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백제 이야기 ②] 백제 요서군의 위치는 어디인가?
[대륙백제 이야기 ②] 백제 요서군의 위치는 어디인가?
백제 요서군의 위치는 오늘날 북경시 인근
  • 조하준 기자
  • 승인 2024.01.21 12:5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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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요서군의 위치는 당나라 북평군과 유성군 사이 지역으로 사서의 기록을 검토했을 때 오늘날 북경시 일대에 해당한다.(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백제 요서군의 위치는 당나라 북평군과 유성군 사이 지역으로 사서의 기록을 검토했을 때 오늘날 북경시 일대에 해당한다.(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앞선 기사에서 백제가 진나라 때 요서, 진평 2군을 점거해 소유했다고 한 『자치통감』의 기록을 봤다. 백제의 요서, 진평 2군 점거 기록은 비단 『자치통감』에만 나온 것이 아니라 『송서』, 『양서』, 『남사』, 『통전』, 『문헌통고』 등 여러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간 국사학계는 대륙백제의 기록을 거의 반쯤 무시하다시피 했다.

이제 본지에서는 백제가 점령한 요서군과 진평군의 위치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볼 것이다. 앞선 기사에 나온 국사 교과서 속 지도를 보면 백제가 요서군을 점령한 것에 대해 그 위치를 오늘날 요령성 요하 서쪽 지역으로 표시했다. 하지만 과연 백제가 점령한 요서군이 정말로 그곳에 있었을까?

백제 요서군의 위치는 유성군과 북평군 사이

보통 우리가 요동과 요서를 구분하는 방법은 요령성의 요하를 기준으로 구분한다고 알고 있다. 지금 국사학계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학자들 또한 이 방식대로 요동, 요서를 구분하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런 주장이 맞는지 한 번 따져볼 필요가 있다. 먼저 당나라 때 두우(杜佑)라는 학자가 지은 『통전(通典)』에 적힌 백제 요서군에 대한 기록은 이렇다.

“진나라 때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경략해 소유하니 백제 또한 요서, 진평 2군을 점거해 소유하니 오늘날 유성과 북평 사이이다.(晋時句麗旣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今柳城北平之間)”

즉, 백제가 차지한 요서군의 위치는 당나라의 유성군과 북평군 사이라는 것이다. 마단림(馬端臨)이 지은 『문헌통고(文獻通考)』 권 326 사예고(四裔考) 3에 적힌 기록도 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

“백제는 곧 후한 말 부여왕 구태(仇台)의 후손이고 마한(馬韓) 54국으로 백제는 그 중 하나였다. 초기에 백가(百家)가 바다를 건너왔기 때문에 이름을 백제라 하였다. 후에 점점 강대하여 여러 소국을 병합했다. 진나라 때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경략해 소유하니 백제 또한 요서와 진평을 경략해 소유하였다. 진나라 이후부터 여러 나라를 병탄하여 마한의 옛 땅을 점거하여 소유했다. 그 나라는 동서로 400리이고 남북으로 900리이며 남쪽으로 신라와 접하고 북쪽으로 1,000여 리 거리에 고구려가 있고 서쪽으로 큰 바다로 막혔고 작은 바다의 남쪽에 있다.”

그리고 백제가 점령했다는 요서군과 진평군의 위치에 대해 주석으로 “당나라의 유성과 북평 사이에 있다.(唐柳城北平之間)”고 적고 있어 『통전』의 기록과 일치한다. 그렇다면 당나라의 유성군과 북평군 두 곳의 위치는 어디일까? 이 두 곳의 위치를 알면 백제 요서군의 위치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먼저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 당나라 북평군의 위치를 찾아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북위에서 설치했고 수나라 초기에 폐지했으나 얼마 안 가 다시 북평군이라 했다. 당나라 초기에는 평주(平州)라 불렀다가 후에 북평군이라 했고 얼마 후 또 평주로 고쳤다. 오늘날 직예 노룡현의 치소이다.(後魏置隋初廢尋復曰北平郡唐初曰平州後仍曰北平郡尋又改爲平州今直隸盧龍縣治)”

북평군의 위치는 결국 오늘날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유성군의 위치는 어디일까? 『구당서』 《지리지》 영주상도독부(營州上都督府)의 기록을 보도록 하자.

