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백제 이야기 ③] 백제 진평군의 위치는 어디인가?
[대륙백제 이야기 ③] 백제 진평군의 위치는 어디인가?
진평군 위치는 광서장족자치구 남령시 일대
  • 조하준 기자
  • 승인 2024.01.26 09:3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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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진평군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중국 광서장족자치구 남령시 옹령구의 백제향.(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백제의 진평군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중국 광서장족자치구 남령시 옹령구의 백제향.(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백제와 북위 간의 전쟁을 알아보기 전에 먼저 백제 요서군의 위치를 앞선 기사를 통해 알아봤다. 그리고 그 요서군의 위치는 익히 알려진대로 요하 서쪽 지역이 아닌 지금의 북경시 일대를 말한다는 것 또한 알아봤다. 이번에는 진평군의 위치를 한 번 알아볼 필요가 있다.

과거의 학자들 대부분은 백제 진평군의 위치를 요서군과 마찬가지로 으레 요령성 서쪽 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지는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짚고 넘어갈 점은 중국 25사 지리지엔 진평군이란 곳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요서군은 진나라 때엔 유주(幽州)에 속했고 북위 때엔 평주(平州)에 속했다는 게 기록되어 있지만 그 인근에 있었다는 진평군의 기록은 전혀 없다. 이걸 어떻게 봐야 할까?

진평군의 위치는 중국 광서장족자치구

아마도 진평군이란 군은 중국에서 붙였던 지명이 아니라 백제에서 붙였던 지명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송서』《백제전》은 백제의 대륙 영토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1,000여 리에 있었다. 그 후 고구려가 요동을 다스렸고 백제는 요서를 다스렸다. 백제가 다스린 곳을 진평군(晉平郡) 진평현(晉平縣)이라 한다.(百濟國本與高麗俱在遼東之東千餘里其后高麗略有遼東百濟略有遼西百濟所治謂之晉平郡晉平縣)”

이 기록만 보면 백제가 마치 고작 현 1개를 점령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기록은 또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백제가 중국의 진평현을 차지한 후에 그 현의 이름을 따서 군을 신설하고 그 이름을 진평군이라고 했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그리고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엔 진평군의 기록은 없지만 진평현의 위치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남조의 송나라가 설치했고 남제 때까지 이어졌지만 지금은 없다. 마땅히 광서의 경내에 있었다.(南朝宋置南齊因之今闕當在廣西境)”

남조의 송나라 때 진평현이 설치됐고 그것이 남제 때까지 이어졌지만 없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다른 나라에 점령당했다는 것을 중국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중국은 항상 자신이 이긴 전쟁은 잔뜩 부풀려 기록하지만 진 전쟁은 절대 졌다고 깨끗하게 인정하지 않는 버릇이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그리고 그 진평현이 광서의 경내에 있었다고 했는데 이는 현재의 광서장족자치구를 말한다. 이 광서장족자치구의 진평현과 백제 진평군 진평현은 아무런 관계가 없을까? 그런데 마침 그 광서장족자치구의 남령(南寜)시 옹령(邕寜)구에 백제향(百濟鄕)이란 지명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과연 이것이 우연일까?

즉, 중국 광서장족자치구 남령시 옹령구 백제향이 곧 백제가 송나라를 쳐서 점령한 진평현이었고 백제는 이곳에 진평현의 이름을 따 진평군을 설치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 생각된다. 백제 요서군의 위치는 북경시 일대였고 진평군의 위치는 광서장족자치구 남령시 일대였던 것이다.

이미 국내에서도 단국대학교 윤내현 교수가 이곳이 백제 진평군이라고 주장한 바 있었고 KBS 역사스페셜에 출연했던 중국 중앙민족대학교 황유복 교수 또한 이곳이 백제 진평군이라고 주장한 바 있었다. 또 백제향은 백제허(百濟墟)라고도 부르는데 이것은 무슨 뜻인가?

역시 역사스페셜에 출연했던 중국 사회과학원 역사지리연구소장 진가위 교수는 “‘허(墟)’라는 이름은 오래된 성을 말하는 것으로, 성이 오래되어 무너지면 그것을 ‘허’라고 부르는데 이로 볼 때 백제허라고 불리는 이 지역은 실제로 백제 사람들이 살았을 것이다.”고 주장했다.

