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의 어원상고사] 신라 4
[정진명의 어원상고사] 신라 4
정진명 시인, 어원을 통한 한국의 고대사 고찰 연재 '58-신라4'
  • 정진명 시인
  • 승인 2023.10.26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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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제각의 삼국유사 영인본.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대제각의 삼국유사 영인본.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굿모닝충청 정진명 시인] 우리말의 뿌리를 더듬다가 우리는 어느덧 신라가 흉노의 후예가 다스리는 나라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흉노를 모른 체하고 갈 수가 없습니다. 흉노는 사마천의 『사기』에 처음으로 자세히 나옵니다. 그걸 다 볼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사는 모습만 살짝 보고 가겠습니다. 먼저 풍속입니다. 『사기』에서 그대로 인용합니다.

 “싸움이 유리할 때는 나아가고 불리할 때는 후퇴하였는데, 도주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았다. 오로지 이익을 위해서 일을 꾸밀 뿐 예의는 고려하지 않았다. 임금을 비롯해 모든 사람이 가축의 고기를 먹고 그 가죽이나 털로는 옷을 해입거나 침구로 썼다. 건장한 사람이 맛있는 음식을 먹고 노약자들은 그 나머지를 먹었다. 아비가 죽으면 아들이 그 후처를 아내로 맞고 형제가 죽으면 남아있는 형이나 아우가 그 아내를 차지하였다. 서로 이름을 부르는 것을 꺼리지 않았으며 성이나 자 같은 것은 아예 없었다.”

삶에 예의가 자리 잡은 중국과는 다른 점을 부각시켜서 기록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걸 보면 부여 고구려의 ‘형사취수(兄死取嫂)’가 여기서 말미암은 것임을 알 수 있고, 신라 사회에서 왜 그토록 늦은 시기까지 근친혼이 이어졌는지를 절로 밝혀집니다.

이번에는 정치구조를 보겠습니다. 우두머리는 선우이고, 좌현왕와 우현왕이 있습니다. 현왕 밑에 녹려왕(谷蠡王), 대도위(大都尉), 대당호(大當戶), 골도후(骨都侯)가 있습니다. 흉노는 기명 1만~몇 천 명을 기본 단위로 하는데, 이들을 ‘만기(萬騎)’라고 합니다. 이들 만기는 24개로 고정입니다. 그래서 24장(長)이라고 하고, 이들 밑에 각기 천장, 백장, 십장, 비소왕(卑小王), 상방(相邦), 도위, 당호, 저거(且渠) 같은 벼슬을 두었습니다.

만기가 24장이라는 것이 눈에 들어오죠? 왜 24일까요? 왕이 포함되면 25가 됩니다. 흉노는 전체를 3으로 나누어 선우와 좌우 현왕이 다스렸습니다. 이들에게 5장씩 나누면 3×5=15. 나머지가 9인데, 각기 3장씩 배당됩니다. 이들은 선우와 현왕을 보좌하는 대도위 대당호 골도후(녹려왕)죠. 흉노는 이들이 각기 일정한 구역을 차지하고 물과 풀을 따라서 옮겨다니며 삽니다. 초원의 삶이 궁핍하다보니 노략질을 하게 되고, 그것이 때만 되면 중국을 침략하는 원인입니다. 이동과 침략이 삶의 원리인 셈입니다. 이들에게 농사짓고 사는 중국의 시각으로 보니 이상해 보이는 겁니다.

