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칼럼] 상극의 정체와 양면성
[아리랑칼럼] 상극의 정체와 양면성
  • 소설가 김종보
  • 승인 2023.03.26 13:4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굿모닝충청 소설가 김종보
굿모닝충청 소설가 김종보

[굿모닝충청 소설가 김종보] “상극은 문명의 진화에 따라 포악해진다. 그 충돌을 제어하지 못한 탓이다. 이로 인해 인성의 황폐화를 막아내는 옹호의 제방이 무너졌다.”

3월은 새 학기가 시작되는 달이다. 얼마 전 중학생 아들을 입학시킨 한 지인을 만났다. 그는 나에게 일상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아들이 조숙하다보니 사춘기를 맞았다.

얼굴에 여드름이 많이 나더라. 여드름 짜내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 모습을 바라본 아내가 말했다. ‘어른이 되는 과정의 하나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 어!’ 아이는 듣지 않았다. 

그도 아버지로서 한 마디 했다. ‘피부조직의 충돌이니까 잘 다스려야 한다!’ 아이는 말이 없었다. 아들이 성장과정의 하나라는 것을 이해할 나이는 아니었다. 계속 짜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내는 여전히 화가 치밀었다. 자칫 아들의 피부에 흉터가 남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엄마의 또 한 마디에 아들은 이렇게 말했다. ‘피부과에 가서 치료받으면 돼!’ 

아이들은 부모를 생각하지 않는다. 아버지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자신도 그런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춘기는 아름다운 시절이다. 반면에 판단력이 부족한 때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이들은 부모의 참견을 거부한다. 감정으로 대립한다. 지금은 의술이 발달되어 그 흔적들을 말끔히 지울 수 있다. 

이러한 현상들을 피부조직에서만 일어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사는 사회도 그렇다. 지금 곳곳에 암적 존재들이 숨어 있지 않은가. 잘 못 다루면 상극을 만든다.

궁극적인 목적은 복병과의 화해다. 즉, 상극의 다스림은 원만한 소통이다. 무엇보다 감정의 다스림이 필요하다. 이것이 또 다른 능력이며 통솔력이다. 

모든 인간관계가 다 그렇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상극을 만들어낸다. 그렇다고 단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단점의 극복이다.

이것이 이중적 태도를 없애는 성품 변화다. 반면에 상대를 정복하기위한 지혜다. 궁극적으로 다스림은 그 사람의 품격을 말한다. 즉, 참된 인성의 상징이다. 또한, 상대적 대립에서의 접점 찾기다. 즉, 소통의 능력이다. 때문에 다양한 환경과 장소에서의 복병 관리가 관건이다. 궁극적으로 성격의 대립선상에서의 조율 순화다.

언제나 상극의 대립은 감정을 다스리지 못할 때 일어난다. 다시 말해 선이냐 악이냐 하는 양면성의 다스림이다. 선택의 판가름이 문제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포용과 수용할 줄 아는 지혜를 말한다. 역으로 감정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 소통에 성공한다. 이는 다른 말로 바른 성품을 말한다.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을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상대를 이용해 이득을 취하는 모습들이 그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불신 사회다. 부정이 만연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가식과 위선이 상극의 정체성이다. 

‘반본환원’(還本還元)은 그래서 타당성을 얻는다. 인성회복을 통해 바름의 성품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인간다운 모습이 상대에게 신뢰를 주는 것이다. 이렇듯 신뢰와 믿음은 불신을 없애는 동시에 소통과 평화의 매개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의 이익만을 추구한다. 그래서 곳곳에서 대립이 끊이지 않는다. 이치와 순리를 따라야 상극을 만들지 않는 법이다. 

다시 말해 원만한 소통의 이치를 말한다. 이치는 또 다른 최 상위 진리다. 이 진리가 자신을 변화시키는 지혜의 보고다. 우리는 지금 이 진리를 망각하며 살아간다. 이기적 욕망에 지배당하고 있다. 이것은 나만을 위한 자기중심주의를 말한다. 상극의 씨앗이 여기서 태동한다. 때문에 채움보다 비움을 요구한다. 여기서의 비움은 무엇일까.

궁극적으로 이 말은 누구에게 먼저 바라는 것일까. 이렇듯 상극의 본질은 사회적 융화를 철저하게 가로막는 복병이다. 이는 지극히 배타적이다. 때문에 각자 현명한 다스림이 필요하다. 궁극적으로 경계를 넘어서는 초월심이다. 이것이 감정의 억제이며 또 다른 통제력이다.

지금 우리 사회 각 집단의 지도자들에게 바라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문제는 지배욕의 다스림 부족이다. 지배는 군림과 권위적인 욕망을 낳는다. 때문에 감정의 모순덩어리인 양면성을 다스리는 지혜다. 상호 조화가 융화를 이끌어 내는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상극의 경계 다스림이다.

