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수 교수 “제주 가시리마을 성공사례, 괴산에도 가능하다”
김철수 교수 “제주 가시리마을 성공사례, 괴산에도 가능하다”
[인터뷰] 제주 출신 중원대 부총장, 지역과 지방대학 소멸위기 극복 과제 제시
  • 김종혁 기자
  • 승인 2023.06.23 18:01
  • 댓글 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철수 중원대학교 부총장. 사진=굿모닝충청 김종혁 기자

[굿모닝충청 김종혁 기자] “제주 4.3사건으로 붕괴된 가시리마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마을 공동체의 강한 회복탄력성이 원동력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청년이 있었다.”

제주 가시리마을 출신으로 충북 괴산의 중원대학교 부총장을 맡고 있는 김철수 교수는 인구 감소로 인한 지역 소멸과 지방대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늘 고민하는 사회학자다. 

제주 중산간에 위치한 가시리마을은 4.3사건으로 마을이 전소되고, 600여 명의 인명피해로 당시 인구의 절반 이상이 희생되는 등 공동체가 완전히 붕괴된 대표적인 피해지역이다.

그랬던 가시리마을이 고통과 아픔의 기억을 이겨내고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된 유채꽃 길을 자랑하는 살기 좋은 마을로 거듭났다.

괴산을 비롯한 내륙의 마을에 가시리의 성공사례를 적용하면 어떨까? 

가시리마을이 성공한 데는 공동체 회복을 위한 구성원 모두의 노력과 청년의 힘 등 분명한 이유가 있다. 

가시리마을의 아픔과 회복, 그리고 미래 비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김 부총장에게 소멸 위기에 처한 지역을 되살리기 위한 방법을 들어봤다.

다음은 김 부총장과 일문일답

- 먼저 제주 가시리마을은 어떤 곳인가?

“가시리(加時里) 마을은 제주도 서귀포시에 위치한 중산간 마을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600년 전 고려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청주 한씨 한천(韓蕆)이 고려 말 이성계의 제거를 모의 중 탄로나 제주도에 유배되면서 가족과 함께 이곳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조선조 때는 면암 최익현이 1879년 제주도로 유배를 왔다가 이곳에서 학문을 일으켰던 한천에게 감복하여 비문을 남긴 지역이다.”

- 가시리마을이 제주 4.3 사건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는데?

“해방 후인 1948년 제주에서 발생한 4.3사건은 이러한 유구한 역사를 지닌 가시리 마을을 초토화시켜 버렸다. 4.3사건은 전쟁보다도 더 잔혹한 집단학살을 일으킴으로써 마을공동체를 붕괴시켰고, 사건 이후에도 살아남은 자들 간에 불신과 갈등, 공포 등을 지속적으로 남겨두어 마을 발전을 저해했다. 

제주도는 4.3사건 와중에 전개된 토벌대의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로 간주하여 총살하겠다’는 초토화 작전으로 95% 이상의 중산간 마을이 방화로 사라졌고 가옥 3만9285동이 소각되었다. 중산간 마을 9만여 명의 주민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이재민 신세로 생명의 위기와 공포에 떨었던 것이다. 

가시리마을도 중산간 마을로 4.3사건으로 마을이 전소되고 600여 명의 인명피해로 당시 인구의 절반 이상이 희생되었으며, 소개령(疎開令)으로 주민들이 마을을 떠나면서 공동체가 완전히 붕괴되었다. 당시 가시리에는 360여 세대가 있었으며, ‘평균적으로 1가구당 2명 정도의 사망자가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제주 4.3평화재단이 발간한 자료집에 의하면, 가시리마을은 제주도에서 3번째 인명피해가 많은 지역으로 기록되었다.”

- 4.3을 겪고 난 이후 가시리마을은 어땠나?

“무엇보다 공동체 주민들에게 깊은 상처로 남아있는 참혹한 인명피해, 곧 4.3사건 집단학살의 기억에 대한 치유가 급선무였다. 이유 없이 가족과 이웃들이 죽임을 당했던 집단학살의 불안감과 공포감, 그러한 학살을 무력하게 지켜봤던 절망감, 그리고 군경토벌대와 빨치산에 대한 두려움과 증오 등이 주민들에게 엄습했다. 마을공동체의 공간적 상실도 그렇지만, 집단학살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서 가족 중 그리고 마을에서 자신만 살아남았다는 미안함과 죄의식(트라우마), 군경 및 주민들 간의 대립과 갈등이 계속 이어지면서 공동체는 극심한 절망감과 혼란을 겪고 있었다.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희생자였고 피해자였다. 모든 마을공동체는 4.3사건 자체를 트라우마로 가진 채 내동댕이쳐졌으며 그 상처와 고통은 피해 당사자와 가족뿐만 아니라 목격자와 남겨진 이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는 복구와 재건이 요구되고 있었다.”