지나는 김에 심심풀이로 흉노의 인구가 얼마나 되었는지 한 번 셈해보고 갈까요? 흉노는 좌우 현왕과 선우가 24장을 거느립니다. 각 장(長)은 휘하에 1만을 거느립니다. 그래서 ‘만기(萬騎)’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만기는 꼭 1만명을 거느리는 것은 아니고, 그 숫자가 안 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본 단위는 만기입니다. 그래서 가장 많은 인구수는 25만 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숫자는 전투력입니다. 즉 성인 남자의 숫자죠. 여자와 아이는 제외된 숫자이니, 한 집에 자식을 하나만 두었다고 해서 3인으로 치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초원에 퍼져 살던 흉노 인구는 75만 명은 훌쩍 넘었다는 뜻이죠. 한 집에 자식이 둘이면 인구는 125만명을 넘어갑니다. 설마 이 시대에 자식이 둘 뿐이었을까요? 그러면 이제 다시 셈해야죠.

그건 그렇고, 더 이상한 게 있습니다. 24장의 ‘장’이 느닷없이 『사기』의 「조선열전」에도 나온다는 것입니다. 원봉2년에 한나라에서 우거에게 사신을 보내는데, ‘섭하’라는 인물입니다. 이 사람이 돌아올 때 호위하여 전송을 나온 조선측 사람이 비왕(裨王) 장(長)이었습니다. 섭하가 자신을 호송해준 장을 죽이고 한나라로 도망칩니다. 섭하는 이로 인해 한나라에서 벼슬을 받아서 요동의 동부도위가 되는데, 조선에서 원수를 갚으려고 공격하여 섭하를 죽입니다. 이것이 조선 정벌의 발단이자 명분이 되어 한 무제는 그해 가을에 죄수들로 군대를 만들어 정벌에 나섭니다.

이 대목을 보면 흉노의 제도가 조선에도 그대로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장(長)을 비왕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조선에서는 24장을 ‘작은 왕(裨王)’이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조선 열전에 우거의 아들 이름이 장항(長降)이라고 나옵니다. ‘장’은 이름이 아니라 직책이었을 겁니다. 우거의 아들도 24장 중의 한 명이었다는 얘기죠. 유목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간편하고 다스리기 편한 구조가 24장 제도였고, 그것은 부족이 다르다고 해서 쉽게 바뀔 성질의 것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조선도 흉노처럼 24장을 기본 뼈대로 하여 전체를 세 구역으로 나누어 다스렸을 것임을 쉽게 추측할 수 있고, 그 증거는 한반도로 도망간 준 왕이 삼한을 세운다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들 벼슬이름 중에서 녹려왕과 골도후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녹려왕은 군사 행정을 담당하는 벼슬아치인데, 선우의 자제가 맡습니다. 고구려에 ‘고추가’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벼슬 이름이 있는데, ‘고구려 때, 왕족이나 귀족에 대한 호칭의 하나.’로 설명하죠. 흉노의 녹려왕에 해당하는 벼슬이라서, 중앙집권제 하의 통치 논리로는 이해하기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골도후는 성이 다른 대신이 맡습니다. 흉노는 원시 형태의 통치구조인데, 선우가 좌우 양쪽의 현왕을 견제하려는 방법으로 녹려왕을 두었고, 또 주먹구구식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 성이 다른 사람을 벼슬아치로 임명한 방법도 쓴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는, 나름대로 조직을 통제하는 그들만의 방법이 있던 셈이고, 그게 고구려에도 흘러든 것입니다. 고구려가 다민족 연합국가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습니다. 흉노의 통치구조는 후대의 유목민 국가에서 거의 그대로 되풀이됩니다. 몽고(원)나 여진(청)의 벼슬인 ‘십호, 백호, 천호, 만호’ 같은 것이 그런 것들입니다. 이것은 중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자는 수레 만 대를 거느린다고 하여 만승, 제후는 천승, 백승, 이런 식으로 신분을 갈랐습니다.

김일제의 아버지는 휴도왕인데, 궁금한 김에 휴도왕의 뒷소식도 알아보겠습니다. 『사기』에 나옵니다.

