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알아가는 심리상담] ‘역할’이 바뀐 사랑
[마음을 알아가는 심리상담] ‘역할’이 바뀐 사랑
  • 김경숙 트루비 심리상담·통계연구소 대표
  • 승인 2021.08.19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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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게티이미지뱅크] / 굿모닝충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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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숙 트루비 심리상담·통계연구소 대표, 순천향대 시간강사, (전) 아산시청소년상담복지센터 센터장, 교육학 박사, 청소년상담사, 상담심리사
김경숙 트루비 심리상담·통계연구소 대표, 순천향대 시간강사, (전) 아산시청소년상담복지센터 센터장, 교육학 박사, 청소년상담사, 상담심리사

[굿모닝충청 김경숙 트루비 심리상담·통계연구소 대표] 야근 중, 끝방 상담실에서 고요한 정적을 깨고 내담자인 듯한 청소년의 울부짖는 울음소리가 사무실까지 들려왔다. 잠시 긴장했다. 무슨 일일까? (요즘 성폭행 사례들이 간간이 올라오는 터라 성폭행 피해 내담자인가?) 사실 상담실 방음벽 안에서 무슨 말이 오가는지 도통 알 수는 없다. 다만 심한 울음소리와 간간이 들리는 울먹임만 감지될 뿐이다.

이런저런 상상을 하다 아, 부모와 함께 들어간 사실을 떠올리곤 잠깐의 호기심을 내려놓았다. 그리곤 어느새 생각의 화살이 내 마음으로 날아왔다. 누군가 부모에게 울부짖을 수 있다면 그건 오히려 건강한 것 아닌가? 저 아이는 행복한 것 아닌가? 나는 한 번이라도 저렇게 부모에게 내 욕구나 갈망을 눈물과 울부짖음으로 토로한 적이 있었나? 기억나지 않았다. 그럼 나는 어떻게 자랐지? 윙~ 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돌아가는 전자렌지 속 노란빛에 온몸을 맡기고 소리 없이 누워있는 털 뽑힌 닭이 떠올랐다. 하, 이렇게 표현하니 비참한가?

모처럼 우리 집 원 가족 모임은 거친 파도의 해일이 휘몰아치고 간 황량한 빈자리 같았다. 겉으론 만남의 기대로 포장되었지만, 자라면서 묵혀 온 곰삭은 서운함과 긴장된 감정들이 어느 틈새로 살짝 건드려진 단초 몇 마디에 상처의 강둑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하, 모두 이제 어른도 한참 어른들인데 말이다. 정직히 말해 성장하지 못한 어른들의 저돌적 반항이었다. 그때 당시 힘들었다고 말하지 못한 채 살아온 대가를 세월이 무척 흐른 지금, 이상하고 터무니없고 황당한 값을 치르는 꼴이 되어 버렸다.

‘마지막 잎새’로 잘 알려진 오 헨리(O.Henry)의 작품 속 주인공처럼 따뜻한 인간애가 넘치는 가족이 이 세상에 있기는 한가? 가난한 부부의 ‘크리스마스 선물’ 이야기는 산뜻한 반전으로 내 마음의 기억에 새겨져 있다.

아내(델라)는 남편에게 멋진 시계 줄을, 남편(짐)은 아내에게 아름다운 머리핀을 선물로 내밀었다. 하지만 이미 짐은 델라의 머리핀을 사기 위해 (솔로몬 왕도 질투할 만한 유일한 가보였던) 자신의 시계를 팔았고, 델라는 (시바의 여왕이 가진 보석보다 아름다운) 자신의 머리채를 팔아서 짐에게 줄 시계 줄을 사 버렸는데 이 운명의 시간 차를 어쩌겠나?, 애처로운 부부의 삶을 낭만적으로 묘사한 ‘크리스마스 선물’ 이야기가 사실적 진실과는 동떨어진 고전적 허구의 산물이라 할지라도, 사랑과 애틋한 마음을 상호 간에 주고받는 공정한 서구식 거래는 참으로 마음에 든다. 왜냐면 먼 훗날, 적어도 어느 한쪽 파트너가 억울해서 마음을 닫아버리고 살았다고 울부짖는 일은 없을테니까...  