- 가시리 마을은 어떻게 일어서기 시작했나?

“먼저 공동체의 안전과 회복이 요구되었다. 4.3사건 이후 공포, 갈등, 불신, 좌절감 극복을 통한 공동체의 심리적 안정이 주민들 간의 갈등을 극복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로 대두됐다. 

7년 7개월 동안 광풍이 몰아쳤던 4.3사건이 종결되자 주민들이 하나 둘 마을로 다시 돌아와 공동체를 복원하고 마을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정부에 의한 전국적인 새마을 운동 전개에 발맞추어 나가면서 20여 년이 지난 1974년에는 ‘새마을가꾸기 우수부락’으로 평가되어 대통령 특별하사금을 받았고, 1975년에는 ‘전국 우수마을’로 선정되면서 당시 이장은 국가로부터 ‘새마을 훈장 협동장’을 받았으며 대통령도 마을을 방문할 정도로 마을공동체가 회복되고 있었다. 4.3사건으로 폐허가 되었던 마을은 서서히 발전을 거듭하면서 공동체 문화를 회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와 그 이후 전개된 세계 경제 위기와 제주지역 개발에 대한 논란 그리고 인구성장 둔화에 따른 농촌지역의 위기 등 일련의 상황들은 마을공동체 발전의 비전을 새롭게 정립할 것을 요청하고 있었다. 

가시리마을에서도 발 빠르게 1994년 지역의 청년들이 소속된 가시리청년회 주관으로 모든 주민들을 대상으로 주민의식조사를 실시하여 마을 발전의 방향을 찾아 나갔다. “대규모 관광사업을 하지 말자” “땅을 보존해 후손에게 물려주자” “가시리마을만의 문화가치를 창조하자”는 마을주민들의 여론을 들었고, 이는 이후 마을의 자연 자원을 외부자본이나 대기업에 팔지 않고 마을주민들이 직접 운영한다는 방향으로 여론이 조성되었다. 

당시 가시리마을의 가장 큰 자원은 약 240만여 평에 달하는 마을 공동목장이었다. 마을주민들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여 전체 가구의 80% 이상이 전업농을 하고 있다. 지역적으로 6개의 동(洞)과 13개의 오름을 보유하고 있다. 마을공동목장은 조선시대 최고등급의 말인 갑마(甲馬)를 조성하는 국영목장인 ‘갑마장’이 위치했었던 곳으로 이러한 마을의 역사적 특성을 지역 활성화의 중요한 방안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마을청년들의 주도로 공동목장의 일부에 2009년 농촌마을 종합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첫 국산화 풍력발전단지를 유치하여 현재 20기 이상의 풍력발전기가 설치 운영되고 있다. 이는 국내 최초 주민참여형 사업으로 자리매김하였고 전력 판매수입금의 10% 내외가 마을에 지원되고 있다.“

제주 가시리마을 유채꼿 전경. 사진=제주방문센터 캡처/굿모닝충청 김종혁 기자
제주 가시리마을 유채꼿 전경. 사진=제주방문센터 캡처/굿모닝충청 김종혁 기자

- 가시리마을의 다양한 변화는 무엇인가?

“마을의 역사문화를 구현하는 사업으로 말과 관련된 박물관, 문화센터, 창작지원센터 등을 건립하여 지역민과 외부 전문가들이 협력하여 시설들을 운영했다. 여기에 지역민과 방문객을 위한 문화교육 프로그램들을 개발해 나갔다. 이러한 가시리 마을의 각종 시설들과 문화교육 프로그램들은 이전의 주민의식조사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마을의 소득증대를 위한 단순한 차원이 아니라 마을의 문화가치를 창조하고 주민들의 마을에 대한 자긍심을 높이는데 목표를 두고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리립(里立) 박물관인 조랑말 박물관과 조랑말 체험공원이 조성되어 마을의 역사적인 정체성을 구현했고 점차 새로운 문화적 정체성들도 만들어져 나갔다.

