 년에 걸친 역사서입니다.

본기(本紀)는 제왕의 언행과 업적, 세가(世家)는 제후국의 흥망성쇠와 영웅들의 업적, 표(表)는 연대별 중요 사건, 서(書)는 각종 제도와 문물의 연역, 열전(列傳)은 영웅호걸들의 활동이 들어 있습니다. 《사기》의 중요 부분은 제왕의 전기인 12본기, 제후의 전기인 30세가, 각 분야 대표적인 인물 전기인 70열전입니다.

평민의 시각으로 본 인물전기

《사기》는 인물 전기입니다. 실제 한 인간을 사실적으로 기록하고, 기존 역사기록 방식에 구애됨이 없이 자신의 관점과 인식 태도를 반영하였습니다. 그가 쓴 인물에 대하여 그저 평면적으로 나열하거나 무관심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중요시한 것은 한나라가 일어난 100년간의 근대사 인물입니다. 그들을 자세히 보면 거의 비극적인 인물들입니다.  

《사기》는 단순한 왕조의 유지를 위한 역사서가 아닌, 자신만의 역사관을 위한 역사서입니다. 정사(正史)처럼 단지 왕후들의 따분한 기록이 아니고 평민의 입장에서 평민의 정서로 기록했습니다. 그의 옳고 그른 판단의 기준은 성인(聖人)이나 도덕군자와 달랐습니다.

중심사상은 민중성

그의 사상의 중심은 민중성(民衆性)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이 보았습니다. 그는 봉건 통치계급의 이른바 성현과 인의(仁義) 도덕을 의심했습니다. 그는 결코 통치계급의 전통적인 도덕적인 기준에 속박되지 않고 직접적으로 민중의 이익과 희망이 억압받는 것에서 도덕의 문제를 보았습니다. 사마천의 애증(愛憎)의 경계는 억압받는 수많은 민중을 동정(同情) 한 것에서 출발합니다.

《혹리(酷吏) 열전》에서 한무제 때 포악한 관리 12명의 행적을 서술하고, 관리가 민중 위에 군림하여 가혹하게 법 적용을 하여 도적이 들끓고 농민봉기가 일어났음을 기록하고, 관리가 백성을 핍박하면 백성이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며 백성의 반항적 투쟁에 공감하였습니다

《유협(遊俠) 열전》은 도덕적인 하층인물의 전기입니다. 여기에서 억압당한 백성을 측은하게 여기고 통치의 횡포에 반항하는 인물에 대하여 기술하였습니다. 

《자객(刺客) 열전》에서 자객들의 의(義)를 찬탄합니다. 그들은 잃은 땅을 되찾고자 비수로 권력자를 위협하는가 하면,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이고 죽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마 천은 일개 필부(匹夫)에 지나지 않지만 다른 사람의 다급함을 구원하고, 약자를 동정하고,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횡포에 반항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몽염(蒙恬) 열전》에서 몽염은 모함에 빠져 사형당할 처지에 있었으나 병사 30만을 이끌고 1만여 리의 장성과 1800리의 길을 닦아 국가에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럼에도 천하가 안정되지 않은 가운데 과중한 노역에 고통받는 백성들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위장군표기(衛將軍驃騎) 열전》에서 위청, 곽거병 같은 두 외척 장군이 전쟁에서 거둔 공로의 실상을 폭로하고, 자신들은 쌀과 고기가 버려질 정도로 사치스러웠지만 병사들을 굶주리게 했다고 기술했습니다.

《이장군(李將軍) 열전》에서 장군 이광(李廣)은 크고 작은 전쟁에서 병사들과 생사고락을 같이 했지만, 일생 동안 제후에 봉해지지 못하고, 나중에는 상관의 모해(謀害)로 자결을 하자, 백성들과 병사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기술하였습니다. 사마천의 관점은 통치자와의 관계에서 평가한 것이 아니라 사병과의 관계에서 연관을 두었습니다.