즉, 중국의 지명 중에 ‘허(墟)’자가 들어가는 지명은 오래된 성이 있었던 지역이란 뜻이다. 그 대표적인 예시로 은나라의 수도였던 은허(殷墟)가 있다. 우리가 보통 ‘은나라’라고 부르는 나라는 실제 그 국호가 상(商)이었다. 즉, 은나라가 아니라 상나라라고 해야 맞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상나라의 수도가 바로 ‘은(殷)’이었다. 상나라가 멸망한 후에 도읍지인 은이 폐허가 되어 ‘은허’란 이름으로 불린 것이다.

그런 점을 볼 때 백제허 또한 은허와 마찬가지로 본래 백제의 옛 성이 있었으나 백제 멸망 후 그 성이 오래되어 무너지고 백제허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또 그 밖에도 그 지역 노인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아주 오래 전에 산동 지방에서 내려와 지금 이곳에 정착했다는 전설을 갖고 있었다. 그 뿐 아니라 이 마을 주민들은 이 곳 지명을 중국어 발음인 ‘바이찌썅(Bǎijǐxiāng)’ 혹은 ‘바이찌쒸(Bǎijǐxū)’라고 부르지 않고 ‘대백제’ 혹은 ‘대박제’로 부르고 있었다.

중국 광서장족자치구 백제향에서 사용되는 맷돌과 외다리방아. 맷돌의 형태는 전라도 지역의 맷돌과 매우 유사하다. 또 한반도는 쌍다리 방아를 쓰는데 전라도 지역과 일본 열도에서는 외다리방아를 쓴다. 전라도 지역과 일본, 백제향 지역에서 외다리방아를 쓴다는 것은 세 지역이 어떤 연결 고리가 있음을 암시한다. 그 연결 고리는 바로 백제라는 대제국이다.(출처 : KBS 역사스페셜)
중국 광서장족자치구 백제향에서 사용되는 맷돌과 외다리방아. 맷돌의 형태는 전라도 지역의 맷돌과 매우 유사하다. 또 한반도는 쌍다리 방아를 쓰는데 전라도 지역과 일본 열도에서는 외다리방아를 쓴다. 전라도 지역과 일본, 백제향 지역에서 외다리방아를 쓴다는 것은 세 지역이 어떤 연결 고리가 있음을 암시한다.(출처 : KBS 역사스페셜)

그리고 이 지역이 백제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은 또 있다. 그곳 주민들의 집을 살펴보면 입식 구조의 중국 부엌과는 다른 나지막한 부뚜막이 자리 잡고 있었다. 꼭 우리의 부뚜막과 비슷한 형태였다고 한다. 그들이 선대로부터 물려받았다는 맷돌은 전라도 지역의 맷돌과 비슷하게 생겼다. 또 외다리방아도 특이한 사항이다.

우리나라 전역에서는 쌍다리 방아를 주로 쓴다. 그런데 유독 전라도 지역과 일본에서는 외다리방아를 썼다. 이것은 세 지역이 어떤 연결 고리가 있음을 암시한다. 그 연결 고리가 바로 백제 아니겠는가? 이들은 아직도 백제의 생활 문화를 편린으로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마을 주민 말에 의하면 자신들은 본래 아주 먼 옛날에 산동 지방으로부터 왔다고 한다. 장사하러 왔다는 이야기도 있고 전쟁 때문에 왔다는 말도 있다고 한다. 이로 볼 때 660년에 산동성 지역에서 백제가 멸망하고 일부 사람들이 이곳으로 내려와 부흥운동을 전개했을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 있다.

반론과 재반박

물론 이에 대한 반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순천향대학교의 박현규 교수란 인물은 백제허의 허(墟)는 옛 터가 아니라 장터를 뜻하는 단어이며 이 마을은 청나라 때인 1764~1820년 사이에 건립되었다고 주장하며 그 전엔 사람이 살지 않았던 곳으로 추정했다. 또 이 ‘백제’란 말은 우리의 옛 왕조 백제가 아니라 장족의 말을 음차한 것이라 주장했다.

