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재 콩트, 살다보면…] 추석에는 축구
[정덕재 콩트, 살다보면…] 추석에는 축구
  • 정덕재 시인
  • 승인 2021.09.20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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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진=게티이미지뱅크

[굿모닝충청 정덕재 시인]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 주말,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고 있는 아들과 긴 통화를 했다. 명절 기간에는 부대에서 중대별 대항 축구경기가 열린다고 했다. 일종의 추석맞이 이벤트이다. 첫날 경기에는 공격수로 출전했지만 실수를 연발했다며 아쉬워했다.

“넌 원래 수비수 아녀?”

“군대 축구에서 그런 게 어딨어. 수비도 하다가 공격도 하는 거지.”

“거기 축구 잘하는 친구들 많아?”

“그럼, 선출들이 몇 명 있는데 우리랑은 완전히 급이 다르지.”

흔히 선출이라고 부르는 선수 출신들은 공을 다루는 솜씨가 누가 봐도 차이가 있다고 한다. 일반 조기축구회에서도 중고등학교 때 선수 생활을 했던 사람들은 중년이 되어도 기본기가 있어 경기운영이 다르다는 게 일반적인 중론이다.

중학교 때부터 축구를 좋아했던 아들의 축구사랑은 유별났다. 내가 기억하는 몇 장면 중 하나는 고2 담임선생의 호출사건이다.

“아버님, 학교까지 오시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우리 아이가 무슨 잘못이라도…”

교무실에서 들어서자마자 젊은 담임은 어쩔 줄 몰라하며 호출한 이유를 더듬더듬 설명했다.

“공을 안 준다고 교무실에서 소리를 크게 질러 선생님들이 좀 놀랐어요.”

남학생들은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축구를 자주 하는데, 여름엔 더위를 먹을 수도 있는데다가, 또 땀을 흘린 채 교실에 들어오면 냄새가 진동해 운동을 자제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아들은 이런 방침에 불만을 품고 공을 달라며 교무실에서 소리를 쳤다고 한다.

“운동장에 공이 굴러다녀야지 텅 비어있으면 그게 운동장입니까?”

팔은 안으로 굽는 법, 아들이 말한 대사야말로 축구마니아의 명대사라고 말할 뻔 했다. 교실에서 하루종일 소설책을 읽는 현우, 중얼중얼 쉬지 않고 노래를 하는 병규, 영화에 빠져 늘 눈이 충혈되어 있는 준호, 그리고 늘 교과서만 보는 윤철이. 이런 다양한 구성이 있어야 교실이 아닌가, 씁쓸하게 학교를 빠져나왔던 적막한 운동장은 지금도 간간이 떠오른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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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기억나는 장면은 수능 백일 전 상황이다. 대개 큰 시험을 앞두고 카운트다운에 들어가면 굳은 의지를 다지기 마련이지만, 아들은 다른 전략을 세우기 시작했다. 녀석의 빈 공책에는 일명 프리미어리그 관람 프로젝트가 채워졌다. 영국에서 축구를 직접 볼 계획을 수능 백일 전부터 세웠던 것이다. 어느 숙소에서 자고, 어느 팀의 축구경기를 볼지가 주된 관심사였다.

수능시험이 끝나고 겨울방학이 시작되자마자 녀석은 작은 가방 하나를 끌고 영국식 코트를 휘날리며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친구와 함께 둘이 떠난 축구여행은 3주 동안 이어졌다. 아들은 실버데일 잔에 홍차를 따라 마시는 여유와 런던 거리의 악사와 함께 어깨를 흔드는 낭만을 짐작해 보라며, 간간이 사진 몇 장을 보내왔다. 작은 식당에서 축구 중계를 보다가 골이 들어가면 낯선 이방인인데도 하이파이브를 하거나 서로 끌어안는 모습은 매우 자연스러웠고, 운동장에서 직접 체감한 관중들의 압도적인 응원은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는 게 녀석의 여행 후기였다.

아들은 영국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프리미어리그 중계를 보느라 밤새는 일이 허다했고, 대학에 들어가서도 기회만 되면 공차는 시간을 만들어 땀을 빼곤 했다. 수시로 친구들과 풋살 경기장을 찾는 것은 물론이고, 찌든 알콜 기운을 빼는 중년들의 조기축구회에 나가기도 했다.

 

축구를 좋아하는 청년은 전역을 앞두고 고민이 많아지는 눈치다. 요즘은 부대에 있는 도서관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고, 택배로 주문해 받은 젊은 작가의 책도 읽고 있다고 했다.

“얼마 전에 정세랑 소설 읽었는데 장류진 작품도 재미있던데.”

“정세랑 소설은 드라마로 만들어져 아는데, 장류진은 잘 모르는 작가네.”

“그러니까 세대 차이가 나는 거지.”

맞는 말이다. 아무리 경계를 허물려고 노력을 해도 감성의 차이나 상황을 받아들이는 세대 차이를 극복하기는 쉽지 않다. 굳이 극복하려고 힘을 쓸 필요가 있을까, 의문이 들 때도 있다.

“근데 너 제대하면 바로 복학할 거냐?”

“글쎄, 생각 중이야. 앞으로 뭐 먹고 살지 걱정도 되고. 예전에 아빠가 자주 했던 말도 자주 생각나고.”

“내가 무슨 말을 자주 했는데…”

“부모는 자식을 양육할 의무가 있고 자식은 부모를 봉양할 의무가 있다. 아빠가 술 마시고 오면 자주 말했잖아.”

“그래서 늙어가는 애비를 봉양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그 말씀이신가?”

어릴 때부터 양육과 봉양의 관계를 농담과 진담을 섞으며 말했던 기억이 났다. 녀석이 오래 전 얘기들을 꺼낸 것은 반복 학습의 결과로 보였다. 보충 설명을 할까 생각하는 중에 녀석이 웃으며 화제를 바꾸었다.

“보름달 떴을 때 축구하면 좋겠다.”

“그거야 말로 정말 운치있겠는데…”

“말이 그렇다는 거지. 군대에선 가능한 일이 아니지.”

“제대하고 다음 추석에는 달빛 받으면서 나랑 같이 축구하자.”

“나 고등학교 야간자습할 때. 밤늦게 운동장에서 친구랑 축구하고 벤치 한구석에서 몰래 캔맥주 마시기도 했는데.”

 

12월 전역을 앞둔 이십 대 중반의 청년이 어느새 지난 날을 회상하는 나이로 접어들었다. 오십 중반의 내가 돌아보는 과거는 흐려져 있어 예전의 그림자가 가물가물하지만, 이십 대 중반 아들이 돌아가는 기억의 속도는 더욱 빨라 그리움의 향수는 더욱 진할지 모른다, 명절 기간에는 평소보다 자유롭게 휴대폰을 쓸 수 있어 몇 차례 더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정담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추억의 두께를 펼치고 고민의 무게를 나누는 동안, 아들이 불투명한 미래의 불안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동시대의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이 땅의 많은 청년들도 한가위 명절만큼은 걱정을 잊고 지낼 수 있기를.

정덕재 시인
정덕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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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재 시인
199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으로 등단. 시집 ‘비데의 꿈은 분수다’, ‘새벽안개를 파는 편의점’, ‘나는 고딩아빠다’, ‘간밤에 나는 악인이었는지 모른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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