현실적이고 진보적인 가치 중심

《사기》는 당시 유교 사회의 경향을 벗어나 보다 진보적입니다. 《화식(貨殖) 열전》에서 세력과 이익을 숭상하고 빈천함을 수치로 여겼습니다. 그만큼 사마천은 유교 이념과 달리 경제행위에 대하여 중하게 여기고 훨씬 현실적이었습니다

《사기》 세가(世家) 편에서 공자(孔子)와 진섭(陳涉)은 제후의 자격이 없었지만, 공자는 학술적 혹은 문화적으로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하여 《공자세가》에 기록하였고, 진섭은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있느냐’며 신분제의 논리구조에 커다란 화두를 꺼내들고 폭력 통치에 민중봉기를 일으켜서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인 진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했다 하여 제후의 기록인 《진섭세가》에 기록하였습니다. 

또한 열전(列傳)에서 당시의 코미디언을 기록한 《골계열전(滑稽列傳)》, 동성연애자들을 다룬 《영행열전(佞幸列傳)》, 택일이나 금기 등에 관한 것들을 기록한 《일자열전(日者列傳)》, 점쟁이들을 기록한 《구책열전(龜策列傳)》 등 다양한 주제로 당시 사회를 그렸습니다. 

사실 중심의 기록

《사기》는 시실 중심의 실록(實錄)입니다. 역사는 상상을 개입시켜서는 안됩니다. 특히, 그는 거짓으로 미화하지 않았고 악한 것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건을 바탕으로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스토리를 강화하였습니다. 

한무제
한무제

한무제는 전국을 순시하면서 명산 대첩에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는 의식인 봉선(奉先)을 거행했습니다. 사마 담은 한무제 통치 기간의 전기(前期)에 해당하는 30년간 줄곧 사관의 자리에서 황제를 수행하면서 전국 곳곳을 다니면서 제사 의식에 참여했습니다. 

사마 담은 비천한 직책에 비하여 이상(理想)이 큰 인물로 역사 자료를 모으고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에 노력하여 《사기》를 쓰기 위한 기초자료를 아들 사마천에게 제공하였습니다.

사마천은 스무 살 즈음에 아버지의 권유로 전국 명산대천을 여행하며 백성들을 접촉했고, 고대와 근대의 역사의 현장을 답사했습니다. 이때 각 지방의 특산물과 지리, 다양한 문화들을 체험하면서 얻은 경험이 훗날 《사기》 저술에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순임금과 요임금의 흔적, 비극적인 시인 굴원(屈原)이 목숨을 던진 곳, 명장 한신(韓信) 일화의 현장, 공자(孔子)가 머물렀던 곳, 항우(項羽)의 도성 등을 답사하면서 시야를 넓히고 포부를 키웠습니다. 

2100년 전에 어떤 목적을 가지고 여행했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특히 아바지 사마 담의 녹봉이 변변치 않은데, 아들의 여행 자금을 마련하여 여행하게 한 것은 사마 담의 뜨거운 직업의식이라 볼 수 있습니다.

전기문학의 창조

《사기》는 전기(傳記) 문학입니다. 기전체 사학과 전기문학을 묶어서 새롭게 창조하였습니다. 사기는 후세의 희곡에 대하여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항우본기(項羽本紀)를 다룬 패왕별희(霸王別姬) 같이 사기 속 몇몇 인물은 극작가에 의하여 무대에 올려져 있습니다.

패왕별희
패왕별희

《사기》 이전의 역사 산문인 좌전(左傳)은 사건을 서술하면서 비록 인물의 말투를 묘사하였지만, 인물을 생동감 있고 선명하게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사기》에서 거론한 인물들은 통속적인 말투로 기술하여 개성이 뚜렷할 뿐 아니라 전형성(典型性)이 풍부하고 사회와 역사를 깊이 있게 반영하고 있습니다. 