가시리창작지원센터가 지어져 문화예술인들을 6개월 단위로 공개 모집하여 창작활동 공간을 제공하는 레지던스 프로그램이 운영되었다. 여기에 선정된 문화예술인에게는 돈을 받는 대신 오히려 마을공동체에서 월 80만 원의 생활 지원비와 창작활동비를 지원하는 파격적인 프로그램을 시행했다. 대신 그들에게는 주민을 위한 교육프로그램 운영 혹은 마을 내에서의 커뮤니티 아트 활동을 자유롭게 진행할 것을 요청했다. 이러한 생각은 적중했다. 마을에서 창작활동을 하게 된 문화예술인들은 마을공동체가 갖고 있는 다양한 문화적 특성을 접하며 찾아냈고 이를 대상으로 작품을 창조했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지닌 문화예술의 재능으로 마을의 축제나 문화공연에 참여하여 마을의 문화적 역량과 가치를 높이는 효과를 가져왔다. 마을주민들과 서로 소통하면서 어느 한쪽이 혜택을 주거나 받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호 수혜적 관계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창작지원센터에서는 ‘어린이 영화교실’, ‘등공예교실’, ‘어린이 방송교실’, ‘가시리, 말그림 그리기 대회’ ‘목공교실’ 등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운영해 오고 있다. 

가시리 문화센터에서도 가시리밴드, 타악동아리, 국궁동아리, 댄스스포츠, 기공동아리, 어린이댄스 스포츠, 사진동아리 등 다양한 동아리들이 운영되면서 주민들의 문화활동을 지원하며 자긍심을 높여 나갔다. 마을공동목장에는 풍수를 고려해 조성된 유채꽃 프라자가 건립되어 방문객을 위해 농촌체험연수시설, 커뮤니티들의 모임 등을 위한 장소, 워크숍과 강의 공간으로 활용되면서 지금까지 인기가 높다. 또 원래 마을회관의 별관을 리모델링하여 만들어진 가시리 디자인카페는 주민 간의 소통을 위한 공간으로 마을의 문화 사업들을 위한 전시회들이 열리기도 하고 모임과 독서, 인터넷 이용이 가능한 문화사랑방의 역할을 하고 있다. 농촌지역의 특성을 고려하여 지어진 마을의 경로당도 최고의 시설들을 구비하여 마을 탐방시 둘러보는 전국적인 시선을 받고 있는 곳이다. 매년 봄이 되면 마을공동목장 일대는 북새통을 이룬다. 마을목장 사이에 조성된 5Km 이상의 유채꽃 도로와 목장의 4만여 평에 조성된 유채꽃 단지 때문이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되고 소문나면서 4월 초부터 시작되는 유체꽃 축제에는 만개한 유채꽃과 벚꽃 그리고 수국과 목장의 풍력발전기가 함께 어우러져 향연을 펼치는 장관을 보기 위해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유명 관광지역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 지금 가시리마을은 어떻게 운영되고 있나?

“마을 행정을 보는 마을회와 마을 발전 사업을 총괄하고 운영하는 유채꽃마을만들기 추진위원회, 그리고 컨설팅을 담당하는 외부 전문가 집단이 협력적 거버넌스를 만들어나가고 있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소득증가와 인구증가를 모두 이룬 마을공동체가 만들어졌다. 2010년부터는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4.3사건 후인 1950년에 180가구 809명에 불과했던 인구가 1980년에는 1805명으로 증가했었으나, 그 이후 마을의 인구는 다른 농촌마을들과 동일하게 감소하기 시작하여 2009년에는 1173명까지 내려왔다.

그러나 현재(2021.12.31 기준)는 672가구 1390명으로 증가하면서 대부분의 농촌마을이 겪고 있는 인구감소 문제를 넘어서 오히려 인구가 증가하고 있는 몇 안 되는 농촌마을공동체를 이루었다. 외부인, 귀촌인, 그동안 마을을 떠났던 출향민들이 다시 돌아와 정착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을만들기 사업의 모범사례로 꼽히면서 최근에는 마을을 대상으로 한 학위논문 등 다양한 연구물들이 나오고 있다. 대부분 가시리 마을의 마을공동체의 변화에 초점을 둔 것으로 발전 요인, 가시리 마을만들기 사례를 통한 한국형 마을만들기, 가시리 마을 신문화공간 조성사업, 말(馬) 문화와 풍력발전 등에 관련된 연구들이다.

