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31일, 네번째 라이딩으로 나헤라에서 출발하여 카스트로해리스(Castorjeriz)까지 달립니다. 나헤라는 인구 7천 명 강가의 조그마한 도시입니다. 강을 중심으로 상대적으로 구도심과 신도심으로 갈라진 느낌입니다.
새벽에 산책을 나가보니 강북 쪽은 거의 사람이 살지 않는 쪽방촌같이 피폐한 느낌이었습니다. 스페인 사람들은 오래된 건물을 파괴하지 않고 옆에다 새로 건물을 짓는다고 합니다.
그 건물들은 500년 이상 된 문화재로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됩니다. 나헤라를 떠나면서 눈앞에 보이는 짙은 갈색의 암벽이 인상적입니다, 앞으로 전개될 황톳길의 예고편인 것 같습니다.
10km정도 차도로 가면 부르고스(Burgos)입니다. 부르고스는 튼튼한 방어탑이라는 뜻으로 해발고도 862m 고원지대에 있습니다. 지중해와 한참이나 떨어져 있고 지대도 높아 일교차가 심하고 건조한 대륙성 기후의 특성이 있습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큰 도시는 팜프로나, 부르고스, 레온, 최종 목적지 산티아고 콤보스텔라입니다. 이 도시들은 과거 왕국의 수도로 부르고스는 카스티야 왕국의 수도였습니다.

부르고스 산타 마리아 대성당은 바르셀로나, 레온과 더불어 스페인 3대 대성당으로 유명합니다. 1221년 공사를 시작하여 300년이 지나 1567년 완성된 고딕풍의 성당입니다.
중세시대 성당의 탑은 하늘에 가까워지려는 인간의 소망을 반영해 점점 높아졌습니다. 성당 전체가 마치 수를 놓은 것처럼 섬세하고 정교한 조각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예술품입니다. 우리는 성당 전체 모습을 담기 위해 등을 땅에 기대고 가장 밑바닥에 카메라를 놓은 채 위를 보면서 열심히 사진을 찍었습니다.



1984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이 성당은 13세기 프랑스 고딕 예술 양식이 스페인과 융합하여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조형예술의 창조성과 천재성을 보여줍니다. 이 성당을 짓기 위해 작업 인력을 국제적으로 조직하고 스페인의 건축가와 조각가를 교육하여 건설하였으며 그 영향으로 중세 말에 가장 번성한 스페인 예술계의 한 흐름을 만들어 냈습니다.

여기 대성당의 무덤에는 우리의 이순신 장군처럼 11세기 스페인의 전설적 영웅 엘 시드(Le Cid)의 무덤이 있습니다. 엘 시드는 별칭이고, 본명은 로드리고 디아스 데 비바르(Rodrigo Díaz de Vivar)입니다.

1080년 스페인은 기독교인과 무어인이 싸움하는 불행한 나라였습니다. 성주의 아들로 용감한 기사였던 엘 시드는 사로잡은 무어족 족장을 스페인의 국민이라는 이유로 석방해서 무어인들로부터 엘 시드라는 영웅 칭호를 받지만, 반역죄라는 불명예를 얻습니다.
그는 명예 회복을 위하여 적대자인 약혼녀 히메나의 아버지와 결투하여 그를 죽이고 그의 딸 히메나는 복수를 결심합니다. 왕위 계승자 산쵸는 그의 동생 알폰소와 상속받은 영토 갈등으로 전쟁을 합니다. 그는 산쵸 편의 기사로 출전하지만 알폰소가 승리하여 영토를 재통일하자 알폰소의 왕위 즉위에 도움을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정치세력의 이해관계와 시기질투로 인해 왕은 그를 카스티아 왕국에서 추방했으나, 그를 존경하는 전사들과 군대를 조직하여 발렌시아를 정복하고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살게 됩니다.
그는 종교적 적대감을 버리고 기독교와 회교도를 손잡게 해서 외적의 침략을 막은 애국자이자 왕에게 충성을 다하는 충신으로 스페인의 제일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엘 시드의 삶은 파란만장하고 흥미진진하여 찰톤 헤스톤과 소피아 로렌 주연의 영화로 상영되었고 오페라로 공연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제부터 레온까지 180킬로는 황량한 들판인 메세타(Meseta) 고원이 펼쳐집니다. 이곳은 스페인 척추입니다. 결함 있는 자아와 끊임없이 싸우는 명상의 구간으로 사람은 처음부터 쉽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생각을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것도 이것입니다.

우리는 부루고스에서 점심을 먹고 한참을 달리다가 커피타임을 가졌습니다. 많은 순례자들이 쉬어가는 장소였습니다. 벽에 붙어있는 순례자들의 남긴 것들 중 유난히 한국인들의 흔적이 많았습니다. 잊고 싶지 않은 마음일 것입니다.

여기서 80세 넘어 보이는 인자한 인상의 노인 한 분을 만났습니다. 작은 키에 모자를 쓴 주름살 많은 얼굴이 낯이 익은듯했습니다. 반 고흐가 죽기 전 그린 그림 중에서 《가세 박사의 초상》이 있습니다. 고흐는 말년에 정신병에 시달렸는데 권총으로 자살하기 전 2개월 동안 정신과 의사인 가세 박사에게 가서 자신의 병에 대해 상담 했습니다.
가세 박사는 그림 그리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는 조언을 해주었고, 고흐의 그림을 좋아한 가세 박사는 자기를 그려달라는 청을 하였습니다. 1990년 《가세 박사의 초상》은 뉴욕 크리스티에서 8,250만 달러에 팔렸습니다.





오르고 내려가고 흙먼지를 일으키며 대서양을 안고 동에서 서로 갑니다. 저기 수평선 너머에 구름이 넘실거립니다. 구름을 보며 혼잣말을 합니다. 이런 하늘을 본 지 얼마 만인가. 얼마나 유쾌한 풍경인가. 태양과 구름이 서로 술래잡기를 하기에 덥지 않습니다. 봄이라 다행입니다. 들판의 꽃이 구름과 함께 황량함을 외롭지 않도록 멋있게 장식해 줍니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만나면 그것을 붙들고 소유하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사람들은 가지각색으로 순례길을 오고 갑니다. 걷기와 자전거, 말타기만 허용하지만 개를 데리고 걷는 사람, 짐차를 몸에 메고 고행하듯 끌고 걸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은 지도 상에 잘 나오지 않은 곳 카스트로해리스에서 잠을청합니다. 알지도 못하는 아주 작고 오래된 부락입니다. 마을 입구의 간판은 새것이지만 막상 마을에 가보니 빈집이 많았습니다.



멀리 마을 뒷산 꼭대기에는 이 마을을 방어하는 성이 보입니다. 작은 마을에 성당이 여러 개 되는 것 같습니다. 일부는 성당으로 쓰지 않고 납골당으로 쓰는 것 같습니다. 산 중턱에 토굴 같은 집도 있습니다. 무슨 용도로 쓰였는지 궁금합니다.

최근에 지은 알베르게로 센스 있는 숙소입니다. 2층 방에 올라가니 풍경을 보면서 멍 때리기 좋게 창가에 의자를 배치했습니다. 어디 가도 스페인의 풍경은 평화롭고 아름답습니다.

![[임영호 동대전농협조합장]](/news/photo/202309/296824_329923_1544.jpg)
수십 명이 사는 마을이지만 서너 시간 운영하는 슈퍼와 먹을만한 식당도 있습니다. 소맥 몇 잔과 포도주로 피로를 달랬습니다. 집 떠난 지 1주일이 지나가지만, 아직 집 생각은 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