 “그해 가을, 선우는 서쪽 혼야왕과 휴도왕이 한나라 군사들에게 그의 병사 수만 명이 죽거나 포로가 되게 한 것을 노여워하여 그들을 불러들여 죽이려 하였다. 이에 혼야왕과 휴도왕은 겁을 먹고 한나라에 항복할 것을 꾀하였으므로 한나라는 표기장군(곽거병)을 시켜 이들을 맞게 하였다. 혼야왕은 휴도왕을 죽여 그의 군사와 백성들을 합쳐 거느리고 한나라에 항복하였다. 그 수는 약 4만여 명이었는데, 10만 명이라고도 하였다.”

김일제는 한나라로 먼저 잡혀왔지만, 아버지가 있는 고향으로 도망칠 생각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도 이렇게 비참하고 불명예스럽게 죽으니, 돌아갈 곳이 없어진 셈입니다. 그가 중국에 눌러앉아 무제가 마지막까지 믿은 충신이 된 까닭입니다. 그리고 그 핏줄은 한반도 끝의 신라까지 넘어옵니다.

흉노는 이런 식으로 중국의 압박에 못 이겨 흩어집니다. 일부는 도망가고 일부는 중국으로 흡수되면서 점차 세력을 잃습니다. 한나라 이후에는 흉노가 사라지고 텅 빈 초원지대에 새로운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선비와 오환이 그들입니다. 이들은 고조선의 맨 서쪽에서 흉노와 경계를 맞대고 있던 부족입니다. 『사기』 흉노열전에서 묵돌(冒頓) 선우에게 호되게 당했던 동호(東胡)가 그들입니다.(『삼국지』 위서 열전) 이들은 후한과 삼국시대를 거쳐 수당에 이르기까지 중국 북부에서 일어나 각기 왕국을 세우고 중국의 일부가 됩니다. 이렇게 중국의 일부가 된 이들 세력인 이 씨의 당나라에게 삼국이 망하죠.

그러면 터키어를 쓰는 흉노족이 신라에 남긴 말들을 살펴보는 것으로 신라 얘기를 마치겠습니다. 신라는 초기에 박씨가 왕을 했고, 이들은 단군조선과 같은 퉁구스어를 썼습니다. 그 용어가 바로 왕을 뜻하는 ‘거서간, 화백, 건모라’같은 말들입니다. 거서간은, 만주어로 ‘하늘’은 ‘*kese’이고, ‘임금, 우두머리’는 ‘han, khan’이니, 여기서 온 말입니다. 만주어로 ‘회의’는 ‘hebe’이고, 이것을 한자로 적은 것이 ‘화백(和白)’입니다. ‘도성’은 ‘gemulehe’이고, 이것을 한자로 적은 것이 건모라(健牟羅)입니다.

김알지는 마립간이라고 했고, 후기로 접어들면서 왕명도 ‘마립간’이나 ‘왕’으로 바뀝니다. 물론 다른 용어도 바뀝니다. ‘마립간’은 터키어로 ‘melik-kan’인데 왕을 뜻하는 말입니다. 지증왕 대에 이르면 김 씨 신라의 면모가 확실해지는데, 왕명과 더불어 나라 이름을 ‘신라(新羅)’로 확정하여 쓰면서, 이 신라가 터키어 ‘sïla’를 표기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 전에 쓰이던 ‘徐羅伐, 斯盧, 斯羅, 鷄林’ 같은 말을 제치고 선택된 것입니다. 비슷비슷한 발음인 것 같지만, ‘新羅’는 터키어로 ‘친목회’를 뜻하는 말입니다. 또 ‘회의’는 터키어로 ‘šûra’인데, 이것도 똑같습니다. 박씨 왕가에서 퉁구스어로 말한 ‘화백’이 터키어를 쓰는 김 씨 왕가에서는 ‘신라(新羅)’로 들린 것입니다. 또 ‘서야벌’이라고도 했는데, 터키어로 ‘šehir’은 ‘대도시’를 뜻고, 이것이 ‘서야벌(徐耶伐)’입니다. 같은 신라를 가리키는 말이 조금씩 소리가 다른 것은 이런 배경에서 온 결과입니다.

