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재 콩트, 살다보면…] 내 얘기도 좀 써봐
[정덕재 콩트, 살다보면…] 내 얘기도 좀 써봐
  • 정덕재 시인
  • 승인 2021.09.05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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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충청 정덕재 시인] 서늘한 바람이 분다. 가을이다. 이런 문장은 서정적이다. 서늘한 바람이 분다. 정치의 계절이다. 이런 문장은 서사의 흐름을 예감한다.

내년에 새로운 대통령을 뽑기 위해 여러 정당의 일정이 분주하고 소란스럽다. 이합집산의 바람이 거세게 불어올 것은 경험을 들춰봤을 때 자명하다. 후보들에게 칼과 창을 쥐어준다면 강호에 피바람이 불었을 것이다.

그냥 말로만 주고받으니 겉으로 보이는 상처는 없어 보여도, 벌어지는 상황에 따라 내상의 크기는 깊을 것이다. 얼마 전 정치 관련 뉴스를 읽다가 정치적인 대선공약에서 비껴있는 재미있는 낭만공약을 시로 쓰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새로운 시집을 기획했다.

이른바 정치풍자 낭만공약이라는 수식어를 내세워 기획한 시집에는 적당한 풍자와 익살을 토대로 모두 50여 편의 시가 들어갈 예정이다. 예를 들면 정치인들이 보유하고 있어 종종 논란이 되는 농지에 대해선 이런 눈으로 시를 썼다.

스토리밥작가협동조합이 발간 예정인 정치풍자 낭만공약 프로젝트 시집 '대통령은 굽은 길에 서라'. 사진=정덕재 시인 제공
스토리밥작가협동조합이 발간 예정인 정치풍자 낭만공약 프로젝트 시집 '대통령은 굽은 길에 서라'. 사진=정덕재 시인 제공

“정치인이나 관료가 논 세 마지기를 가지고/서울에 있는 아파트에 살고 있거나/밭 다섯 마지기를 가지고/수도권에 살며/한 마지기 당 열 포대씩/돈분과 계분이 들어있는 퇴비를 거실에 쌓아놓는다면/부동산 투기라고 부르지 않겠습니다/돼지똥과 닭똥의 영양분/질소 인산 칼리에서 풍겨나는/지독한 냄새와 함께 한다면/부동산 투기라는 오명을 벗어날 수 있을겁니다/당신을 진정한/농민의 아들 농민의 딸이라고 부르겠습니다/가끔은 지렁이가 꿈틀거리며/거실 바닥에 나올 수도 있겠지요/식탁에서 밥을 먹고/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침대에서 사랑을 나눌 때/집안에서 항상 퇴비 냄새가 가득해야 합니다/삼성 에어드레스와 엘지 스타일러도/해결할 수 없는 냄새를/팬티부터 양복까지/브래지어에서 원피스까지/은은한 향수처럼 매일같이 입고 다니면/논과 밭을 보유할 수 있는 자격은 충분합니다/거실에 지렁이라도 있어야/밟으면 꿈틀거리는 존재를 알 수 있지 않을까요/술수가 판치는 정치의 길을 걷거나/고급관료의 사다리를 오르거나/누구나 꿈꿀 수 있는 대통령이 되려면/꿈틀거리는 삶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농지를 가질 수 있는 자격 어렵지 않습니다” <시, 농지를 보유할 수 있는 자격 >

 

그리고 황폐화되고 있는 인간관계의 존중을 고려하자는 측면에서 손님이 지녀야 할 태도를 소재로 시를 쓰기도 했다. 세상에 사는 거의 모두가 손님이기에,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햄버거를 받을 때는 두 손으로 받아라/두 개의 빵 사이에서/호주산 소고기와 국내산 양상추와/부여에서 나온 굿뜨래 토마토가 견디고 있는데/두 손으로 받는 것은/겸손한 손님으로 가는 첫걸음이다//햄버거를 건넬 때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며/귀한 햄버거를 알바생에게 던진/손님 하나를 댓글로 도배해/모욕을 주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3년을 가두어/아침에는 소고기가 빠진 햄버거를/점심에는 소고기와 양상추가 빠진 햄버거를/저녁에는 소고기 양상추 토마토가 빠진 햄버거를 먹여/햄버거에 대한 증오를 갖게 해야 한다//햄버거 손님의 증오가 어디에서 출발하는지 묻고/사람을 대하는 태도의 답이 적절하지 않으면/다시 3년 동안/아침에는 소고기 양상추 토마토가 빠진 햄버거를/점심에는 소고기와 양상추가 빠진 햄버거를/저녁에는 소고기가 빠진 햄버거를 먹여/겸손을 깨닫게 해야 한다//햄버거 가게 알바생이/햄버거 사이에 넣는 게/소고기 양상추 토마토뿐만 아니라/벗어날 수 없는 가난의 시간이 들어있다는 것만으로도/햄버거는 두 손으로 받아야 한다” <시, 겸손하지 않은 손님 처벌에 대한 입법을 고함>

 

위에서 예를 든 시 이외에도 비정치적으로 보이지만, 정치가 꿈꿔야 할 내용들을 담았다. 10월 말 나올 예정인 이 시집은 소셜펀딩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이트에 올려 선구매 방식으로 제작을 진행하고 있다. 그러니까 시집 한 권 값에 해당되는 금액을 미리 지급해 작가나 출판사에게 힘을 실어주는 방식이다. 얼마나 금액이 모일지 결과는 두고 봐야 하겠지만, 결과보다는 독자들의 관심이나 의견을 미리 경험해 본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접근으로 여기고 있다.