4.3사건 이후 마을공동체의 안전확보와 회복 노력은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 4.3사건의 참혹함에 대응한 공동체적 연대는 양민(집단)학살의 공포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결과를 가져왔고, 4.3사건의 경험과 기억들은 공동체 내부의 응집력을 강화하고 재발 방지와 마을 발전의 의지적 태도 형성에 영향을 주면서 공동체 발전의 원천적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마을공동체는 참담한 역사적 경험(재난)을 긍정적으로 회복하고 30년 전부터 진행된 인구감소라는 위기적 상황에 대응해 나가면서 마을만들기에 성공하여 ‘자긍심이 높은 주민’ ‘더 재미진(재미있는) 동네’ ‘다시 찾고싶은 마을’로 거듭나고 있다.”

- 가시리마을의 지역활성화 성과 원동력은?

“지역활성화는 부자연스럽게 인구를 늘리고 지역 소득의 증가를 목표로 방문객을 끌어들이는 것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고 누구나 알고 있다. 젊은 인구들이 농촌지역을 떠나면서 지역은 노령화가 진행되고 생산 활동이 지체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지역공동체는 조급해진다. 정부의 예산을 끌어오고 타 지역을 벤치마킹하면서 차별화를 이루지 못하고 다른 지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급하게 눈길을 끌 수 있는 구조물을 설치하고 막대한 예산을 들여 대대적인 홍보를 진행한다. 그러나 효과는 미미할 가능성이 높다. 

가시리 마을공동체는 위기가 찾아왔을 때 모든 주민을 대상으로 주민의식 및 수요조사를 실시하여 여론을 수렴하면서 마을만의 발전가능성을 묻고 발전방향을 설정한 후 공동체의 고유한 역사·자연지리 문화를 활용한 지역활성화 방안에 주목했다. 이는 조급하지 않고 주민들의 공감능력을 조성하면서 주민합의를 이끌어낸 것이다. 또한 이는 ‘로컬’ 차원과 ‘글로벌’ 차원의 연계이며 문화가 가진 특수성은 그 자체로 경쟁력을 지니게 된다. 그리고 지역활성화는 지역 주민이 주체가 되면서 외부 전문가가 결합하고 정부가 지원하는 경우에 성공의 가능성이 높다. 먼저 지역의 젊은이들이 나서야 한다. 한 살이라도 젊은 사람들이 시대적인 문화적 감각을 지니고 있으며 고정관념에서 탈피할 가능성이 높다. 또 지역의 활성화가 주민보다 정부의 의지만으로 진행된다면 주민들은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고 활성화 사업의 필요성조차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가시리 오름들. 사진=제주방문센터캡처/굿모닝충청 김종혁 기자
가시리 오름들. 사진=제주방문센터캡처/굿모닝충청 김종혁 기자

- 가시리마을의 성과를 괴산군 등 지역에 적용하는 방법은?

“수백명이 주민이 목숨을 잃으면서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참혹한 관계의 사슬을 청년들의 끈질긴 설득과 노력으로 이뤄냈다. 결국 가시리마을의 가장 큰 원동력은 청년들과 마을주민 모두가 ‘가시리’를 살려야겠다는 굳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본다. 공동체의 하나 된 마음은 회복탄력성을 높여 주기 때문에 성공 가능성이 높아진다. 

지역의 특수성을 활용한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프로그램들의 개발은 방문객의 재방문율을 높이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며 다른 지역보다 해당 지역 내에서 다양한 활용이 쉽기 때문에 지속가능성이 높다. 그런 면에서 가시리 마을공동체의 지역활성화 경험은 주목된다.

이 같은 성과를 바탕으로 괴산 등 지역에도 젊은층의 유입을 위한 정주여건이 마련돼야 하는데, 가장 기본적으로 ”내가 괴산에서 잘 살수 있다“는 믿음을 줘야 한다. 이는 자치단체와 지역 주민 간의 끈끈한 공동체 의식이 필요하다.