“영주상도독부는 수나라의 유성군(柳城郡)으로 무덕(武徳) 원년(서기 618년)에 영주총관부(營州總管府)로 고치고 요주(遼州)와 연주(燕州) 2주를 거느리게 했고 유성(柳城) 1현을 거느리게 했다. (중략) 옛날에 거느리던 현은 하나였으며 호는 1,031호이고 인구는 4,732명이다. 천보 연간에는 호가 997호였고 인구는 3,789명이었으며 장안에서 동북쪽으로 3,589리에 있고 낙양에서 2,910리에 있었다.”

즉, 당나라 유성군이란 곧 영주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영주에 속한 유성현이란 곳은 수나라 시절엔 요서군의 속현이었다. 즉, 수나라의 요서군이 수나라 말기에 유성군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그리고 당나라 초기에 영주로 이름이 바뀐 것이다. 『수서』 《지리지》 요서군 유성현의 기록도 살펴보도록 하자.

“유성현 : 북위에서 영주(營州)를 화룡성(和龍城)에 설치하고 건덕군(建德郡), 기양군(冀陽郡), 창려군(昌黎郡), 요동군(遼東郡), 낙랑군(樂浪郡), 영구군(營丘郡) 등 군과 용성현(龍城縣), 대흥현(大興縣), 영락현(永樂縣), 대방현(帶方縣), 정황현(定荒縣), 석성현(石城縣), 광도현(廣都縣), 양무현(陽武縣), 양평현(襄平縣), 신창현(親昌縣), 평강현(平剛縣), 유성현(柳城縣), 부평현(富平縣) 등 현을 거느리게 했다. 북제는 오직 건덕군과 기양군 2군과 영락현, 대방현, 용성현, 대흥현 등 현만 남기고 그 나머지는 모두 없앴다. 개황(開皇) 원년(서기 581년)에는 오직 건덕군 1군과 용성현 1현만 남겼고 그 나머지는 모두 폐지했고 얼마 후 또 군도 폐지했고 현을 용산(龍山)으로 고쳤다. 개황 18년(서기 598년)에 유성으로 고쳤다. 대업(大業) 초에 요서군을 설치했다. 대방산(帶方山), 독려산(秃黎山), 계명산(雞鳴山), 송산(松山)이 있고 유수(渝水)와 백랑수(白狼水)가 있다.”

우리는 여태껏 수나라와 당나라의 유성을 오늘날 요령성 조양시로 알고 있었지만 과연 그곳이 맞는지는 검증을 해봐야 한다. 과연 유성은 정말로 요령성 조양시였을까?

고구려 요동성은 하북성 진황도시 부근에 있었다

먼저 『삼국사기』와 『자치통감』에 따르면 서기 645년 제1차 고․당 전쟁 당시 당나라 장수 이세적(李世勣)이 유성(柳城)을 출발해 형세를 크게 벌이고 회원진(懷遠鎭)으로 갈 것처럼 하다가 군사를 숨겨서 북쪽으로 용도(甬道)로 진군했다는 기록이 있다.

국사학계에서는 유성의 위치를 요령성 조양시라고 하고 고구려의 요동성이 있는 곳을 요령성 요양시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지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삼국사기』와 『자치통감』은 고구려 요동성이 곧 한나라 요동군의 양평성이라고 적고 있다. 이 요동군 양평현의 위치에 대해서도 국사학계나 중국 사학계나 모두 요령성 요양시라고 입을 맞춘 듯이 말하고 있다.

국사학계와 중국 사학계는 한나라 요동군 양평현의 위치가 오늘날 요령성 요양시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정작 당나라 왕자 이현은 한나라 요동군 양평현은 오늘날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서남쪽에 있다고 기록했다. 과거 이곳엔 고죽국이 있었는데
국사학계와 중국 사학계는 한나라 요동군 양평현의 위치가 오늘날 요령성 요양시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정작 당나라 왕자 이현은 한나라 요동군 양평현은 오늘날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서남쪽에 있다고 기록했다. 과거 이곳엔 고죽국이 있었는데 『수서』 《배구열전》엔 "고구려의 땅은 본래 고죽국이다"고 말한 기록이 남아 있다.(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하지만 『한서』 《지리지》나 『후한서』 《군국지》 모두 요동군엔 양평현도 있고 요양현도 있다고 기록했다. 그러므로 한국, 중국 양국 사학계의 주장은 입론부터 성립되지 않는다. 또한 『후한서』 권 74 하 《원소(袁紹)․유표(劉表) 열전》 제 64 하에 적힌 요동군의 치소 양평현에 관한 주석에도 양평이 요령성 요양시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 기록은 다음과 같다.