내담자 N은 어린 면과 어른스런 측면이 묘하게 공존하는 인상이다. 이렇게 말하면 그런 얼굴은 어떤 건가요? 아니면 얼굴이 둘로 나누어지나요? 하려나? 순수함과 영악함이 교차하는 느낌이다. 새초롬한 표정으로 조근조근 수줍게 말하면서 가끔 시원한 핵 사이다를 던지며 막힘없는 문장을 구사한다. N의 말이다. “지난주 상담을 생각하면 좀 부끄러워져요. 제가 애 같이 얘기했나 싶었어요. 예전에 내가 잘했던 것에 우쭐한 것 같아요” 한다.

나는 회기 시작하자마자 내담자의 속내가 담긴 첫 마디를 놓치지 않는다. ‘애’같이 표현하면 어떤가? 상담자 앞에서 애 같이 굴면 창피한가? ‘애스러움’에 꽂힌 이유가 있을까? 상담자 앞에서 의젓해야 하나? 나는 이 문장을 머리에 담고 회기 중 대화를 눈과 마음으로 듣는다. 오 헨리의 말대로 ‘진실을 찾아 우물 밑바닥까지 내려가 봐야 하는 사람’이 상담자이기 때문이다.

N의 호소는 성장하면서 겪은 다양한 가정 문제의 상처들이 아문 줄 알았는데 실제로 자신의 앞길을 막고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아버지는 도박에 빠져 가족을 방치하였고 어머니는 생계유지를 위해 고된 근로에 시간을 할애하였다.

애정결핍였던 어린 N은 고생하는 어머니에게 ‘정서적인 남편’, 다른 가족들에겐 ‘정서적인 지지자’ 역할을 하면서 정작 자기 내면의 욕구는 혼자 해결하고 살아가야 했었다. 귀가하는 어머니를 현관에서 맞이하고 짐을 받아들고 힘들지 않았냐 어머니의 일상의 애환을 다 들어 주며 어린 나이부터 자신을 도외시한 채 살아왔다.

‘부모화(parentification)’된 사람의 특성 아닌가? 보울비(Bowlby)는 너무 어린 나이에 부모를 보살피는 행동을 발달시키면 성인기 대인관계에서 타인을 강박적으로 보살피는 행동(거절 못 하고 배려만 하는)이 형성됨을 우려했다. 채스(Chase)가 말한 상호호혜적이지 않은 불공평한 느낌으로 실존적 관계 맺음의 어려움과 상통한다. 하, 상담의 포커스는 무엇일까?

N은 영특하게도 ‘자기 돌봄 하기’로 들어간 듯하다. “저는 자주 내 앞에 ‘임금님 귀는 당나귀의 숲’을 보고 저의 얘길 해요. 상담 끝나면 저 자신하고 대화해요” 한다. 부정적인 감정을 표출하기 어려운 ‘부모화’ 된 삶에서 ‘자기 정서 접촉’은 얼마나 중요한가? 어머니와 융합된 양가감정에서 자신의 감정을 객관화하는 것 또한 중요하리라.

지난 회기, N은 나를 따뜻하게 응시하며 말했다 “예전엔 제가 우리 집 고용인 같았는데 지난주엔 제가 딸같이 지낸 것 같아요” 하, N이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았나? 진실의 우물에서 상담자가 찾는 단어를 보석처럼 알아차렸으니 말이다.

오늘 N은 ‘까만 상자’의 열린 틈으로 ‘연두색 나무’가 싹트고 있다며 눈물을 닦아냈다. 그렇게 힘들었던 시절의 모든 것을 N은 ‘까만 상자’ 속에 넣고 견뎌온 것이다. 나는 그것을 N의 ‘일부’라고 이름 붙였다. 그리고 N은 또 다른 나머지 ‘일부’를 지켜낸 감동을 ‘연두색 나무’로 표현하며 자신을 포근히 감싸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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