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의 어원 상고사] 단군과 기자 9
[정진명의 어원 상고사] 단군과 기자 9
정진명 시인, 어원을 통한 한국의 고대사 고찰 연재 ‘18-단군과 기자9’
  • 정진명 시인
  • 승인 2023.01.12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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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야발의 단기고사.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굿모닝충청 정진명 시인] 이 무렵 중국의 공격도 심해져서 조선은 더욱더 동쪽으로 밀리다가 맨 나중에는 요하(패수) 동쪽까지 밀려와서 결국은 한 무제의 공격으로 망합니다. 이때에도 고구려의 서쪽, 그러니까 옛날의 기자조선 강역에는 그곳을 떠나지 않은 부리야트 세력이 있었고, 그들은 여전히 중국과는 갈등과 협력을 이어가며 백제가 한반도 안에서 번듯한 나라를 세운 뒤에도 요서와 진평의 서쪽 두 현을 차지한 채 강력한 독자 세력으로 존재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중국으로 귀속되기를 거부한 이들 세력은 고구려와 중국 사이에서 고단한 싸움을 해야 할 운명이었고, 결국 이 싸움을 더는 감당할 수 없을 상황에 이르렀을 때 한반도에 있던 같은 겨레에게 의탁하기 위하여 민족의 대이동을 감행합니다. 이것이 중국 땅에서 『자치통감』의 기록까지 건재했던 백제가 갑자기 사라진 이유입니다.

일찌감치 한반도로 이동하여 백제를 세운 부리야트 인들은 뒤늦게 전란을 피해서 밀려드는 자신의 혈족들을 굳이 거부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잖아도 피지배층보다 인구가 현저히 모자라서 위태했던 데다, 고구려나 신라와도 점차 틈이 벌어지던 차에, 강력한 전투력과 풍부한 전쟁 경험을 지닌 이들의 합류는 오히려 자신들의 지배력을 공고히 할 기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백제가 갑자기 강성해져서 고구려와 신라를 압도하게 된 까닭입니다. 이들의 합류로 전투력이 극대화된 백제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습니다.

이런 상황은 신라나 고구려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조선의 옛 강역인 만리장성과 요하 사이 넓은 지역에는 고조선에 예속되었던 수많은 동이족과 흉노족이 있었고, 이들은 고조선의 이동에 따라 합류와 이탈을 되풀이하며 근거지를 옮깁니다. 그 근거지의 끝자락은 한반도 안쪽이지만, 그 중간 자락은 결코 한반도가 아니라 만리장성과 요하 사이의 너른 지역입니다. 이들은 중국에 밀려 서서히 요하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했다가 결국은 한반도 안의 자기 혈족을 찾아서 스며듭니다. 한반도에 많은 왕조를 세우며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한 몽골족들은 지금의 중국 영토인 요하 지역을 거쳐서 들어온 것입니다.

여기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 바로 한 무제의 흉노정벌로 일어난 연쇄 파동이었습니다. 북부 초원지대를 떠난 흉노족의 일부가 동쪽으로 밀려와서 중국의 대항마이던 고조선으로 합류하면서 정세는 더욱더 어지럽고 급격하게 진행된 것입니다. 무제의 흉노정벌이 일으킨 여파는 동북아 지역에 삼국시대를 열면서 어느 정도 정리됩니다. 물론 백제의 요동 경략설이 일어나는 시기까지도 이 여파는 계속됩니다만, 삼국의 정세가 솥발처럼 선 뒤에는 그런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쪽으로 모든 사태가 정리됩니다.

한때 국수주의 역사학자들이 별자리 관측을 근거로 삼국은 중국에 있었다고 주장한 적이 있는데, 굳이 그런 새 증거자료가 아니라도 우리 민족의 중국사 강역 내 활동은 어원학을 통해 얼마든지 입증할 수 있습니다. 그런 동떨어진 한두 가지 자료로 삼국을 중국 내륙으로 몽땅 옮겨놓으면, 사료 해석은 또 다른 난관에 봉착합니다. 한반도에 남은 백제와 신라의 유적은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압록강 집안과 평양의 고구려 고분벽화는요? 그러면 경주에 있는 수많은 왕릉은 가짜라는 말입니까? 제가 이렇게 물었더니 어떤 분은 가짜라고 단호하게 말하더군요. 기가 찰 노릇입니다. 국수주의 역사학이 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저는 이런 데서 봅니다. 더는 논리가 필요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신념만 남은 학문은 종교에 지나지 않습니다.

