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의 어원 상고사] 고구려 5
[정진명의 어원 상고사] 고구려 5
정진명 시인, 어원을 통한 한국의 고대사 고찰 연재 '26-고구려5’
  • 정진명 시인
  • 승인 2023.03.09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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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웅의 용비어천가 표지.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굿모닝충청 정진명 시인] 지금 우리는 예맥족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중입니다. 중국의 침략에 가장 강력하게 저항한 주요 세력이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에서 왕권이 소노부에서 계루부로 넘어가고, 계루부가 소노부 통치하의 예맥을 완전히 새로운 왕조인 고구려로 환골탈태시킴으로써, 명실공히 삼국시대라는 그 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고구려의 창건 과정을 잘 살펴보면, 고조선의 강역을 연구하는 데에도 새로운 기준을 정할 수 있고, 새로운 시각으로 논란 많은 고조선의 수도 변천이 남긴 어지러움을 풀어낼 수 있습니다.

고구려는 북부여에서 나와서 송화강을 지나 압록강에 와서 수도를 정하고 새로운 나라를 엽니다. 요하 동쪽부터 북으로 아무르(黑龍)강, 남쪽으로는 대동강 유역까지 단숨에 고구려의 강역이 됩니다. 이 짧은 설명 안에 고조선의 수도였던 평양의 존재가 문제가 됩니다.

만약에 지금의 평양이 고조선의 수도였다면, 고구려가 그 위인 압록강에 수도를 정한다는 설정이 말이 안 됩니다. 자신이 소속되었던 연맹 왕조가 중국 왕조의 공격으로 망하여 동쪽으로 밀려왔는데, 거기서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서 세운 수도가, 자신의 연맹 왕조의 수도 위쪽이라는 게 앞뒤로 맞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이 모순을 해결하는 것은, 현재의 평양이 고조선 시대의 평양이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현재의 평양은, 위만에게 쫓긴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 ‘기준(箕準)’이 살던 삼한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박달의 주인이 사는 곳이 곧 박달이 되니, 기준이 마지막으로 도망쳐와서 설던 곳에 마지막 박달의 이름이 붙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평양과 가까운 구월산에 단군의 유적이 많이 남은 것도 이런 상황과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송양을 비롯하여 소서노가 혈혈단신으로 내려온 주몽에 대해 큰 적의를 품지 않았던 것도, 같은 몽골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인물 됨됨이를 보고서 송양은 땅을 양보하고, 소서노는 결혼까지 했을 것입니다. 이들이 서로 싸워야 할 어떤 상황이었다면 이렇게 소박한 신화로 끝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준왕이 위만에게 패하여 쫓겨난 것은 기원전 194년이고, 고구려가 세워진 해는 기원전 37년입니다. 157년만에 일어난 두 가지 사건의 상황을 보면 이런 개연성이 충분합니다.

현재의 국사학계에서는 3한을 한강 이남으로 보는데, 이 3한을 대동강까지 끌어올린다고 해서 역사해석에 무슨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습니다. 설령 지금의 3한 강역을 그대로 인정한다고 해도, 고구려가 내려오면서 3한이 조금 더 남쪽으로 이동한 결과가 현재의 3한 강역이라고 해도 문제 될 게 없습니다. 앞서 본 두 사건의 시간 차가 157년입니다. 이 동안에 3한이 한 곳에 돌덩이처럼 놓였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입니다. 당시는 중국의 침략에 따라 동이족의 세력이 이합집산하고 재편되느라 소용돌이치던 혼란의 시기였습니다. 그러니 삼한을 굳이 한강 이남에 가둬놓고서 그것을 이론으로 지키려고 강짜를 부릴 필요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특히 자료가 현저히 모자라는 고대사에서는 더 그렇습니다. 여러 방향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바라보고 접근해야 합니다.

학자들의 이런 옹고집에 따라서 남한과 북조선 모두 지금의 평양을 고조선의 수도라고 교과서에서 설명합니다. 북조선의 경우는 성역화를 마쳐서 마치 이집트 피라미드처럼 크고 웅장하게 단군의 무덤을 꾸렸습니다. 남한이나 북조선이나 자신들의 정치 이념에 따라 고조선을 한반도에 가두어버린 것으로 모두 어리석은 일입니다. 역사의 범위를 엄청나게 축소 시키는 일입니다.