여기서도 그 경계는 공동체 의식이다. 서로 상생과 공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장애물 소멸이다. 이 장애물은 성격의 단점을 말한다. 상극이 소통의 장애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인간 존엄 사랑이다. 상극은 항상 질서의 이치를 가로막기 때문이다. 즉, ‘이성’의 사랑이다. 

우리는 매우 복잡 다양하고 가파른 시대에 살고 있다. 오늘도 곳곳에서 감정의 대립들이 속출한다. 그래서 모두가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고 있다. 그러다보니 사람이 귀찮은 존재로 여긴다. 그 어디서나 감정의 자극을 받으면 화를 낸다. 심하면 동물 같은 본성을 보인다. 이렇게 보편성의 상실은 이성을 말한다. 이렇게 우리 사회는 심각한 병이 들었다. 

이러한 현상들이 소통을 가로 막는다. 그래서 해소할 방법을 찾지 못해 대립한다. 날마다 대결로 인해 원수를 만드는 현상들을 쉽게 목격되고 있지 않은가. 또한, 상대를 이용하는 기망의 술수들이 속출한다. 이 기망이 생존의 무기로 등장한지 오래다. 이렇게 이중적 태도는 가식과 위선으로 위장한다. 도처에서 적을 만드는 일이 만연하고 있는 것도 그렇다.

이렇듯 상극은 더 강한 상극으로 대립한다. 대화를 나눌 때 목소리들이 높아지고 있는 현상들이 그렇다. 상극의 원인중 하나는 자기중심주의라고 말했다. 우리 사회 참 인성이 도태되었음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극한의 상황에 다 달으면 상대방의 생명도 빼앗는다. 상극이 짖어질수록 동물적 본능이 드러난다.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상극의 배척은 안정과 평화로 나아가는 첩경이다. 혹자는 지금 시대가 어느 때인데 고리타분한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는가, 라고 말 할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미쳐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날마다 인간 존엄의 파괴가 극심하다. 인권유린이 그렇다. 자주 일어나는 ‘생명경지풍조’가 그렇다. 여기에 불공정에 의한 양극화 현상은 또 어떠한가. 또한, 불신, 차별, 갑질 행위, 도처에서 벌어지는 도덕적 상실이 그렇지 않은가. 이 밖에 동질을 먹잇감으로 삼는 고도의 기망술 등이 상극을 만드는 정체들이 그렇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황폐화 되었다. 존엄한 이성을 상실했다. 궁극적으로 이성의 건강은 인간된 표양을 가늠하는 상징이다. 오늘도 사회는 불안과 공포의 사회가 펼쳐지고 있다. 혼돈과 어지러운 현상들이 이뿐인가. 정치 사회 문화를 동반한 우리의 삶은 송두리째 총체적으로 휘청거리고 있다. 모두 절름발이처럼 살아간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모두 문명을 이기적으로 마구 휘두른 탓이다. 

그래서 각성을 말한다. 그 다음 현실 인식이다. 그러면 인간성 회복만이 해답이다. 이 길이 바로 상극의 벽을 허물어 버리는 초석이다.

이것이 상극의 도화선을 없애주는 조화의 심지다. 반목은 상극을 더 악화시킬 뿐이다. 감정은 부스럼을 만드는 원인자다. 그래서 상극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인간의 본질은 시대가 변해도 그대로다. 다만, 그 사람의 성품과 성정, 그리고 성향이 인격을 좌우할 뿐이다.

이 모습이 그 시대 그 사회에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상극은 문명의 진화에 따라 포악해진다. 그 충돌을 제어하지 못한 탓이다. 이로 인해 인성의 황폐화를 막아내는 옹호의 제방이 무너졌다.

이 질서가 비단 사회 구성원들에게만 국한 된다고 볼 수 있을까. 지도층과 특권층들에게 더욱 강조되는 말이다. 즉, 양면의 접점에서 냉철한 판단력이다. 분별력의 요구다. 모순 된 경계에서의 선택이다. 궁극적으로 우리라는 공동체의식의 인식을 말한다. 구성원이라는 동질개념 추구다. 궁극적으로 국민을 향한 의식의 각성이 바로 현실인식이라는 논리다. 

우리나라 민주화가 시작 된지 반세기에 불과하다. 아직까지 성숙의 과정단계에 놓여있다. 그래서 늘, 잡음이 끓이질 않는다. 상극의 두 얼굴이 날마다 반복된다. 상극은 선입견이 문제다. 내면에 상극의 두 얼굴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근원의 회복이다.

