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의 어원 상고사] 고구려 4
[정진명의 어원 상고사] 고구려 4
정진명 시인, 어원을 통한 한국의 고대사 고찰 연재 '25-고구려4’
  • 정진명 시인
  • 승인 2023.03.02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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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제각 출판사 영인본 삼국사기.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굿모닝충청 정진명 시인] 한나라 무제의 공격으로 점차 밀리던 기자(예맥)조선이 동으로 끝없이 쫓기다가 마침내는 만주와 한반도에서 끝을 맞는 것이죠. 그것이 위만조선의 마지막 왕 우거가 한나라 무제에게 공격당하는 『사기』의 기록입니다. 그렇게 해서 위만조선 지역에 한사군이 설치되는데, 그 통치 영역 밑에 있던 부족들은 오뚜기처럼 다시 살아나서 그 뒤로도 중국과 끝없는 전투를 또 벌입니다. 그 마지막 자취가 488년 북위가 공격한 요서와 진평의 백제입니다.(『자치통감』) 이후에는 선비나 오환처럼 왕국을 세웠다가는 중국으로 흡수되는 일을 되풀이하죠. 중국사에 자주 등장하는 탁발(拓拔)이나 완안(完顔), 모용(慕容), 단석(檀石), 우문(宇文) 씨가 이런 이들입니다. 완안 씨는 금사(金史)에서 자기 조상이 고려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이들 세 기자 밑에는 다시 5부제가 적용됩니다. 흉노의 통치 구조가 그렇게 되었습니다.(『사기』 흉노열전) 왕은 중앙을 다스리고, 나머지는 각기 4방을 다스리는 부족장들을 둡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통치체제에서 본 것도 그것입니다. 부여의 4출도 같은 것이죠. ‘돝한, 개한, 소한, 말한’ 같은 우두머리들 말입니다. 이들은 중국과 전쟁을 하며 서로 우위 다툼을 끊임없이 벌이게 되고, 중국에 대항하여 공을 세우거나 민심을 얻은 세력들이 맨 위의 왕인 기자를 차지하게 되는 방식입니다.

이 긴 이야기의 시작은 주몽이었습니다. 즉 주몽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 전에는 소노부에서 왕을 배출했다는 이상한 중국 측의 사서 기록을 따르다 보니 여기에 이른 것입니다. 계루부가 주몽부터 왕을 배출했다면 소노부는 어떤 존재였을까 하는 것입니다. 예맥족은 어떤 이유에서 중국 만리장성의 동북쪽에 살게 됩니다. 북쪽 흉노의 턱밑이죠. 거기서부터 항쟁을 시작하여 난하와 요하를 건너 송화강과 압록강까지 옵니다. 계루부는 패수에서 왕을 낸 부족입니다. 그렇다면 소노부는 그들이 거기에 이르기 전의 어느 단계에서 왕을 배출했다는 얘기이고, 이것은 앞서 말한 세 기자의 통치구조를 전제하지 않으면 안 풀리는 것입니다. 

소노부는 중국과 가장 치열한 전쟁을 감행한 몽골족을 이끌던 우두머리 부족이고, 이들은 중국의 동북 변방에서 살았으며, 그 지역은 고조선의 서쪽 우두머리인 ‘서기자’의 통치 영역이었습니다. 서기자가 이끄는 대중국 항전 세력의 주력군이었죠. 고조선의 서쪽을 담당하던 서기자도 5부제에 따라 다섯 부족이 협력하여 운영하던 나라였으니, 소노부 시절의 구려(句麗)는 이때에도 서기자의 통솔을 받는 부족이었을 것입니다.(‘구려’ 앞에 ‘高’가 붙는 것은, 주몽이 왕이 된 뒤의 일임.) 혹은 소노부 자체가 서기자였을 수도 있습니다.

앞서 좌현왕와 우현왕이 방위 개념으로 볼 때 좌우가 달라졌다고 얘기했습니다. 이 혼란도 기자조선의 이동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봅니다. 원래 우두머리 서기자의 왼쪽과 오른쪽에 있던 부족이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전쟁이 야기한 위치 변동으로 뒤바뀐 것이고, 그러다 보니 ‘연노’와 ‘순노’도 자리가 바뀐 것입니다. 이렇게 바뀐 이름에 따라 위만조선의 마지막 왕의 이름도 ‘좌거’가 아니라 ‘우거’라고 불렸을 것입니다. 우거는 ‘우기자’의 뜻이 분명합니다. 위만이 처음에 기준(箕準) 왕에게 접근할 때 중국과 접경 지역에서 살겠다고 말을 한 것도 이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서(우)기자였던 위만이 복판(中) 기자에게 접근하여 제안한 것이고, 나중에 동(좌)기자의 자리에 앉게 된 자취입니다. 그래서 ‘우거’라고 한 것이죠.

