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충청 글 윤현주 작가, 사진 채원상 기자] ‘박정자’라고 하면 누군가의 얼굴부터 떠올리게 된다.
연륜 넘치는 연기자부터 정치인 그리고 우리 어머니 세대 그 누군가의 흔한 이름, 박정자. 그런데 공주에 가면 또 다른 박정자를 만날 수 있다.
공주시 반포면 온천리, 동학사로 향하는 삼거리 길목(32번 국도)의 명칭이 바로 ‘박정자’다.
‘박정자 삼거리’가 춘천의 ‘김유정역’처럼 실제 사람의 이름에서 유래된 명칭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많지만, 사실 이곳이 박정자가 된 것은 느티나무 때문이다.
오래전, 이 마을에 살던 밀양박씨의 선대 묘는 범과 용의 형세를 가진 명당자리였다고 한다.
하지만 앞이 공허해 장차 큰 자연재해가 있을 거라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이곳에 느티나무를 심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느티나무 중 행인이 쉴만한 정자나무가 있어서 박정자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게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다.
지금은 390년이 훌쩍 넘은 느티나무 두 그루가 남아 어깨를 나란히 하고서 있을 뿐이지만 과거에는 느티나무가 더 많았다.
하지만 1980년 역대급 장마와 폭우로 10여 그루의 나무가 유실되고, 2012년에 태풍 ‘산바’로 인해 느티나무 한 그루가 강풍에 꺾여 쓰러지면서 안타깝게도 이제 남은 건, 단 두 그루의 느티나무뿐이다.
2018년 박정자삼거리의 느티나무를 두고 박씨 문중에서 논쟁이 일었던 적이 있었다.
충주박씨 문중에서 박정자삼거리의 느티나무는 밀양박씨가 아니라 충주박씨가 심은 거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나무를 심은 장본인이 충주박씨의 조상인 ‘박로’라는 주장이었다.
충주박씨 문중에서 그 근거로 제시한 건 대전 서구문화원이 펴낸 「서구사-제1권 서구의 역사」와 고청의 후손들이 펴낸 「고청서기선생 문집」이다.
서구사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박로는 일찍이 어머니를 잃고 스스로 배움에 힘썼으며, 고청 서기에게 수학했다. 유성-공주 간 도로의 동학사 입구에 박정자에 있는 느티나무는 박로 형제들이 서기에게 공부하러 다닐 때 심었다 하며 이 나무의 정자를 '박정자'라고 불렀다 한다. 고 청서기선생 문집 간행사에도 "선생의 학덕을 흠모해 충주박씨의 가문에서도 선생을 극진히 모시고 있으며, 글을 읽으러 다닐 때 동학사 입구 심은 박정자는 지금도 역사의 연륜을 머금고 서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충주박씨가 느티나무를 자신들의 조상이 심었다고 주장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밀양박씨의 선대인 박수문이 세상을 떠난 시기와 나무 수령에 차이가 있고, 묘와 박정자 사이 거리가 멀다는 거다.
어쨌든 두 박씨 문중의 논쟁은 결국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하고 끝나고 말았다. 전설의 실체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더 격렬한 논쟁이 진행되었다고 한들 박정자삼거리의 명칭이 달라질 것도 아니었다.
지금 중요한 건, 느티나무를 누가 심었느냐가 아니라 두 그루의 느티나무를 오래도록 우리 곁에 둘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내는 일이 아닐까 싶다.
해마다 자연 재난으로 많은 보호수가 훼손되고 있고 박정자삼거리의 느티나무 또한 이제 단 두 그루만 남았으니 말이다.
긴 세월만큼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던 박정자삼거리 느티나무는 초연하게 봄을 만끽하고 있다.
공주시 반포면 온천리 303 박정자삼거리 느티나무 2그루 392년 (2023년) 82, 351년, 14미터
[나무, 천년의 세월을 담다]는 충청남도 지원을 받아 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