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이만이 들어설 수 있는 길
떠나는 이만이 들어설 수 있는 길
시인 김병호의 서평-박흥용의 '호두나무 왼쪽 길로'
  • 김병호
  • 승인 2012.07.11 14: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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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이가 있다. 충북 영동의 어느 시골에서 할머니와 단둘이 살면서 날마다 서울로 떠난 엄마의 발자국소리를 기다리는 아이가 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공책이랑 가방이랑 한보자기 싸가지고 올엄마를 기다리는 아이는 마을 호두나무에 올라 40리 밖, 영동역을 지나는 경부선 기차의 앓는 소리를 듣는다. 일찍 죽은 아빠는 사실 원망의 대상도 되지 못한다. 그러나 열아홉이 된 아이는 오토바이를 타고 서울로 향하기 직전 엄마가 오래전에 재혼했다는 말을 듣는다. 갈 곳을 잃는다. 이렇게 보면 성장통을 따라가는 낯익은 성장소설이다.

길을 떠난 아이는 누군가의 행적을 쫓아 전국의 각지를 떠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프지만 따듯한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만나고 또 그 안에서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한다. 자 이제 전형적인 로드무비를 보고 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그가 떠도는 곳곳에 대한 아름다운 그림과 상세한 정보가 9월의 호도처럼 촘촘하다. 어떤 여행안내서 못지않다. 정체가 무엇인가?

이 책은 많은 사람이 가볍게 취급하는 만화책이다. 만화 중에 박흥용의 만화이다. 박흥용은 만화작가이자 라이더(이 말이 무얼 뜻하는지는 책 안을 살펴보자)이다. 그리고 그는 사색가이다. 거꾸로 따라가면 그는 사색하는 만화작가이자 여행만 하고 살 수 없을까?’ 고민하는 정신적 떠돌이이다. 이 떠돌이의 그림은 수묵화에서 볼 수 있는 허공을 품고 있다.

이현세가 우리 만화를 문화산업의 전면으로 이끌어낸 혁명가라고 한다면 허영만은 좀 더 묵직한 주제로 청춘의 옆구리를 깊게 찔렀던 아픔의 작가였다. 이유 없는 절망에 허덕이던 어느 젊은 날, 허영만의 에 공감했고 사회적 격동의 한가운데에서 한강에 몸서리쳤다. 그리고 바로 다음 템포에 나타난 이가 바로 박흥용이다. 그는 끊임없이 인간에 대해 물었으며 그 물음을 아직 보지 못했던 새로운 그림으로 담아냈다. 만화가 산업에서 예술의 영역까지 자기 자리를 확대하는 일에 있어서 그가 찍은 큰 발자국을 부정할 이는 없을 것이다. 그의 전작인 구르믈 벗어난 달처럼이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조금 더 유명세를 타긴 했을 터지만 그러나 영화는 원작이 가진 정적인 여백과 사색적 회의, 근원에 향하는 끝없는 갈등과 함께 에로틱한 분위기마저도 보이지 않는 곳으로 미뤄놓았다. 당연히도 이것들은 책으로 보아야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이다.

조금 오래된 이 책을 소개하는 이유는 또 있다. 그가 영동 출생이며 생생한 충청 사투리로 자신의 고향을 소재로 발효시키는 일에 능숙하기 때문이다. 영동에 대한 묘사와 함께 옥천, 공주, 부여 등 우리에게 익숙한 많은 풍경과 길 들이 그의 그림으로 다시 구성되고 있다.

그는 고향을, 호두나무 그늘을 떠나려 한다. 떠나는 길에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길이다.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무작정 떠났던 길의 풍경은 새 그림책을 보는 것 같았지만 호두나무에서 보던 익숙한 그것이었고 중학생이 된 아이가 자전거로 떠났던 길은 얼얼하게 아파오던 엉덩이와 함께 심심하기만한 길이었다. 그러나 지금 박흥용에게 길은 형용하기 힘든 감동이다.

떠난 이는 돌아온다. 호두나무가 불타면서 자신을 폭죽처럼 터뜨리는 장면을 등에 지고 아이는 떠났지만 돌아오는 길에 그를 맞는 건 소복하게 쌓인 눈이다. 물론 그 과정은 아이가 쫓던 미궁의 인물이 누구이며 자신의 상처가 결국 사회적 아픔에서 출발한다는 출생의 비밀(?)을 깨치는 고난이다.

호두나무 왼쪽 길은 공동묘지를 지나는, 사람이 다니지 않는 산길이다. 지금이라도 용감하게 그 길로 방향을 잡으면 호두나무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리고 또 하나, 공산성 안에 실제로 산다는 그 공주 또한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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