종교는 믿음이지 학문이 아닙니다. 역사는 믿음이 아니라 사실을 추적하는 학문입니다. 이런 까닭으로 저는 근대에 쏟아져나온 대종교나 단군교 쪽의 역사자료를 믿지 않습니다. 종교사의 자료는 역사자료로 채택하기에는 너무나 위험합니다. 대야발이 썼다는 『단기고사』에 단재 신채호가 서문을 썼다는데, 저는 그것도 믿지 못하겠습니다. 굳이 그런 허접한 자료를 믿지 않아도 얼마든지 역사를 새로 서술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분들이라면 제 말이 헛소리가 아니라는 점을 실감하고 계실 겁니다. 저는 지금 역사학에서 거들떠보지도 않는 언어학을 통해 고대사를 다시 쓰는 중입니다. 역겹더라도 손해 볼 일은 없을 것이니, 조금만 더 참아 주시기 바랍니다. 하하하.

굳이 이런 위험한 ‘새 자료’를 참고하지 않아도 우리에게 벌써 ‘주어진 자료’만 갖고도 얼마든지 이런 변화를 추적할 수 있습니다. 예맥족의 이동을 엄밀하게 추적한 재불 역사학자 이옥의 『고구려 민족형성과 사회』를 보면 이런 성과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예맥족의 이동을 기존의 역사서만으로 추적하여 잘 정리하였습니다.

게다가, 앞서 부리야트 족의 세 방언을 볼 때 ‘예’와 ‘맥’도 대조해볼 수 있습니다. 부리야트 방언은 모두 세 갈래입니다. ‘qori(xori), qudara(xudara), Barguʒin’이죠. 예(濊)는 ‘더러울 예’ 자입니다. ‘더러’는 ‘구다라(qudara=xudara)’의 ‘다라’와 비슷합니다. ‘구(qu)’는 나중에 ‘xu’로도 발음되어 흐지부지되다가 발음에서 생략되기 일쑤입니다. 그러면 더욱 ‘다라’와 가까워지죠. 맥(貊)은 ‘북방종족 이름 맥’ 자여서 더욱더 의미심장합니다. ‘맥’과 ‘Barguʒin’은 아주 비슷합니다. ‘Barguʒin’은 ‘발’과 ‘진’ 2가지로 표기될 수 있습니다. ‘진’은 ‘眞, 辰, 震’같은 한자로 나타납니다. 반면에‘발’은 앞뒤 맥락을 잘 살펴서 판단해야 합니다. ‘부리야트’도 가끔 그렇게 쓰기 때문입니다. ‘不耐, 夫里, 扶餘’는 부리야트를 적은 게 분명합니다. 이 연장선에서 보면 ‘불’도 그럴 수 있습니다.

‘발조선’의 ‘발(發)’은 부리야트인지 발구진인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조선 전체를 대표한다는 점에서는 부리야트를 적은 것을 보입니다. 만약에 이렇게 적은 것이라면 그 전의 단군조선과 구분하려고 기자조선을 적은 것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동호조선이나 예맥조선과 구분하려고 그렇게 표현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문맥을 봐서 잘 판단해야 합니다. 

고구려를 이루는 주 민족이 예맥족이라는 것은 중국 기록에서도 아주 알 수 있는 일인데, 이들의 이름이 부리야트 방언과 일치를 보인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사실입니다. 기자(kiʒi), (구)다라(qudara, 濊), 발구진(밝, Barguʒin, 貊), 고리(qori, 槀離). 우리 역사에서 지금까지 숱하게 보아온 말들입니다. 우리가 이런 자명한 사실을 굳이 부인하면서 중국의 역사 기록과 말 못 하는 무덤 속만을 들여다봐야 할까요? 제가 언어를 연구하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언어야말로 가장 확실한 고고학 자료입니다. 언어는 뇌의 역사박물관이죠. 고고학자들이 왜 언어를 고고학에서 빼놓는지 그것을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바보 천치라서 그런 것이겠지요? 저만 등신으로 끝나면 좋을 텐데, 이게 그럴 것 같지가 않아서 걱정입니다. 하하하.