굴원
굴원

중국 문학사에서 사마천은 위대한 시인 굴원(屈原)과 이름을 나란히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불우한 처지이면서 현실에 대한 비판이 비슷합니다. 굴원의 그의 작품 이소(離騷)에서 초(楚) 나라 귀족집단의 부패한 통치와 함께 할 수 없음을 반복하여 강조하였습니다. 사마천도 《사기》에서 한나라의 잔혹하고 우매한 봉건 통치에 대한 혐오와 억압받는 민중에 대한 동정을 끊임없이 표현하였습니다.

봉건사회 전체 사상체계 수립

공자
공자

《사기》는 사마천이 공자(孔子)와 같은 이상으로 저술하였습니다. 사마천은 공자에게 무한한 존경심을 가졌습니다. 공자는 시운(時運)이 좋지 않아 명군(名君)을 만나지 못했지만, 만년에 역사기록에 의거하여 춘추(春秋)를 지음으로써 봉건 통치자에게 필요한 천도(天道), 왕도(王道) ,인도(人道)를 제시하였습니다. 공자는 추상적인 도리를 구체적인 사실을 통하여 명확하게 표현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사마천은 사마 담이 죽은 지 6년이 지나서 《춘추》를 계승한다는 목적으로 《사기》를 저술하였고 그 속에 천도관(天道觀), 역사관(歷史觀), 도덕관(道德觀) 등이 포함된 봉건사회 전체 사상체계를 표명하려 했습니다.

제후들의 성공적인 인재전략

《사기》에는 춘추전국 시대 제후들의 성공전략이 들어있습니다. 《진시황(秦始皇)본기》와 《항우(項羽)본기》, 《한고조(漢高祖)본기》, 《여태후(呂太后)본기》에서 국가를 경영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원은 인재입니다. 부국강병을 원했던 춘추전국 시대의 제후들은 경쟁적으로 인재를 구했습니다. 리더는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과 함께 적재적소에 인재를 활용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초한(楚漢) 쟁패 시대의 유방은 세의 불리함을 뒤엎고 극적인 반전을 일궈낸 것은 부하의 힘이었습니다. 《한고조 본기》에서 유방은 장량(張良)이나 소하(蕭何), 한신(韓信)이라는 인재를 얻어 그 사람들의 지혜를 빌렸지만, 항우는 범증(范增) 한 사람도 얻지 못하였습니다.

《제태공 세가(齊太公世家)》와 《관안 열전(官晏列傳)》에서 춘추시대 제나라의 환공(桓公)은 군주로서 걸출한 인물이 아니었음에도 중국 최초의 패자가 되었습니다. 이는 재상인 관중(管仲)의 보좌를 받은 덕분입니다. 군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에게 뜻을 드러냅니다.

《맹상군 열전(孟嘗君列傳)》에서 맹상군은 손님 접대하기를 즐기고, 재주 있는 선비들과 교류하였으며, 어려움을 당했을 때 그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보잘것없는 인물로 인하여 목숨을 건졌다는 계명구도(鷄鳴狗盜)라는 고사 성어가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장수들의 성공적인 용병술

춘추전국 시대 장수들의 성공전략도 《사기》에 있습니다. 《손자·오기 열전》에서 손무(孫武)가 궁녀들에게 군사 훈련을 시킨 이야기입니다. 손무는 180명을 두 편으로 나누고, 왕이 총애하는 두 여인을 그 대장으로 뽐았고, 모두에게 창을 나눠주고 정렬시켰습니다. 그들을 호령했지만 웃기만 하고 명령대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손무가 두 대장을 참수하였더니 잡소리 하나 없이 구령대로 하였습니다.

제갈공명
제갈공명

읍참마속(泣斬馬謖)이라는 고사 성어를 만들어 낸 제갈공명(諸葛孔明)도 군대를 이끌며 가장 중시한 점은 군법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것이었다. 그가 벤치마킹한 대상도 바로 손무였습니다. 