특히 괴산의 경우 천혜의 자연환경과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하다. 군청과 주민은 물론 지역 기업과 대학 등 모든 구성원이 하나로 뭉치면 지역활성화는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

- 괴산에는 중원대학교라는 큰 지역 자산이 있다. 지역과 대학의 연계 방안은?

“모든 대학은 특정 지역사회에 근거를 두고 있다. 더구나 지역사회와 적극적으로 결연하고 지역주민과 공생하는 새로운 가치 있는 공간으로 재생하는 ‘커뮤니티 캠퍼스化’ ‘마을이 캠퍼스’가 지방에 시도되고 있다.

21세기에 들어 비교적 중립적 존재였던 대학이 마을만들기의 담당자 및 지역자원으로서 기대되기 시작했다. 대학에는 학생 및 교원이라는 ‘사람’, 캠퍼스 등의 ‘공간’, 기초부터 최첨단까지의 ‘지식’이라는 재산이 있다. 지금까지 다루지 않는 자원이 마을만들기의 자원으로 직접 연결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중원대는 지역의 청년으로서 지역과 함께 할 수 있는 다양한 구상을 갖고 있다. 학생의 활동이 지역사회의 일상과 스며들어야 한다. 정기적으로 지역사회를 방문하고 지역주민과 대면접촉을 해야 한다. 또한 대학생 개인의 노력에만 의존함이 없이 대학이 조직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필요불가결하다. 학생은 졸업해 버리면 연결이 되지 않는다. 아울러 지역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는 매너, 기획력, 아이디어, 행동력 등 학생으로서의 장점을 충분히 지역사회에 발휘할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이 같은 학생들이 노력과 이를 뒷받침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그래서 괴산군과 중원대가 지역활성화를 위해 손잡고 다양한 일들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주민이 살아야 괴산이 살고, 괴산이 살아야 중원대가 살 수 있다.”

- 제주 출신이 멀리 괴산까지 와서 근무 중인데 본인 소개를 해달라.

“가시리마을에서 태어나 대학을 경북대로 진학했다. 경북대에서 사회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일본 교토불교대학에서 사회학과 객원연구원으로 근무했다. 

이후 대구발전연구원 상임연구위원을 거쳐 대진대학교 사회자본연구소 상임연구원을 역임한 후 줄곧 중원대에서 근무하고 있다.

사회학자로서 한국사회학회 회원, 한국종교학회 이사, 한국종교사회학회 회원, 세계환단학회 학술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한편 교수는 사회학의 역사학을 주로 연구했다. 주요 저서로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 ‘일본 고대문화와 한민족’, ‘일본 고신도와 한민족’ ‘소도와 신사’ ‘해방이후 한국의 종교지형 변화의 특성’ ‘1910~1925년 식민권력의 형성과 민족종교 성쇠’ ‘소시모리와 소도’ 등 다수가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2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청주인 2023-07-11 20:34:56
간만에 정독하게되는 기사네요. 괴산도 충분히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도시입니다. 가시리에 간적이 있는데 사연까지 알게되니, 작지만 알차고 단단한 결집력 있는 마을로 다시보이네요.

김승용 2023-06-23 18:49:56
좋은글 감사합니다 ! 기회가 된다면 가시리에 꼭 가보고 싶네요 ! ^^

  • 굿모닝충청(일반주간신문)
  • 대전광역시 서구 신갈마로 75-6 3층
  • 대표전화 : 042-389-0080
  • 팩스 : 042-389-0088
  • 청소년보호책임자 : 송광석
  • 법인명 : 굿모닝충청
  • 제호 : 굿모닝충청
  • 등록번호 : 대전 다 01283
  • 등록일 : 2012-07-01
  • 발행일 : 2012-07-01
  • 발행인 : 송광석
  • 편집인 : 김갑수
  • 창간일 : 2012년 7월 1일
  • 굿모닝충청(인터넷신문)
  • 대전광역시 서구 신갈마로 75-6 3층
  • 대표전화 : 042-389-0087
  • 팩스 : 042-389-0088
  • 청소년보호책임자 : 송광석
  • 법인명 : 굿모닝충청
  • 제호 : 굿모닝충청
  • 등록번호 : 대전 아00326
  • 등록일 : 2019-02-26
  • 발행인 : 송광석
  • 편집인 : 김갑수
  • 굿모닝충청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굿모닝충청.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mcc@goodmorningcc.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