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고교교육 진단 ③] 고교가 해야 할 교육을 하라
[특별기고-고교교육 진단 ③] 고교가 해야 할 교육을 하라
계단도 첫 계단부터… 기본교육을 충실하게
학교운영위원들에 권한과 책임 알려줘야
  • 고광률 소설가
  • 승인 2022.10.05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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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사진=게티이미지뱅크/굿모닝충청 김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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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광률 소설가] 문과와 이과 교육이 나뉜 중·고등교육을 개탄하면서 통합 교육을, 그것도 이과 중심의 문·이과 통합 교육을 주장하던 한 유명 연구가이자 교육자가 지난 5월 한 중앙 일간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이른바 초·중·고교생 ‘수요자 직접 설계형 교육’을 주장했다. 그는 연구로 이미 세계적 명성을 얻은 분인지라 그가 말하는 교육은 우리나라에서 나름의 ‘영향력’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초·중·고교에서 교육수요자 중심의 교육을 해야 한다고 주창한 것인데, 교육을 알지 못해 배우는 수요자가, 알지 못하는 교육을 어떻게 자기 주도적으로 설계할 수 있다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아마도 그 ‘석학’은 자신의 학창 시절을, 자기 자질과 능력 속에서 되돌아보며 자신이 겪었던 교육적 병리와 모순, 아쉬움에 기반해 이런 주장을 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는 2001년 어름에 한 인문학자와 같이 한 ‘대담(휴머니스트출판그룹 간행)’이라는 책을 통해선 문·이과 통합 교육을 하되, 이과 중심의 통합 교육이 돼야 한다고 주장한 바도 있다.

‘어른들’이 교육(또는 교육정책)을 입안하고 설계할 때 다들 이런 식, 즉 자기 경험 중심적이거나 기득권 유지 중심 또는 이상적으로 접근한다. 교육은 입신의 경지에 이르기 전에는 가르치는 자의 역량보다 배우는 자의 수준과 노력에 의해 이뤄지는 것인데, 이를 무시한다.

즉, 하버드, 옥스퍼드 대학교 교수들을 데려다 우리나라 대학에 놓으면 우리 학생들이 그 대학교 학생들이 수준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고서는 가능한 사고라 할 수 없다.

우리 교육은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주체성은 물론이요 ‘지금-여기’도 없었기에, 백년대계라고 하지만 ‘미래’도 없었다. 일제강점기부터 빼어난 교육열로 난리를 부렸지만, 1960년과 1970년 경제개발 시대에도 교육이 산업 발전을 선도하지는 못했다.

이는 한국의 교육사를 연구한 마이클 세스(Michael J. Seth)가 자신의 저서 ‘Education Fever(한국교육은 왜 바뀌지 않는가?)’에서 한 평이기도 하다. 오직 자신의 입신양명과 통치이념에 기반한 ‘국민교육’에 치중했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르칠 수 있나?

고교교육은 공교육의 최종 단계가 아니다. 1960‧70년대가 아닌 만큼, 대학의 진학과 교육이 일반화·보편화돼있다. 이 때문에 아직도 고교교육을 사회진출의 전 단계 교육이기에, 전인교육 차원에서 양적으로 다양한 교육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를 강변하는 것은 억지다. 필자는 실제로 유관 장학사와 논쟁을 하는 과정에서 이런 강변을 들었다.

그 장학사나 교육 관계자들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빤히 알고 있으나, 고교 교과목의 과다한 가짓수와 대학 교육의 전공 맛보기 단계 교육(이를 선행학습이라 주장한다)으로서의 부적절함을 지적하면 으레 이렇게 답들을 한다. 현실과 현장의 팩트를 떠나, 말만 되면 문제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훌륭한 수학자이자 철학자요 교육자인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가 ‘교육의 목적(The Aims of Education and Other Essays)’에서 한 말에 의하면, 교육은 가능한 적게, 깊이 가르쳐야 한다고 한다. “너무 많은 과목을 가르치지 말라”, “가르치는 바는 철저히 가르쳐라”라고 했다.