그러면서 『광서장어지명선집』과 『옹녕현지』를 들어 백제허의 지명은 ‘보습날(犁頭口)’과 닮은 촌락 지형에서 따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장족 언어로 '백(百)'은 '구(口=날)'이고, '제(濟)'는 '리두(犁頭=보습)'라는 뜻이란 것이다. 따라서 백제허란 이름은 우리의 백제와 관련이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는 결국 중국 측의 일방적인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한 것이 아닌지 우려스러운 부분이다. 중국은 예부터 우리와 관련이 있는 지명들을 동북쪽으로 밀어내거나 연혁을 조작하기도 했고 혹은 억지로 비슷한 말을 끌어와서 견강부회(牽强附會)하는 행태를 자주 벌였다.

예를 들자면 『금사』 권 24 지 5 지리 상 상경로(上京路) 편에 적힌 금나라 국호의 어원은 이렇다. 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

“상경로는 곧 해고(海古)의 땅으로 금나라의 옛 땅이다. 나라 말에 금을 ‘안출호(按出虎)’라 했는데 안출호수(按出虎水)의 근원이 이곳인데 금원의 이름으로 인해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대개 이것에서 취했다.(上京路即海古之地金之舊土也國言金曰按出虎按出虎水源於此故名金源建國之號蓋取諸此)”

즉, 금나라 상경로에서 ‘안출호수’란 강이 발원하는데 안출호가 여진어로 금이란 뜻이므로 그것에서 국호를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흠정만주원류고』는 두 책의 설명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했다. 『흠정만주원류고』에 적힌 금나라의 어원은 이렇다.

“『통고』와 『대금국지』에는 모두 신라로부터 왔으며 성은 완안 씨(完顔氏)라고 되어 있다. 살펴보건대 신라는 고려와 더불어 옛 땅이 서로 맞물려 있어서 『요사』나 『금사』에서는 왕왕 두 나라의 호칭을 구별하지 않고 쓰고 있다. 사전(史傳)의 기록으로 고찰하여 보건대 신라의 왕은 김(金)씨 성으로 수십 세를 서로 전하여 온 것인즉,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로부터 왔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건국한 나라의 이름 또한 당연히 이것을 취하였다. 『금사』 지리지에서 나라 안에 금이 있는 물줄기가 있어 나라 이름으로 삼았다고 하는 것은 사가(史家)들이 억지로 끌어다 붙인 말이며 전거로 삼기에 부족할 따름이다.”

즉, 금나라의 국호인 ‘금(金)’은 신라의 국성(國姓)인 김 씨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이 기록엔 나와 있지 않지만 청나라 학자들이 금나라의 국호가 ‘안출호’에서 왔다는 주장을 부정한 이유는 금은 만주어로 아이신(愛新)이지 ‘안출호’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다시 말해 금나라의 국호가 신라 김 씨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 사실이라고 본다면 『금사』의 기록은 신라와 금나라 사이의 연관성을 부정하기 위해 억지로 갖다 붙인 기록이라 볼 수밖에 없다.

신라 천주절도사 왕봉규

또 하나의 예시를 들면 광서장족자치구에 백제라는 지명이 있다고 했는데 재미있게도 복건성 용암(龍巖)시에 신라(新羅)구라는 지명이 있다. 일찍이 연암 박지원의 저서인 『박연암집』은 신라가 복건성의 천주(泉州)와 장주(漳州) 일대를 점령해 차지했다고 주장한 바 있는데 복건성 용암시 신라구는 천주시의 서북쪽에 위치해 있다.

단재 신채호 선생 또한 『조선상고사』에서 이 『박연암집』의 기록을 들어 신라의 전성기였던 진흥왕 시절에 백제와 마찬가지로 해외에 진출해 일시적으로 이곳을 점령한 것으로 보인다고 간접적으로 인정한 바 있다. 그 밖에 진위 여부 논란에 휩싸여 있는 『환단고기』에도 고구려 문자명왕(文咨明王)이 신라인들을 복건성 천주로 강제 이주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물론 복건성 용암시 신라구에 대해서도 중국 측은 신라와의 관계를 부정하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지는 따져볼 필요가 있다. 후삼국시대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그 중에 속된 말로 ‘갑툭튀’ 했다가 갑자기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 하나 있다. 그 사람은 바로 천주절도사(泉州節度使) 왕봉규(王逢規)란 인물이다.