그렇다면 기자 족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군은 어떤 말을 쓰는 부족이었을까요? 단군은 몽골어를 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단군이 몽골어를 썼다면, 같은 말을 쓰는 부족에게 밀려났을 리는 없을 것입니다. 설령 밀려났다고 하더라도 같은 말을 썼으면 나라 이름까지 바꿀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굳이 ‘기자조선’으로 이름을 바꿀 필요 없이 ‘단군조선’이라고 불렀을 것이라는 말이죠. 이런 정황으로 보아 단군조선의 지배층은 몽골어가 아닌 다른 말을 썼을 것입니다. 어떤 말을 썼을까요? 단군신화와 관련된 말들을 분석해보면 단군은 퉁구스어를 썼습니다. 퉁구스어는 만주어 즉 여진족의 옛 언어를 말합니다.

단군신화를 보면 환웅은 하느님 환인의 서자였습니다. 신화가 아니고 현실이라고 본다면 ‘서자’란 본국을 떠나서 신천지를 떠도는 존재의 성격이었다는 말입니다. 떠돌이 부족 환웅이 웅녀와 혼인하는데, 웅녀를 곰으로 보는 것은 민간어원설, 또는 통속어원설에 불과합니다. 터키어로 ‘첩, 후실’은 ‘koma’이고, 몽골어로 ‘qomsa’는 ‘작다’이며, 만주어로 ‘kamso’는 ‘작다’입니다. 결혼할 때 정실에 견주면 이 수식어는 후실, 즉 첩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곰’은 ‘첩, 후실’이라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말하는 ‘꼬마’는 바로 몽골어와 만주어에서 온 말임을 알 수 있죠. ‘곰’은 이런 표현을 말합니다.

우리말에서 이 말의 자취를 찾아보면 ‘곰배님배, (배)고물’에 있습니다. ‘곰’은 우리말에서도 뒤를 뜻하는 말입니다. 이로 보아 곰으로 표현된 여인은 북방 출신이었을 것입니다. 결혼해서 자식까지 둔 고주몽이 낯선 곳에 와서 이미 아들이 둘이나 있던 소서노를 만나 결혼으로 새로운 왕조를 열었듯이, 끝없이 초원지대를 떠돌던 단군도 그런 식으로 외부의 토박이 부족 여인을 만나서 결혼했고, 그것을 토대로 하여 왕조를 열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곰 토템과 결합하며 동물이 사람으로 바뀌는 신화의 형태로 자리 잡은 것입니다.

‘단군’을 보면 퉁구스어의 자취가 더욱 확실해집니다. 만주어로 존장자는 ‘dangga’이고, 올차어로는 ‘danggi’이며, 길약어로 귀인이나 고관은 ‘dʒangki’입니다. 단군은 존장자를 뜻하는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군을 음차로 보는 관점인데 만약에 뜻을 적은 훈차로 본다면 ‘단군’은 ‘박달-가간’이 될 것입니다. 박달은 겨레를 뜻하는 말이고, ‘가간, 간, 칸’은 동북아시아에서 공통으로 왕을 가리키던 말입니다. 한 가지 말에 이렇게 많은 뜻이 담긴 것은, 한 소리를 여러 겨레가 각기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오랜 세월에 걸쳐 쓰다 보면 여러 가지 뜻과 소리가 거기에 맞춰 익숙해집니다. 그래서 ‘단군’이라는 말을 어느 한 가지 뜻으로 확정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는 무려 2,000년 전에 쓰인 말의 뜻을 탐구하는 중입니다.

단군이 살던 곳이 ‘신단수(神壇樹), 단수(檀樹), 백악(白岳)’인데, 이게 모두 같은 말을 달리 적은 것입니다. ‘백악’은 ‘박달’의 표기임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白山’이라고도 표기되는데, 동북아 여러 민족의 말에서 ‘달’은 모두 산을 뜻하는 말이고, 우리말에서도 ‘양달, 음달’에서 보듯이 자취가 또렷합니다.

정진명 시인.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김종혁 기자
정진명 시인.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김종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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