다시 소노부로 돌아가겠습니다. 고구려는 소노부에서 왕을 배출하고 연노부에서 왕비를 배출했습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압록강 가에 와서 계루부에게 왕위 계승권을 빼앗긴 것입니다. 이것은 소노부와 계루부가 전혀 다른 종족임을 뜻합니다. 같은 몽골족이라도 계통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백제의 건국 과정을 보면 어쩌면 부족이 달랐을 수도 있습니다. 계루부가 몽골어를 썼기 때문에 소노부에서는 터키어를 썼을 수도 있습니다. 터키어를 쓴 부족이 대 중국 항전을 이끌었다면 오히려 더 말이 됩니다. 왜냐하면 흉노족의 일파였을 테니까 말이죠. 이들 전체 세력을 통솔하던 복판의 단군이 무너지면서 그 밑에 있던 세력들이 각자 일어나는 복잡한 과정을 우리는 보는 중입니다. 그래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지 않고 좀 어수선한 것입니다.

고구려는 북부여에서 출발하여 압록강가로 와서 세운 나라입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부족이 합류합니다. 3대 대무신왕 때에는 부여를 정벌하여 멸망시키죠. 『삼국사기』의 기록을 읽다보면 마치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읽을 때만큼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습니다. 실제로 대무신왕의 밑으로 몰려든 영웅 중에는 동양인이 아니라 서양인의 풍모를 풍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괴유(怪由)가 그렇죠. 이름까지 괴상하다는 뜻이 들었습니다. 이 밖에도 마로, 부정씨 같은 사람이 있고, 심지어 삼국지의 적토마 같은 ‘거루’라는 명마까지 나타납니다.

멸망 당한 부여 사람들이 갈 곳이라고는 고구려뿐입니다. 고구려의 한 부족으로 편성되어 들어가는 것이죠. 이들이 소노부로 자리 잡은 것이 아니었을까 짐작합니다. 그래야만 소노부에서 왕이 나왔다는 말이 제대로 설명됩니다. 물론 그 전에 이들은 만리장성 동북방에 위치했다가 중국과 싸우면서 끝없는 이동 끝에 송화강 북쪽까지 올라갔고, 다시 주몽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소노부의 세력이 점차 수그러들고 새로운 시대를 주몽이라는 뛰어난 인물이 열면서 드디어 ‘고구려’가 선 것으로 보입니다. 소노부의 존재는 서(西) 기자 세력이 대중국 전쟁에서 패배한 끝에 동(東) 기자의 세력권 안으로 들면서 위축된 어떤 지배층의 모습을 또렷이 보여줍니다.

서 기자, 복판 기자(단군), 동 기자. 이렇게 세 갈래 조선을 각기 5부족이 구성했다면, 기자조선 밑에는 15개 세력이 군웅할거한 셈입니다. 이들이 각기 상황에 따라 부침을 거듭하면서 단군에서 기자를 거쳐 위만에 이르는 기나긴 ‘조선’의 시대가 끝나고 삼국시대가 열립니다. 중국의 역사서에서 동이족으로 규정한 겨레들을 적어보면 이렇습니다. 겹치는 이름도 있지만 대체로 15부족과 비슷한 숫자입니다.

조선(朝鮮), 숙신(肅愼), 오환(烏丸), 식신(息愼), 말갈(靺鞨), 선비(鮮卑), 실위(室韋), 읍루(挹婁), 부여(夫餘),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 옥저(沃沮), 예(濊), 맥(貊), 3한(韓), 왜(倭).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왜는 일본의 그 왜가 아닙니다. 중국에 일본의 왜가 알려지기 전부터 왜는 만리장성 바깥의 요동 땅에 있었습니다. 여러 기록이 그것을 증명합니다만, 여기서는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니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궁금하신 분은 따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이들은 중국이 외연을 확장함에 따라서 이합집산하고 여건에 따라 부침하며 끝없이 동쪽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항전 근거지인 수도가 옮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앞서 말한 ‘북경’과 ‘우북평’의 관계에서 이런 상황을 봤습니다. 남북의 사학계에서 모두 평양을 한반도 안에 두려고 하는 집착은, 이래서 이해할 수 없는 똥고집으로 비치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3수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구도에 맞춰 대충이라도 수도 이동 상황을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강을 중심으로 정리한 조선. 자료=정진명/굿모닝충청

대충 강을 중심으로 정리했는데, 대부분 큰 도시들이 강을 끼고 있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황하에는 천진이 있는데 여기서 기자의 유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요녕의 경우 요하의 동쪽에 있고, 송화강의 경우 북부여의 근거지여서 이렇게 잡아본 것입니다. 대충 이런 식입니다.