얼핏 ‘많이 폭넓게’가 아니어서 숲을 보는, 보편타당성과 총체성을 벗어난 교육이라는 의문을 제기할 할 수도 있으나, 적게 가르치되 깊이 가르친다는 것은, 분야(과목)는 적게 하되 그 분야가 포괄해 담고 있는 영역들을 넓게 가르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현재 고교에서 국어를 어문법, 현대문학, 고전문학, 작문, 발표와 토론식으로 세분화하고, 이 중에 하나 또는 둘만을 선택하게 해서 가르치는 교육은 절름발이 또는 외발 식 교육이라는 것이다. 고교생이 고교생답게 제대로 걸을 수 있는 기초(기본)교육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나무만 볼 수 있는 지엽적 교육이어서, 국어라는 전체의 숲을 개괄·이해하지 못하고, 일부 문의 영역만 찔끔 맛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학생들의 잠재력과 자질 계발에도 장애가 될 수 있다.

그러니까 고교교육이 대학에서, 그것도 석·박사과정에 가서나 나뉘는 분야까지 미리 나눠서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굳이 이래야만 하는지 의문이다.

문제는 여기가 끝이 아니라, 교과목을 나누고 가짓수를 늘이다 보니 기존 교사 인력과 교사들의 지식 역량(교사를 무시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전공 영역이 다른 것을 가르치는 데서 오는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일이 생겼다는 점이다.

그래서 교사가 자신도 모르는 과목을, 가르칠 의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짬밥’에 밀려 담당하게 되는 웃지 못 할 일도 교육 현장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교육 관계자들은 이 부문을 개선하고 보완하기 위해 대학과 고교의 연계 학습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아니 대학교수가 왜 고교에 가서 교사들이 가르쳐야 할 교과목을 대신 가르친단 말인가. 이러려면 고교와 대학을 굳이 구분할 필요가 있는지 묻고 싶다.

또 대학교수가 고교에 가서 자신의 전공학문으로 고교생을 가르친다는 것이 전공에 대한 입문 교육일 터인데, 왜 이런 공교육을 해야 하는지 정말 모를 일이다.

고교교육은 교사가, 대학 교육은 교수가 하는 것이다. 대학교수가 고교에 가서 고교생을 가르치면, 장차 고교생은 교사들을 어떻게 대할지도 자못 궁금하다.

사고력과 상상력을 키우는 기본만 가르쳐라

문과와 이과 교육은 인문과학과 자연과학 교육이다. 즉 문학, 역사, 철학, 수학, 생물, 물리, 화학이다. 이들 분야가 전공 입문 전에 거쳐야 하는 기초학문이다. 여기에 국가가 미리 필요하다고 판단해서 덧붙여 가르치는 분야가 사회과학, 응용과학인 것이다. 전자가 ‘나(개인)’를 위한 학문이라면, 후자는 ‘우리(국가 또는 공동체)’에 기여하기 위한 학문인 것이다.

그런데 향후 고교가 학점 은행제를 통해 대학의 전공학문 분야에 해당하는 사회과학과 응용과학 분야(심지어 기술과학 분야도 한다)를 당겨서 선행학습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굳이 정책을 말하지 않고 세상사 이치와 상식의 시각으로 봐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건물을 지을 때도 기초부터, 계단을 오를 때도 첫 계단부터, 길을 걸을 때도 첫걸음부터 떼어야 하듯이 학문도 기초가 있고 위계가 있고 순서가 있는 것이다.

교육에 축지법은 없다. 기초와 순수 학문을 통과의례 수준으로, 수박 겉핥기식으로 건너뛰고는 사회과학이건 응용과학이건 기술과학이건 모두 불가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이 모두 기초와 순수 학문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IT가, 4차 산업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인가.

그래서 대학에서는 전공을 가르칠 때, 기초학문이 부족해서 제대로 가르치지를 못하고 있다고 야단이 아닌가. 게다가 웬만한 대학에는 생물, 물리, 화학을 다루는 학과 및 전공 자체가 사라진 지 오래다.

다양성과 시대성에 뒤처지면 안 된다는 강박과 조급증으로, 전후좌우를 따지지 않고 뭐든 빨리빨리 서두르면 된다는, 고질화된 문화적 습관에 따라 고교교육을 이끌어서는 미래가 없다는 것이다.