 

펀딩이 시작된 날 저녁, 동네 술집에서 지인과 함께 시집 펀딩에 대한 얘기를 나누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술병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펀딩, 그거 하지 마요.”“왜요?”

“내가 주식 하면서 망한 사람들 여럿 봤거든, 펀딩이 주식하는 거 아닌감?”

“주식하는 펀딩하고, 이 펀딩하고는 좀 다른 거라 괜찮아요.”

주식과 다른 출판에 대한 것이라고 자세히 설명을 하니 주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주방으로 돌아갔다. 삼십 분 남짓 지났을까, 소주 한 병을 추가로 주문하자 주인이 술병과 파전 접시를 들고 왔다. 두툼한 파전은 서비스로 주는 메뉴와는 차이가 있었다. 한눈에 봐도 적지 않은 골파에 중간 중간 박혀있는 오징어는 먹음직스러웠다.

“배부르지만 식욕을 부추기는 비주얼이네요.”

“내가 밭에서 직접 기른 거라 싱싱해요.“

“오징어도 밭에서 기르나요?”

아재 농담에 주인은 한바탕 웃어 재꼈다. 식당 근처에 있는 텃밭을 부지런히 가꾸는 주인은 제철 채소가 나오면 무쳐주고, 볶아주며 단골들의 발길을 붙잡곤 한다.

”펀딩인가 뭔가 하는 그 책에 내 얘기도 좀 써 줘요.”

주인이 잔 하나를 제 앞자리에 놓으며 말을 꺼냈다. 술을 가득 따라주었다. 식당 안을 둘러보았다. 테이블 세 개를 건너뛴 자리에 있는 취객 두 명은 수시로 드나드는 단골이라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만한 상황이었다.

식당이 한가로워도 주인이 손님들 자리에 합석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술잔을 들고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몇 잔 마시겠다는 뜻이다.

“내 얘기를 쓸라면 책 열권은 나올 텐데.”

갓 환갑을 넘긴 주인은 우리가 마시는 술자리 옆에 서서 가끔 청춘시절의 고단함을 바람에 흘려보내듯 한 두 마디 던지곤 했었다.

“유등천 옆 원미섬유 다닐 때 고생 지지리도 했지.”

주인이 원미섬유 얘기를 꺼내면 야간고등학교는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인근에 있는 대전피혁공장 다니는 청년과의 연애담은 오래전 서론만 듣고 아직까지 진도가 나가지 않아 궁금하던 참이었다.

“남자들은 하여튼 다 똑 같어. 젊은 놈이나 늙은 놈이나.”

술 한 병을 비웠어도 자세한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우리 또한 더 이상 캐묻지 않는 게 점잖은 단골로 대우받을 수 있는 태도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주인은 화제를 바꿨다.

“그땐 왜 그렇게 배가 고팠는지, 동생들이 넷이나 돼서 먹을 거 맘대로 못 먹고. 입을 거 맘대로 못 입고, 요즘도 손님 없을 때 가끔씩 생각해 보면 배고프던 그 시절이 떠올라, 칼국수 한 그릇 불려서 두셋이 먹던 시절이었는데.”

건너편 취객이 다음에 계산을 한다고 소리치며 나갈 때, 우리 자리에는 주인이 가져온 세 병째 소주가 비워질 참이었다.

“내 얘기 꼭 써야 돼요. 이런 게 바로 역사지 역사.”

 

다음날 아침, 간밤의 술자리를 복기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식당 주인의 역사를 글로 쓰겠다고 답을 했는지 안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낭만공약을 주제로 삼은 펀딩 시집에 유등천 주변의 공장 이야기와 식당 주인의 개인사를 넣지 않는다면, 나는 허언을 일삼는 주정뱅이로 낙인이 찍힐 수도 있을 것이다. 고민은 깊어졌고 취기는 쉽게 깨지 않았다. 식당문을 나서는 나에게 주인이 했던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파전 한 장, 소주 세 병, 맥주 한 병. 이게 다 내가 하는 펀딩여.”

정덕재 시인
정덕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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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재 시인
199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으로 등단. 시집 ‘비데의 꿈은 분수다’, ‘새벽안개를 파는 편의점’, ‘나는 고딩아빠다’, ‘간밤에 나는 악인이었는지 모른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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