이게 딱 부러지게 맞지는 않겠지만, 문학도의 상상력으로 3수와 수도 이동을 연결 짓는다면 이렇게 될 거라는 즐거운 제안을 해보는 겁니다. 가만히 앉아서 고조선의 수도 평양이 2,000년 넘게 처음부터 한 곳에 붙박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궁여지책으로 한 것이니, 능력 있는 분들께서는 한 번 이 ‘개똥철학’이자 ‘엉뚱학설’을 보완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발견된 고고학 자료만으로도 이런 설정을 설명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평양을 대동강에 말뚝처럼 박아놓고 거기에 매인 염소처럼 맴돌며 일부러 안 하려고 고집을 피워서 안 되는 거지.

『사기』 조선전에는 위만조선이 망할 무렵의 얘기만 나옵니다. 앞서 고구려에서 살펴본 대로 주몽이 송화강 북부여에서 남쪽으로 내려와서 압록강에 수도를 세우는데, 그 밑에 고조선의 수도가 있을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사기』 조선전에 나오는 위만조선의 마지막 수도는 지금의 평양일 수가 없습니다. 위만조선의 마지막 수도는 패수가 흘러드는 발해 연안 어디엔가 있었을 것입니다.

위의 도표는 만리장성 밖의 강역에서 중국 쪽으로부터 동쪽으로 갈 때 만날 수 있는 주요 근거지들입니다. 중국의 세력이 동쪽으로 확장되면서 조선의 근거지도 점차 동쪽으로 옮겨간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뽑아본 것들입니다. 실제로 이와 똑같은 질서로 옮겨갔을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동아시아 역사의 특징에서 드러나는 3수를 전제로 하여 보면 이렇게 배치할 수 있습니다.

4조선은 좀 설명이 필요하겠네요. 1조선과 2조선은 ‘양위’의 형식이었습니다. 능력 없는 왕이 능력 있는 새 왕에게 왕위를 양보하는 것을 양위라고 하는데, 찬탈과는 다른 방식입니다. 하지만 위만은 준을 쫓아냈습니다. 그러다 보니 3수의 질서가 허물어진 것입니다. 쫓겨난 조선왕 기준은 남쪽으로 내려가 삼한을 세우죠. 그 삼한은 위만조선의 동기자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위만이 왕을 양위 받았다면 삼한이 저절로 동기자가 되었을 텐데, 그게 안 되었다는 것이죠.

삼한은 현재 한강 언저리로 비정하는데, 위의 논리라면 그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기준이 삼한의 왕이 되었다면 복판기자 노릇을 했을 텐데, 그곳이 한강이었을 겁니다. 황해도와 충청도 정도의 영역이었겠죠. 서한은 저절로 평양 일대가 됩니다. 좌한은 경상도와 전라도 쯤이었겠죠. 이 지역에 나중에 드라비다족이 들어와 가야를 세우며 영역을 확장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이 가야 세력을 진한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낙동강과 섬진강 언저리를 말합니다.

만약에 지금의 역사학이 주장하는 대로 마한을 한강, 변한을 전라도, 진한을 경상도로 둔다면 세 한이 똘똘 뭉쳐서 서쪽이니 동쪽이니 하는 방위 개념이 무색해집니다. 대동강, 한강, 낙동강쯤으로 해야만 방향에 따른 이름이 제대로 이해됩니다. 결국, 3수의 이동은 위만이 왕위를 찬탈하면서 깨진 것입니다. 조선의 좌기자 송화강은 그냥 형식으로만 존재한 것입니다. 그것이 자리 잡기 전에 위만은 한 무제의 공격으로 망하고 말죠.

특히 기억해야 할 것은 삼한입니다. 고종이 나라 이름을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꾼다고 할 때 아무런 저항 없이 온 백성이 받아들였다는 사실 밑에 깔린 ‘무의식’을 잘 보아야 합니다. 만약에 삼한이 한강 이남에만 있는 존재였다면, 지금의 북한 쪽에서는 대한제국이라는 이름에 반발했을 것입니다. 그와 달리 온 백성이 이것을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은 삼한이 조선과 똑같은 말이었다는 것입니다. 삼한이 한반도 전체에 걸친 것이 아니었다면 어디서든 반발이 있었을 것입니다. ‘조선’은 한반도 밖까지 아우르는 말이지만, 삼한은 한반도를 말하는 말이었고, 그것은 한반도 밖의 기자조선에서 도망친 준 왕이 터를 잡은 곳을 뜻하는 말입니다. 준 왕은 3수에 또렷한 개념을 지닌 사람이었고, 그는 삼한의 한복판인 한강에 머물렀으며, 그 양쪽으로 좌한과 우한을 두어 3한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겠지만, 삼한의 중심지를 평양으로 끌어올려도 문제가 될 것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서한(마한)은 요동반도 아래쯤에 위치할 것입니다. 그러면 진한은 한강까지 올라오게 되는데, 한반도 남해안을 가락국(진국)의 세력이 차지했다면 오히려 이런 배치가 더 그럴듯합니다.

정진명 시인.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정진명 시인.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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