기본을 재미있고 유용하게

우리나라 교육은 교과목 설계나 선택보다 교수 방법이 문제이다. 이제는 암기식이 아니라, 창의까지는 아니어도 이해와 응용이 가능한 교육을 해야만 한다. 물론 창의적인 교육을 해야겠지만, 이 또한 이해와 응용을 거치지 않고는 도달할 수 없다. 아기가 기어가는 단계를 건너뛰고 뛸 수는 없지 않겠는가.

앞서 말한 분도 우리나라에서 수포자(수학 포기자)였다고 한다. 수학 점수가 중하위 수준이어서 수학을 포기한 사람이, 미국 유학 시절 빼어난 수학 자질을 인정받아 어려움 없이 재미있게 수학을 복수전공했다는 것이다. 자연과학 연구에 있어서 통계와 확률을 아우르는 수학의 도움이 필요했을 것이다. 필수까지는 아니어도 필요조건이었을 것이다.

대체 무엇이 문제였던 것일까. 물론 교수법만이 아니라, 수학을 공식(公式) 암기식으로, 성적 평가용 방식으로 가르친 것도 문제가 아니었을까 싶다. 바로 이것이다. 교육수요자의 관점에서 재미있고 유용함을 느낄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하는데, 교육공급자 역시 암기식으로 공부를 했는지라 이것이 요원한 것이다. 더욱이 내신성적만으로 대학 진학을 할 수 있는 수시 제도가 도입되면서부터 이런 현상이 더욱 고착되기에 이른 것이 아닐까.

교육은 사고력과 상상력을 키워주고 이를 통해 창의력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이끌어줘야 하는 것이다. 자기 생각과 주장을 발표하고, 이치와 논리에 근거해 토론하고, 이를 글로 표현할 수 있는 교육이어야 한다. 이것이 산교육이다.

교사가 정답이라고 일러준 것을 암기하고 있다가 찍어서 성적을 올리는 것은 교육이 아니다. 이 세상에 정답이라는 것이 있기나 하던가. 물론 오답은 있다. 그러나 여러 개의 답이 상황과 맥락에 따라 작용할 뿐이 아니던가.

이 창의적 결과물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 기본과 기초이다. 그 중요함을 모르겠는가. 2002 월드컵 신화를 만든 거스 히딩크의 코치법과, 프리미어리그 대스타를 키워낸 손흥민의 아버지 손웅정 씨의 교육법을 보라.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된다”, 손정웅 씨가 아들을 대스타로 키운 ‘비법’을 글로 써 펴낸 책 제목이다.

이들이 선진 축구의 잔기술과 기교, 스타일을 선행학습시켰다고 하던가. 돌이켜 보라. 우리는, 축구를 사랑하는 코찔찔이 꼬맹이부터 꼬부랑 노인네들까지 히딩크의 훈련 방식에 대해 얼마나 많은 비난을 퍼붓고 원망을 했던가. 심지어 언론에서는 그의 사생활까지 들먹이며 모욕을 주지 않았는가. 그래도 그는 한국 축구의 고질적 악습과 관행을 깨고, 스스로 주체가 돼 창의적인 게임을 할 수 있는 선수들을 길러내 4강 신화를 이룬 것이다.

위계질서를 타파하기 위해 선배의 잔심부름을 하지 말라고 했고, 경기에 임하면 운동장에서 스스로 생각하는 창의적인 경기를 하라고 했다. 선수들이 게임을 지배하지 못하면 결국 게임에 지배당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승자가 될 수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렇듯 검증된 명징한 이치, 그래서 온 국민이 열광했던 팩트를 잊었는가.

싹도 틔우지 못한 씨에게 열매를 바라는가. 우리 교육이 이렇다.

과거 교육부를 교육인적자원부로 바꾼 장관은 교육수요자들을 ‘인적자원’이라 했고, 교육도 당연히 인풋이 있으면 그에 상응하는 아웃풋이 나와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교육을 경제 논리로 본 것이다.

교육은 인풋 대 아웃풋이 곧바로 조응하는 1차 함수가 아니라, 오랜 인풋으로 인프라를 쌓고 잠재력을 일깨워 한순간 떨치고 치솟아 오르는 지수함수의 힘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고교는 고교 수준에 걸맞는 고교다운 기본(기초)교육에 먼저 충실하라. 그것을 이루지 못하면 개인의 성장은 물론이요,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는 사회과학, 응용과학은 물론이요, IT니 4차 산업(이것 또한 기초과학 없이 이룰 수 있던가)이니 하는 꿈은 언감생심 꿈조차 꿀 수 없을 것이다. 기초 없이 어찌 창의적 아이디어와 과학기술 발전을 이룰 수 있겠는가.