예맥족의 이동 과정을 보면 남한과 북조선 양쪽에서 주장하는 고조선 수도가 현재의 평양이라는 점은 오류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대륙에 있던 고조선의 수도 박달성 평양(平壤)은 도대체 어디일까요? 동북아 지도를 펴놓고 보면 상상력이 꽂히는 곳이 있습니다. 요하의 동쪽 요녕성(遼寧省)입니다. 한 무제가 고조선을 칠 때 육로만이 아니라 해로로 거대한 군단을 나르는데, 뱃길로도 갈 수 있는 것이라면 바다 건너편이어야 합니다. 이 때문에 랴오뚱(요동) 반도 앞을 지나서 지금의 평양으로 향했다고 하는데, 만약에 평양이 요하 동쪽에 있었다면 랴오뚱 반도가 둥글게 끌어안은 안쪽에 배를 댔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전투 상황을 감안해보아도 평양 아사달은 요녕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수나라와 당나라가 공격하던 고구려 시절에도 이곳은 중국의 세력이 침략해올 때 고구려를 지키는 입구 노릇을 하던 곳이었습니다. 하물며 고조선 시절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앞서 살펴본 대로 기자조선은 3한과 똑같은 통치체제로 구역이 크게 셋으로 나뉘었고, 각기 ‘서(西)기자, 복판(中)기자, 동(東)기자’로 설명했습니다. 고조선의 도읍은 몇 차례 옮기는데, 마지막으로 공격당한 평양은 세 기자의 도읍지 중에서 맨 동쪽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서기자의 평양은 난하 유역이고, 복판 기자의 평양은 대릉하 유역이고, 동기자의 평양은 요하 유역입니다. 북경의 전 이름이 북평이고, 북평은 박달의 향찰 표기임을 감안한다면 이 세 수도의 위치를 조금 더 서쪽으로 옮겨갈 수 있습니다.

만약에 이게 아니고 지금의 평양을 동기자의 서울로 본다면 요하의 평양은 복판기자의 서울이고, 난하의 평양은 서기자의 서울일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중국의 공격으로 기자조선은 이들 근거지를 옮기면서 요동의 마지막 근거지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이래저래 지금의 평양은 기자조선의 동쪽 근거지였을 것이고, 그 자리로 나중에 고구려가 들어서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야 고구려의 건국 과정이 말이 됩니다.

그런데 한 무제가 바다 건너 평양을 공격한 사건을 이해할 때, 그 이해를 아주 방해하는 이미지가 하나 있습니다. 지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지도는 네모난 지도입니다. 거기에 그려진 땅의 모양은 정상이 아닙니다. 3차원 둥근 지구를 2차원 평면으로 옮긴 것이기 때문입니다. 적도를 0도로 하고 북극과 남극을 각기 90도로 하여 평등 분할을 한 것이 위도입니다. 이에 따라 북극점은 너비가 0일 텐데, 이것이 평면 종이 지도에서는 적도와 똑같은 너비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우리가 동북아시아의 지도를 볼 때 이 점을 감안하여 지도를 공처럼 둥글게 사렸다고 생각하고 바라보면 정말 다른 풍경을 마주칩니다. 즉 중국의 베이징쯤에서 둥근 지도의 배치로 바라볼 때 한반도는 지금처럼 남쪽을 향한 것이 아니라 꼬리가 동쪽으로 한참 더 가서 뻗는다는 점입니다. 평양이 북위 38.912도에 있어서 이것을 대략 40도쯤으로 친다면 평면 지도보다 거의 절반에 가까운 너비로 한반도의 꼬리가 동쪽으로 더 밀립니다. 우리가 말하는 동쪽은 평면 지도의 동쪽과 감각이 아주 많이 달라집니다.

이런 시각으로 랴오뚱 반도를 바라보면, 중국 쪽에서 볼 때 랴오뚱 반도의 그 길쭘한 곶은 지금보다 30% 이상 동쪽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평면 지도의 랴오뚱 반도는 남쪽과 서쪽을 반쯤 가르는 대각선 45도 정도로 바다로 튀어 나갔는데, 여기서 30%를 감안하여 바라보면 랴오뚱 반도의 끝은 남쪽으로 훨씬 더 많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 지역의 바다를 발해라고 하는데, 평면을 지구처럼 둥근 구로 옮기면 바다의 중심이 불룩 솟아서 양쪽의 육지를 더 바깥으로 밀어내게 됩니다. 이런 착시효과를 잘 감안하여 지도를 봐야 합니다. 바로 이런 착시 때문에 평면 지도를 보면 중국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요녕에 간다는 말이 실감 나지 않는 것고, 이 때문에 자꾸 평양을 현재의 한반도 평양으로 생각하려는 관성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상 여러 조건을 감안할 때 현재의 평양은 고조선의 수도라고 볼 수 없으며, 만약에 고조선과 관련이 있는 도시라면 동기자의 통치 영역 안에 있는 중심도시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중국에 떠밀려 동쪽으로 간 고구려가 자신이 섬기던 옛 왕조의 수도로 내려와서 다시 수도로 삼는다는 것은, 어떤 상황을 보아도 모순입니다. 이것이 고조선의 수도인 평양이 한반도가 아니라, 현재의 중국 땅에 있었다는 가장 확실한 근거이고 논리입니다.