이 근원적 회복이 궁극적으로 인성 회복으로 가는 이정표다. 모두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내 편의 이득에만 몰두하고 있다. ‘반본환원’의 또 다른 본질은 이성회복을 뜻한다. 이렇게 상극의 원 인은 이성을 상실했을 때 일어난다. 혼돈의 시대에 상실한 존엄회복이며 정체성 정립이 시급한 이유다.

이것은 흔들림이 없는 민주주의다. 이것이 결여 된 ‘참’ 민족의 정신의 복원이다. 궁극적으로 참, 융화의 통합이다. 이것이 아리랑 민족의 본질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 다양한 집단의 리더들이 이러한 의식을 얼마나 지니고 있을까. 지금까지 가장 위대한 위상을 말하는 인격의 빗장인 인간다운 의 근본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 조율자들이 먼저 상극을 만든다는 논리다. 조율의 역할을 못할 때 정체를 상실해 원만한 해결책을 강구하지 못한다. 내 진영을 위한 편애적인 계산적 이해타산만 앞세운다.

강조를 거듭해도 공동체융합은 그 어떤 조건이 없어야 한다. 전체를 생각해야 한다. 오로지 그 목표는 ‘우리’의식이다. 이것이 아리랑 민족다운 또 다른 융화의 매개체다.

인간은 이득을 위한 계산이 앞설 때 그 지배를 받아 동물적 본능이 발동한다. 때문에 진영의 논리에 치중한다. 이해 타산적이다. 그 지배를 받아 사회와 국민의식에 대한 정신은 안중에도 없다. 지금 우리 사회 적당주의가 만연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아니면 상대진영과 빅딜 협상을 내세우는 것을 무기로 삼는다. 

때문에 감정과 증오의 부스럼덩이만 더 커진다. 자연 사회적 고름 맺힌 응어리 몸집이 커질 수밖에 없다. 언제나 인간의 대립에서 일어나는 상극은 이중적이며 동시에 상대적이다. 상극의 독소를 해소시켜주는 마음의 정화가 바로 동질회복이다.

그래서 현실을 인식하는 ‘참’ 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름이며 아리랑 민족의 정체성 회복이다. 역으로 이 회복이 상극의 정체를 무너트리는 첩경이다. 다시 말해 근원적 모태를 바로 세우기 위한 이정표가 바르게 설 때 가능하다. 오늘을 사는 구성원들에게 시대 인식을 위한 각성을 요구하는 이유다. 

민주주의 성장은 아픈 상처만큼 성숙한다. 우리는 얼마나 더 아픈 상처의 촛불을 들어야 하는가. 얼마나 더 큰 고통을 만나야 하는가. 이제 조금씩 피어나는 민주주의 꽃봉오리가 펼쳐지고 있긴 하다. 하지만, 아직도 멈춤의 현상들이 곳곳에서 목격되고 있다.

여기서 원만함을 요구하고 싶다. 원만함이 가능성을 열어주는 해법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 원만함은 또 다른 보편성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아울러 인성회복을 이루어주는 ‘반본환원’의 근원이다. 

오늘도 거리마다 가식과 위선의 모습들이 춤을 춘다. 때문에 조화 모색이 필요한 이유다. 이것이 아리랑 민족이 지닌 혼불이다.

아리랑 민족에게는 진영논리가 사라져야 한다. 존재하지도 않아야 한다. 다만, 존재는 하되 궁극적인 목적은 한 곳이어야 한다. 그 수단과 방법은 다르되 그 이정표는 한 곳을 가리켜야 한다. 그 목표는 오직 국민을 향한 마음이어야 한다.

내일은 혼돈에 빠진 우리 사회를 구해 줄 그 해결사를 만나고 싶다. 하지만 지금 이 땅에 상극의 정체를 잘 다스릴 줄 아는 유능한 능력자를 과연 찾을 수 있을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굿모닝충청(일반주간신문)
  • 대전광역시 서구 신갈마로 75-6 3층
  • 대표전화 : 042-389-0080
  • 팩스 : 042-389-0088
  • 청소년보호책임자 : 송광석
  • 법인명 : 굿모닝충청
  • 제호 : 굿모닝충청
  • 등록번호 : 대전 다 01283
  • 등록일 : 2012-07-01
  • 발행일 : 2012-07-01
  • 발행인 : 송광석
  • 편집인 : 김갑수
  • 창간일 : 2012년 7월 1일
  • 굿모닝충청(인터넷신문)
  • 대전광역시 서구 신갈마로 75-6 3층
  • 대표전화 : 042-389-0087
  • 팩스 : 042-389-0088
  • 청소년보호책임자 : 송광석
  • 법인명 : 굿모닝충청
  • 제호 : 굿모닝충청
  • 등록번호 : 대전 아00326
  • 등록일 : 2019-02-26
  • 발행인 : 송광석
  • 편집인 : 김갑수
  • 굿모닝충청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굿모닝충청.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mcc@goodmorningcc.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