우리의 교육이 방향을 잃고 헤매는 것은, 과거 장구한 세월 동안 조금씩 폭넓게 가르쳐 지배국가와 군사 독재 권력이 두뇌의 역할과 기능이 아닌 지체(肢體)처럼, 머슴처럼 부릴 수 있는 관제 교육을 받아왔던 때문일 것이다. 아직도 그 잔재에서 벗어나지 못해 비극적 결과에 놓여 있는 것이다. 주인과 주체가 되지 못하고, 머슴과 노예가 돼 변방국을 벗어날 수 없는 교육을 자처·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교육제도를 만드는 자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 이해(利害)를 가려서 챙기고, 또 그 이해를 주고받기 위해 구축한 카르텔을 깨부수지 않는 한 제대로 기능하는 공교육은 요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료사진=게티이미지뱅크/굿모닝충청 김지현 기자
자료사진=게티이미지뱅크/굿모닝충청 김지현 기자

고교의 학운위는 양두구육

교육수요자가 참여하는 민주적·합리적·효율적인 학교 운영을 위해 법정 심의기구로 만들었다는 ‘학교운영위원회’는 구조적·제도적 문제에 대한 점검과 개선이 우선돼야 한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의회의 국회의원 자제들이 청와대 직원으로서 인사권자인 대통령의 명을 받으며 근무를 한다면, 제 자식 귀한 줄 아는 국회의원이 입법권을 가지고 정부를 제대로 비판하고 견제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이치를 몰라서 학교장에게 장악 내지는 종속된 고교 학운위를 방치해 둔다는 말인가.

비판과 견제로부터 벗어나 있는 조직은 부패하게 되고, 반드시 망하게 되는 것이다. 집행기관의 장인 학교장이 전권을 쥐고 좌지우지할 수 있는 조직이라면, 언감생심 그 안에서 대체 어떤 합리성과 형평성과 효율성과 민주성을 논할 수 있단 말인가.

사실상 고교에 자식을 ‘입시 볼모’로 잡힌 학부모는 운영위 위원이 될 자격을 가질 수 없다. 주어진 권한과 역할을 자유롭고 올바로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 자식에게 이익과 불이익 둘 중 하나를 언제든지 줄 수 있는 학교장과 교사 집단을 감시·견제하고, 또는 해당 학교의 운영을 비판·선도(善導)할 수 있단 말인가.

고교에서 이러한 학부모 위원들이 있다면 제 자식을 포기했거나, 임진왜란 시 충무공급의 멸사봉공 정신이 있지 않고는, 그야말로 의사나, 열사급의 결단과 각오가 아니고는 불가하지 않겠는가.

고교에서 이 이율배반적인 제도를 당장 대체할 방안이 없다면, 일단 학부모 위원과 교사 위원을 이원화시켜 운영하는 방안이 있을 것이다. 학부모 위원들끼리 모여 규정에 준한 활동을 하고, 자체 의견을 모으고 방향을 정해서 위원 개별이 아니라, 학부모 위원 전체의 의견과 힘으로 교원 위원들과 협의를 한 뒤, 집행기관인 학교장을 상대하는 것이다. 물론 교원 위원들도 학교장의 눈치 하에 지도받는 것이 아니라, 학부모 위원들과 같은 방식으로 운영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교원 위원들은 어차피 서열의 최상위인 학교장에게 인사고과 등으로 상명하복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러니 그들도 평소 권위나 복무규정 등에 매여 주장할 수 없는 권익이 있을 터인데, 이를 학교장이 참석해 지켜보는 학교운영위원회의 회의 석상에서 대놓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학부모 위원은 교원 위원들로부터 정보나 가르침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굳이 학부모 위원과 교원 위원을 한 데 엮어서 운영하지 않아도 된다.