고구려의 나라 이름에 대해서 한마디하고 갑니다. 이 글을 쓸 때 저는 다음과 같이 알았습니다. 한자 ‘麗’는 두 가지 뜻(訓)과 소리(音)가 있는데, ‘곱다’는 뜻으로 쓸 때는 ‘려’라고 읽고, ‘고을 이름’으로 쓸 때는 ‘리’라고 읽는다고 말이죠. 그러면 ‘高句麗’는 ‘고구리’라고 읽어야 합니다. 실제로 ‘麗’의 중국 상고음은 [lie(ɣ)]여서 옛날부터 ‘꺼우리’라고 읽었고 지금도 부리야트에는 꺼우리(Qori) 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글을 쓰면서 이것을 다시 확인하려고 옥편을 찾아보았더니, 웬걸! 꾀꼬리의 뜻으로 쓸 때 ‘리’라고 나오는 것입니다. 동아출판사에서 나온 한한대사전이 그런데, 한술 더 떠 민중서림에서 나온 한한대자전에는 ‘꾀꼬리 리’가 아예 나오지도 않습니다. 귀신이 곡할 노릇입니다. 저는 왜 이렇게 기억하고 있을까요? 젊은 날에 배운 저의 기억이 틀린 것이었을까요? 황당할 노릇입니다. 제 기억을 제가 믿지 못하는 것, 그것이 노망의 전조 아니겠습니까? 되도 않을 지식 자랑으로 저는 지금 제 머리가 빚는 망상과 싸우는 중입니다. 허걱! 이 글을 계속 써야 할지 말지 그것도 잘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

어수선한 마음으로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아보니, 이에 관해서 연구한 분이 있더군요. 서길수 전 서경대 교수.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고 조선 성립의 정당성을 노래로 지은 『용비어천가』에 ‘고려의 음은 리이니, 고리이다.(麗音离高麗也).’라고 하여 ‘麗’는 ‘리’로 읽어야 한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제야 제 머릿속이 환해졌습니다. 제가 대학 때 전공과목으로 배운 『용비어천가』의 이 구절이 저의 기억을 강하게 붙잡았던 것이고, 오늘 옥편을 통해 새로 확인하려다가 옥편의 엉뚱한 풀이로 어쩔 줄 몰라 했던 것이었습니다. 서길수 교수의 글로 인하여 제 기억의 혼란이 노망 때문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직은 더 지껄여도 된다는 뜻이니, 좋은 연구를 해주신 서길수 교수님께 고맙다는 인사를 지면으로 드리고, 진도를 한 번 더 나가보겠습니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옥편 만든 놈들이 괘씸합니다. 아마도 일본이나 중국의 옥편을 번역하여 짜깁기한 옥편이기에 그럴 법도 합니다만, 연구가 덜 되었던 해방 후의 상황이야 감안을 한다고 하더라도, 서기 2023년에도 이 지경인 옥편을 보면 참 한심합니다. 우리 학문은 언제쯤 되어야 부실 공사를 면하게 될까요? 기초가 부실한 나라에서 산다는 게 이렇게 비참합니다.

자, 이제 결론이 났습니다. ‘고구려’는 틀리고 ‘고구리’가 맞다! 그러니 역사학자 여러분, 이제부터 고구려를 버리고 고구리로 돌아가십시오. 똥고집 부리시면 아니 되옵니다. ‘고구려’냐, ‘고구리’냐를 결정할 권한은 역사학자 여러분에게 있지 않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그 권한은 국어학자인 우리에게 있습니다. 국어학에서 내린 결정이니, 이제라도 올바른 말로 돌아오십시오. 하지만 역사학자들이 국어학자의 말을 고이 듣고, 교과서를 고칠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지금까지 겪어온 제 경험의 슬픈 관성일까요? 옥편에도 ‘나라이름 려’라고 토가 달린 것을, 똥고집대마왕들께서 바꿀 리가 없습니다.

정진명 시인.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정진명 시인.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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