오기
오기

오기(吳起)도 용병술에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장수인 그가 부하 병사의 상처에 난 고름을 입으로 빨아주었습니다. 사람을 잡아먹고 인골로 취사를 해야 할 처지에도 병사들이 등을 돌리거나 도망치지 않은 군대는 손무의 후손인 손빈(孫臏)과 오기 군대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기》는 큰 준령, 넘기 힘든 여정

《사기》는 사마천이 태사령과 중서령이라는 자기 직분에 충실하면서 순수하게 개인 자격으로 황실에 소장되여 있는 고전과 사료를 참고하여 객관적 입장으로 생동감 있고 선명하게 저술 했습니다.  

《사기》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에 대한 다양한 해답을 제시합니다. 시대에 맞선 자, 시대를 거스른 자, 그리고 시대를 비껴간 자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참 많습니다. 사마천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간 인물들을 생동감 있게 묘사함으로써 지금 현재 읽는 자들에게 큰 감동을 줍니다. 

사마천 평전
사마천 평전

《사기》는 중국 고전 역사서 중 최고로 영향력은 참 큽니다. 《사기》는 읽어야 할 책이나 분량이 엄청나서 ‘《사기》를 읽었다’고 해도 열전(列傳) 부분이며, 나머지는 전문가 아니면 손도 대지 못됩니다. 열전도 분량이 길어 읽고 싶은 곳을 입체적으로 선택하여 읽기를 권합니다. 

임영호 동대전농협조합장
임영호 동대전농협조합장

책은 민음사와 마인드 북스, 현대지성, 서울대 출판사 등 여러 종이 있으나 처음에는 분량이 적은 것을 택하고, 조금 익히면 전체를 읽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사기》는 사마천의 개성이 뚜렷한 책으로 글 항아리의 《사마천 평전》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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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cmaca 2021-07-30 08:11:01
하늘(하느님)]하위신의 형태로 계절을 주관하시는 五帝가 계십니다.

macmaca 2021-07-30 08:09:06
성균관도 석전대제로 유교의 부분집합중 하나임.@일부 지역에서 굿이나 푸닥거리라는 명칭으로 신령숭배 전통이 나타나도, 이를 무속신앙이라 하지는 마십시오. 불교라고도 하지 마십시오. 유교 경전 논어 팔일(八佾)에서는 공자님이전부터 섬겨온 아랫목 신(안방신), 부엌신등을 섬기는 전통도 수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전통적인 신명 섬기기에 대해서, 공자님도 오래된 관습으로, 논어 "향당(鄕黨)"편에서, 관습을 존중하는 예를 표하셨습니다. 신명(神明:천지의 신령)모시기 전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조상을 섬기는 제사는 유교가 공식적이고, 유교 경전에 그 절차와 예법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유교경전 예기에는 상고시대 조상신의 위치에서 그 혼이 하늘로 승천하시어 인간을 창조하신 최고신이신 하느님[天(하느님, 하늘(하

macmaca 2021-07-30 08:08:01
동아시아 세계종교인 유교나, 서유럽의 세계종교인 가톨릭의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절대적 초월자이십니다.

@ 공자님의 시호. 하늘이 보내신 성자이신 성인 임금 공자님은 황제 칭호인 문선제(文宣帝).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圣文宣王)의 오랜 전통으로 호칭되어 오고 있습니다.聖人에 이르신 스승(至聖先師). 은나라 왕족의 후손이신 공자님. 참고로 하면, 공자님 아버지 시호는 계성왕(啓聖王)이시고 공자님 어머니 시호는 계성왕 부인(啓聖王夫人)이십니다.

http://blog.daum.net/macmaca/3127

@한국 유교 최고 제사장은 고종황제 후손인 황사손(이 원)임. 불교 Monkey 일본 항복후, 현재는 5,000만 유교도의 여러 단체가 있는데 최고 교육기구는 성균관대이며,문중별 종친회가 있고, 성균관도

폭염경보 2021-07-29 11:19:01
조각조각 알고 있는 얘기들이 사기에 있는 내용이었군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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