“양평은 현이며 요동군에 속해 있었고 옛 성은 오늘날 평주 노룡현 서남쪽에 있다.(襄平縣屬遼東郡故城在今平州盧龍縣西南)”

이 주석을 단 사람은 당나라의 왕자 이현(李賢)이란 인물이다. 그러므로 위 기록에 나온 ‘오늘날’은 당나라 시절을 말하는 것이다. 당나라의 평주 노룡현 서남쪽에 옛 한나라 양평성이 있었다는 뜻이다. 평주 노룡현이란 곳은 앞서 언급한 대로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을 말한다.

즉, 실제 한나라 요동군의 위치는 요령성 요양시 일대가 아닌 하북성 진황도시 일대에 있었고 그곳에 고구려 요동성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사학계는 어째서 자국 영토를 줄이는데 앞장서고 있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고구려 모본왕 때인 서기 49년에 고구려는 후한의 우북평군과 어양군, 상곡군, 태원군까지 쳐들어갔는데 이 때 후한의 요동태수 채동이란 인물이 부랴부랴 화친을 청해 돌아갔다. 그런데도 요동군이 과연 요하 동쪽에 있었을까?(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고구려 모본왕 때인 서기 49년에 고구려는 후한의 우북평군과 어양군, 상곡군, 태원군까지 쳐들어갔는데 이 때 후한의 요동태수 채동이란 인물이 부랴부랴 화친을 청해 돌아갔다. 그런데도 요동군이 과연 요하 동쪽에 있었을까?(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후에 더 자세히 다룰 예정이지만 『삼국사기』와 『후한서』에 따르면 고구려 모본왕(慕本王) 때 고구려가 한나라의 우북평군(右北平郡)과 어양군(漁陽郡), 상곡군(上谷郡), 태원군(太原郡) 일대를 습격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이 때 요동태수 채동(蔡彤)이란 인물이 화친을 제의해 화친했다고 한다.

우북평군은 하북성 당산시 풍윤현 일대에 해당하고 어양군은 북경시 밀운구, 상곡군은 하북성 장가구시 회래현, 태원군은 산서성 태원시를 말한다. 즉, 오늘날 북경시 일대와 산서성 태원시 일대를 고구려가 습격했다는 것인데 왜 멀리 떨어진 요하 동쪽의 요동군을 다스리는 요동태수가 대표로 나서서 화친에 나선 것인가? 이는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요동군의 위치를 당나라 왕자 이현의 주장대로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로 옮겨놓고 보면 명쾌하게 설명이 된다. 당시 고구려가 습격한 우북평군과 어양군, 상곡군, 태원군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에 요동태수 채동이 대표로 나서서 화친에 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은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따르면 은나라의 충신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나라 고죽국(孤竹國)이 있었던 곳이라 한다. 그런데 마침 『수서』 권 67 열전 32 《배구열전》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고려의 땅은 본래 고죽국입니다. 주나라 대 이래로 기자(箕子)가 봉을 받았고 한나라 때에 땅을 나누어 3군으로 삼았으며 진 씨 역시 요동을 거느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신하가 되지 않고 별도의 외역(外域)으로 있어 선제께서 골치를 아파하시다 정벌하고자 하신 것입니다.(高麗之地本孤竹國也周代以之封于箕子漢世分爲三郡晉氏亦統遼東今乃不臣別爲外域故先帝疾焉欲征之久矣)”

즉, 고구려의 땅이 본래 고죽국의 땅이었다는 것인데 마침 고죽국이 있었던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에 한나라 요동군이 있었고 요동군의 치소 양평현이 곧 고구려 요동성이 됐다. 과연 이것이 우연일까? 그렇다고 보기 어렵다. 결국 고구려 요동성은 요령성 요양시 일대가 아닌 하북성 진황도시 일대에 있었다고 봐야 한다.