이들 흉노족이 남긴 터키어는 남쪽 바닷가 사람들이 쓰는 바람의 이름에 고스란히 남아 지금도 그대로 쓰입니다. 복잡해질 것 같아서 자세한 소개는 그치겠습니다만, 우리말에 남은 터키어가 적지 않음을 보여주는 일입니다.

휴도왕(休屠王)을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수두’로 보고 제사를 담당한 사람이라고 했더군요. 그 근거는 삼한의 소도(蘇塗)입니다. 제사장이 사는 특수구역으로 설령 죄인이 도망쳐와도 바깥사람들이 함부로 들어와서 잡아가지 못한다고 설명되었습니다. 일종의 치외법권 지대죠. 1970년대 학생운동하던 사람들에게 의지가 되던 명동성당 같은 느낌도 납니다. 이 소도를 ‘수두’라고 본 것입니다. 실제로 곽거병이 휴도왕의 소굴을 덮쳤을 때 휴도왕은 도망쳤지만, 그의 아들과 가족을 비롯하여 수많은 포로를 잡았고, 또 흉노가 제사 때 쓰는 금인(金人)을 빼앗아왔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 금인은 흉노인들의 상징입니다. 왜 금으로 만들었느냐면, 그들의 기원이 알타이산맥이고, 알타이는 말 그대로 ‘금덩어리’를 뜻하 말(金山)입니다. 그래서 해마다 새해가 되면 금인을 모셔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죠. 금인은 제사를 지낼 때 받드는 대상입니다. 그 자취가 우리 조상들에게도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이 그것입니다.

고구려의 경우 나라의 동쪽에 국동대혈(國東大穴)이 있는데, 이름이 수혈(隧穴)입니다. 축제가 시작되면 그곳으로 가서 수신을 모시고 와서 신의 자리에 모셔놓습니다. 그리고 며칠이나 축제를 즐기죠. 이걸 ‘동맹’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들의 시조인 ‘동명’을 기리는 행사이기 때문일 겁니다. 실제로 주몽이 죽었을 때 큰 용이 마중 나와서 주몽을 모셔갑니다. 죽은 게 아니라 용을 타고 하늘로 돌아간 거죠. 이 용은 물론 기나긴 장례행렬을 뜻할 겁니다.

흉노의 금인은 고구려의 이런 제천행사와 똑같은 겁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는 제의이자 축제인 것이죠. 이런 상징물을 흉노 휴도왕은 곽거병에게 빼앗긴 겁니다. 그러니 휴도왕이 선우에게 호출하자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던 것이죠. 혼야왕도 마찬가지여서 결국은 둘이 모의하여 중국으로 투항하기로 했고, 혼야왕은 마음이 갈팡질팡하는 휴도왕을 죽이고 한나라에 항복합니다. 이럼으로써 초원의 지배자 흉노는 급격히 시들해집니다.

그 뒤로, 흉노의 제천 금인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놀랍게도 그 뒷소식이 『삼국유사』에 나옵니다. 한 번 보겠습니다.