적어도 안건에 대한 검토, 조사 및 분석, 여론 수렴, 논의 및 협의, 의견 취합 단계에서는 학부모 위원들과 교원 위원들이 각각 자율적으로 활동하고, 두 집단의 의견을 조율해 심의·의결하는 것이 현재의 방식보다는 낫고 민주적·합리적·효율적일 것이다.

자식을 볼모로 잡고 있는 교원 앞에서 가타부타하고 시시비비를 가릴 수는 없으니, 학부모 위원들끼리 서로 자기 자식만 챙기지 못하도록 전체를 위한 현안을 협력하고 견제토록 하자는 것이다.

권한과 책임을 분명히 해야

학부모 위원들의 공정하고 자유로운 활동을 위해 권한과 의무 및 책임에 관한 교육을 철저히 하고,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한 교육은 당연히 교육청 담당 부서에서 해야 할 것이다. 지금처럼 위원들(교원 위원들도 마찬가지)이 학운위가 법정 심의기구라는 것도 모르고, 또 안다고 해도 그게 무언인지 개념조차 없고, 학운위 운영 관련 편람이 있는지, 규정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올바른 위원직 수행은 불가하지 않겠는가.

학운위의 역할과 기능을 교육시켜야 하고, 이 교육을 이수해야만 위원 자격이 주어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조처해야 한다. 상식적으로 볼 때, 교통법규를 모르는 자에게 운전면허를 주어서도 안 되고, 운전대를 맡겨서도 안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현재 학운위 위원 중에는 법규도, 운전도 할 줄 모르는 위원 대다수가 운전대를 쥐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학운위의 행정실무를 책임진 간사(학교장이 추천하고 위원장이 임명한다)조차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게 말이 되는가.

현재의 제도와 상황 아래에선 학부모 위원들이 학교장과 교원 위원의 눈치를 보느라(눈치를 안 볼 수가 없다), 편람에 명시된 위원의 합법적 권한을 행사하라고 알려줘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학교장이 학부모 위원이자 학부모에게 마음대로 해보라고 호통을 칠 수 있었던 것이다. 학교를 장악하고 있는 것은 학교장이 아니던가.

상식과 이치에 준하라

학교운영위원회의 위원 교육을 제외한 지도·관리·감독을 교육청이 하는 것은 부적절하고 합당하지 않다. 물론 심의기구와 집행기관 사이에 생기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를 시정 또는 징계를 위한 교육청 공권력의 개입이 필요하다.

그러나 학운위의 역할과 기능을 올바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독립된 관리·감독 및 지도 기관을 제3의 기관으로 독립해 구성하는 것이 옳다. 예를 들면 대전 전 지역을 대상으로 한 학부모와 교사로 구성을 하든지, 아니면 학부모 위원과 교원 위원을 대상으로 선출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처럼 학교와 교육청이 짬짜미 식으로, 또는 초록은 동색이라는 말처럼 끼리끼리 봐주며 넘어가는 관리·감독 및 지도 체계를 반드시 개선해야만 한다.

가재는 게 편이라고, 인사(人事)를 통해 학교와 교육청을 들락날락하는 장학사와 학교 관리자급 교사들에게 관리 감독과 지도를 맡길 수는 없는 것이다. 교육계 종사자들에게 위계질서가 있고 이것의 결속과 유착이 너무도 공고해서 마피아에 버금가는 조직이라는 의미로 ‘교피아’라는, 지금은 존엄한 관용어로 굳어진 조어(造語)가 있지 않은가. 오랜 세월 다져진 이들의 권력은 너무도 강고한지라, 학부모이자 운영위원인 민원인의 민원에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고광률 소설가
고광률 소설가

제도는 겉보기만 아름다워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민주주의라는 아름다운 용어 이면에 기생하는 추악한 권력의 짬짜미와 부패를 보라. 속이 더럽고 썩어 있다면, 그 속을 봤다면 겉만큼 아름다운 속이 될 수 있도록 바꿔야 하지 않겠는가. 세 차례 나눠 쓴 글을 마무리 짓는 마음이 버겁고 무겁다.

자녀의 교육을 학교 교사와 교육 당국자들에게만 맡기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것과 같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 이제 여러분의 자녀가 고양이 앞에 놓인 생선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겠는가. 고양이에게 맡겨진 생선가게를 이대로 지켜보면서 놔둬야만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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