요동성이 이곳에 있었다면 고구려의 서쪽 국경 역할을 했던 요수(遼水) 또한 지금의 요하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먼저 『한서』《지리지》 요동군 조를 보면 망평현(望平縣)의 주석에 대요수가 나온다. 대요수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대요수가 요새 바깥에서 나와 남쪽으로 안시(安市)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1,250리를 간다.(大遼水出塞外南至安市入海行千二百五十里)”

아마도 요동군 망평현이 대요수의 발원지 근처에 있었고 그 남쪽에 요동군 안시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소요수 혹은 요수라는 강이 『한서』《지리지》 현도군 조 고구려현의 주석에 나와 있는데 그 기록은 이렇다.

“요산(遼山)에서 요수가 나와 서남쪽으로 요대(遼隊)에 이르러 대요수로 유입된다. 또 남소수(南蘇水)가 있는데 서북쪽으로 요새 바깥을 지난다.(遼山遼水所出西南至遼隊入大遼水又有南蘇水西北經塞外)”

요수 즉, 소요수는 요산에서 발원해 요동군 요대현을 지나 대요수로 유입되는 강으로 대요수의 지류임을 알 수 있다. 남소수는 아마도 고구려 남소성(南蘇城)과 관련이 있는 강으로 보인다. 한편, 강의 흐름을 기록한 책인 『수경(水經)』에서는 대요수와 소요수의 흐름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먼저 대요수의 기록이다.

“대요수는 요새 바깥의 백평산(白平山)을 나와서 동남쪽으로 요새로 들어온다. 요동 양평현(襄平縣) 서쪽을 지나고 또 동남쪽으로 방현(房縣) 서쪽을 지난다. 또 동쪽으로 안시현(安市縣) 서쪽을 지나 남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만일 이 강이 지금의 요하라고 한다면 우선 길이부터 안 맞다. 대요수는 『한서』《지리지》에 따르면 1,250리라고 했는데 현대 도량형으로 환산해도 500km에 불과하다. 중국인 학자 진몽가의 말에 따르면 한나라 때 1리는 현대 미터법으로 대략 417.53m 정도였다고 하니 실제 대요수의 길이는 522km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만주 요하의 길이는 그보다 약 3배 정도 긴 1,400km 정도이니 요하가 대요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 대요수는 요새 밖에서 발원한 후 백평산을 지나 동남쪽으로 꺾어 다시 요새로 들어온 후 요동군의 양평현과 방현, 안시현을 지난다고 했다. 그러나 요령성의 요하는 계속 동쪽으로 흐르다가 지금의 요동과 요서의 경계가 된 후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갈 뿐이다. 그러므로 대요수는 절대 요하가 될 수 없다.

그런가 하면 단국대학교 윤내현 명예교수 등 일부 비주류 강단사학자들은 대요수를 난하(灤河)로 비정했는데 이 역시도 조금 맞지 않아 보인다. 난하는 길이가 800km 정도로 사서에 기록된 것보다 다소 길고 또 잎맥 형태로 자잘한 지류들이 많아 딱히 소요수로 비정할 수 있는 강이 보이지 않는다.

사서와 지리서의 기록을 종합해 봤을 때 삼국시대 당시 요수라고 불렸던 강은 만주의 요하가 아니라 지금의 북경시 부근을 흐르고 있는 조백하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지도 출처 : 황순종 저,
사서와 지리서의 기록을 종합해 봤을 때 삼국시대 당시 요수라고 불렸던 강은 만주의 요하가 아니라 지금의 북경시 부근을 흐르고 있는 조백하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지도 출처 : 황순종 저, 『식민사관의 감춰진 맨 얼굴』)

요수를 대요수와 소요수로 구분한 것은 누가 봐도 쉽게 알 수 있는 큰 강과 작은 강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러므로 본류인 강과 지류 중에서 가장 크고 쉽게 인식할 수 있는 지류를 가리켜 대요수와 소요수로 부른 것이라 보는 게 합리적이다. 그런 조건에 맞는 강으로 지금의 북경시 일대를 흐르는 조백하(潮白河)가 있다.