 『삼보감통록(三寶感通錄)』에 쓰였으되, 고려 요동성 곁의 탑은 늙은이들이 전하는 말에 옛날 고려 성왕이 국경을 순행하다가 이 성에 이르러 오색구름이 땅을 덮은 것을 보고 가서 그 구름 속을 찾아보니 중이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그 중에게 가까이) 가면 곧 없어지고 멀리서 보면 도로 나타났다. 그 곁에 삼층흙탑이 있어 위는 솥을 덮은 것 같았으나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 다시 가서 중을 찾으니 다만 거친 풀이 있을 뿐이었다. 거기를 한 길쯤 파보니 지팡이와 신이 나오고 또 파보니 명(銘)이 나오고 명 위는 범서(梵書)가 쓰였는데, 옆 신하가 그 글을 해독하고 부처의 탑이라고 하였다. 왕이 자세히 물으니 대답하기를, 옛날 한나라에서 소유하였던 것으로, 이를 포도왕(蒲圖王)[본시는 휴도왕(休屠王)이라 서칭(書稱)하는 것이니 제천하는 금인(金人)이다.]이라고 하였다. (성왕이) 이로 신심을 발하여 칠층목탑을 일으켰는데, 그 후에 불법이 전래되자 그 시말을 자세히 알았다. 지금 다시 그 높이를 줄이다가 본탑이 썩어 무너져버렸다. 육왕(育王:인도 아육왕)이 통일한 염부제주(閻浮提洲)에는 처처에 탑을 세웠으니 괴이할 것이 없다. 또 당의 용삭 연간에 요동에 전역이 있을 때 행군 설인귀가 수주(隋主)와 요동 정벌의 고지에 이르러 산의 상이 공광하고 쓸쓸하여 행인이 끊어진 것을 보고 늙은이들에게 물으니 선대에 나타난 것이라 하거늘, 그대로 그려가지고 경사(京師)로 왔다.[약함(若函)에 자세히 기록되었다.] 서한과 삼국의 지리지를 보면 요동성은 압록강 밖에 있어 한의 유주에 속하였다 한다. 고려 성왕은 어떤 임금인지 알 수 없으며, 혹은 동명성제라 하나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동명은 전한 원제 건소 2년에 즉위하여 성제 홍가 임인에 돌아갔으니, 그때는 한에서도 패엽(貝葉:불경)을 보지 못하였거든 어찌 해외의 배신(陪臣)이 벌써 범서를 알 수 있으랴? 그러나 부처를 포도왕이라 한 것을 보면 서한 시대인 듯하니 서역 문자를 혹 아는 자가 있었으므로 범서라 하였ᅌᅳᆯ 것이다. 고전에 의하면 아육왕이 귀신무리를 명하여 염부계(閻浮界) 내에 팔만 사천을 세워 커다란 돌 속에 감추어 두었다 한다. 지금 처처에 그 상서로운 징조가 나타남이 한둘이 아니니 대개 진신의 사리는 감응을 측량키 어려운 까닭이다. 찬하노니 육왕의 보탑, 온 세속에 널리어, 비에 젖고 구름에 파묻히고 또 이끼에 얽혔도다. 그 당년의 행인을 회상해볼 때 몇 사람이나 지시하여 신을 제사하였을까?-『삼국유사』권3 요동성육왕탑.

두 가지가 눈에 띕니다. 제천금인이 요동성에 있다는 것과 불교와 습합하였다는 것입니다. 한나라 곽거병이 빼앗은 제천 금인이 요동성에 있다는 것은 뜻밖입니다. 아마도 전리품으로 갖고 있다가 흉노족의 후예들이 왕조를 세워 중국으로 소속되자 한나라의 유물을 요동지역에 살던 그 자손들이 가져갔을 것이라는 짐작을 해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고구려의 관할 하에 있었다는 것이 좀 놀랍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요동성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습니다.

또 한 가지는 불교와 습합된 모습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포도왕’은 포(蒲)가 ‘부들’이니, 부도왕을 적은 것이 분명합니다. 휴도왕을 부도왕이라고 불렀으니, 이것이 부처를 뜻하는 부도와 소리가 같아서 이렇게 불렀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휴도왕의 제천 금인을 불교의 유물처럼 탑에 모셨다는 것이 특이합니다.

포도왕의 정확한 뜻은 알 수 없지만, 하늘에 제사 지내는 풍속이 불교와 습합하면서 자신의 모습을 보존하려고 한 것 같습니다. 좀 더 연구해봐야 할 일입니다. 역사학자들께서는 제 논리의 약점을 어떻게든 찾아내려 잔머리 굴리지 말고, 제발 이런 연구에 힘을 기울여주시기 바랍니다.

정진명 시인.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정진명 시인.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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