조백하의 길이는 약 458km 정도로 대요수의 1,250리 길이라는 사서의 기록과 거의 비슷하다. 또 조백하의 지류로 누구나 쉽게 인식할 수 있는 조하(潮河)가 있다. 『수경』에 기록된 소요수의 기록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또 현도(玄菟) 고구려현에 요산이 있는데 소요수가 나오는 곳이다. 서남쪽으로 요대현에 이르러 대요수에 들어간다.(又玄菟高句麗縣有遼山小遼水所出西南至遼隊縣入于大遼水也)”

소요수가 서남쪽으로 요대현에 이르러 대요수로 들어간다고 했는데 조하는 정확히 서남쪽으로 흘러 북경시 밀운(密雲)현 부근에서 백하로 들어가 조백하를 이룬다. 또 대요수가 동남쪽으로 흐른다는 사실도 백하, 조백하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대요수는 요동군의 양평현, 방현, 안시현을 지난다고 했는데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는 한나라 요동군 안시현의 위치를 북경시 밀운현 동북 50리라고 표기해 놓았다. 그 책은 중화민국 때 기록인데 중화민국 때 1리는 500m 정도이다. 그러므로 북경시 밀운현에서 동북쪽으로 25km 지점에 한나라 요동군 안시현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조백하는 정확하게 북경시 밀운현 지역을 통과한다. 이로 볼 때 대요수가 백하이고 소요수는 백하에 유입되는 조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한나라의 요동군도 대요수였던 백하 동쪽 지역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소위 한사군 중 하나인 현도군 역시 소요수였던 조하 상류 지역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백제 요서군의 위치는 북경시 일대

고․수 전쟁과 고․당 전쟁이 일어난 주요 전역(戰域)인 요동 지역이 오늘날 하북성 진황도시 일대라고 했으니 수나라와 당나라의 유성군은 그보다 서쪽에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요수가 지금의 조백하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으니 결국 실제 유성군의 위치는 조백하 서쪽인 오늘날 북경시와 그 서쪽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끝으로 『수서』 지리지 요서군 유성현의 주석을 보면 대방산(帶方山), 독려산(秃黎山), 계명산(雞鳴山), 송산(松山)이 있고 유수(渝水)와 백랑수(白狼水)가 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런데 이 산들의 위치를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 찾아보면 대방산과 독려산의 위치는 나오지 않지만 계명산은 차하르성 선화현 동남쪽에 있다고 표기하고 있고 현재도 하북성 장가구시 회래현에 남아 있다.

회래현은 선화현 동남쪽에 있으니 정확하게 일치한다. 송산 역시 그 북쪽인 장가구시 적성(赤城)현 용관진(龍關鎭) 일대에 있다고 표기하고 있다. 이상으로 정리해 볼 때 실제 유성군의 위치는 하북성 장가구시 회래현과 그 동쪽인 북경시 연경(延慶)현 일대에 걸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곳이 수나라, 당나라의 영주였고 유성이었던 것이다. 한나라의 요서군 역시 이 일대에 있었다. 실제로 『후한서』 《군국지》의 기록을 보면 장가구시 회래현 일대에 있었던 상곡군은 낙양에서 3,200리 거리에 있었고 요서군은 3,300리 거리에 있었다고 적혀 있어 두 군 간 거리는 100리밖에 차이가 안 난다. 이것은 곧 한나라의 요서군이 상곡군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백제 요서군의 위치는 당나라 유성군과 북평군 사이였다고 했으니 역시 북경시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으로 생각된다. 많은 이들이 그간 요동군과 요서군이라고 하면 무조건 요하 동쪽과 서쪽만을 생각하고 있기에 선뜻 납득하기 힘들겠지만 이젠 그 낡은 상식을 깨뜨리고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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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봉 2024-01-27 05:42:23
굿모닝 충청에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기자가 있었다니 놀랍다.
다만 조금 더 서쪽으로 이동시켰더라면 완벽한 글이 될 뻔했다.
즉 진황도 노룡이 아닌 지금의 북경을 요동으로 비정하고,
조백하가 아닌 영정하를 요수로 비정하고,
영정하 서쪽 방산 부근을 요서로 보았더라면 아주 정확하고 좋은 글이 되었을 것인데,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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