이 왕봉규란 인물은 우리 사서에선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명왕(景明王) 8년(서기 924년)의 기록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가 처음 등장한 기록은 이렇다.

“봄 정월에 사신을 후당(後唐)에 보내 조공하였으며 천주절도사(泉州節度使) 왕봉규(王逢規)도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春正月遣使入後唐朝貢泉州節度使王逢規亦遣使貢方物)”

신라가 서기 924년 음력 1월에 후당에 조공을 할 때 천주절도사 왕봉규란 인물도 같이 사신을 보내 토산품을 바쳤다는 기록이다. 그리고 그는 3년 후인 경애왕(景哀王) 3년(서기 927년)에 다시 등장하는데 그 때의 기록은 이렇다.

“당나라의 명종(明宗)이 권지강주사(權知康州事) 왕봉규를 회화대장군(懷化大將軍)으로 삼았다. 여름 4월에 지강주사(知康州事) 왕봉규가 임언(林彦)을 후당에 보내 조공하니 명종은 중흥전(中興殿)으로 불러 물품을 하사하였다.(唐明宗以權知康州事王逢規懷化大將軍夏四月知康州事王逢規遣使林彦入後唐朝貢明宗召對中興殿賜物)”

924년에 천주절도사였던 왕봉규는 3년 후엔 권지강주사로 직함이 바뀌었고 후당으로부터 회화대장군이란 벼슬을 받았다. 그리고 그 해 4월에 다시 왕봉규가 임언이란 인물을 후당에 사신으로 보내 조공을 하니 후당 황제 명종이 하사품을 내렸다는 기록이다. 이 왕봉규란 인물은 중국의 『신오대사』와 『책부원구』란 책에도 등장한다.

기록을 통해 볼 때 왕봉규는 신라의 천주와 강주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던 인물로 보인다. 만약 그가 신라인이 아니라면 굳이 『삼국사기』에 기록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국사학계에선 왕봉규의 근거지인 천주는 지금의 경상남도 의령군이고 강주는 경상남도 진주시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927년에 고려가 강주를 공격해 점령한 기록을 들어 아마도 그 때 왕봉규가 제거됐을 것이란 주장도 하고 있다.

하지만 천주가 경상남도 의령군이라고 주장한 근거는 정말로 부실하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경남 의령에 해당하는 의상현(宜桑縣)의 다른 이름이 천주현(泉州縣)이므로 경남 의령이 천주라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국사학계는 김부식이 삼국시대 지명 중 그 위치를 알 수 없다고 표시한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에 ‘천주(泉州)’가 있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저술하면서 삼국시대 지명 중 그 위치를 알 수 없는 곳을 모두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으로 기록했는데 그 개수가 무려 360여 곳에 달한다. 만약 천주현과 천주가 동일한 지역이었다면 김부식이 굳이 그런 기록을 남기진 않았을 것이다.

신라 경명왕 때 갑자기 등장한 천주절도사 왕봉규의 세력권으로 추정되는 지역. 그는 후삼국이 일어났던 한반도가 아닌 중국 복건성~광동성 지역에서 활동했던 인물로 보인다. 그가 무너진 후 이 지역은 완전히 중국 왕조의 영토로 병합된 것으로 보인다.(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신라 경명왕 때 갑자기 등장한 천주절도사 왕봉규의 세력권으로 추정되는 지역. 그는 후삼국이 일어났던 한반도가 아닌 중국 복건성~광동성 지역에서 활동했던 인물로 보인다. 그가 무너진 후 이 지역은 완전히 중국 왕조의 영토로 병합된 것으로 보인다.(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국사학계의 주장대로라면 자갈치시장으로 유명한 부산 중구 남포동과 북한의 남포시는 똑같이 한자로 ‘南浦’라고 쓰는데 그럼 부산 남포동과 북한 남포시를 같은 곳이라고 여겨도 되는 것일까? 국사학계의 주장은 부산 남포동과 북한 남포시를 같은 곳이라고 우기는 수준이다.

왕봉규의 직함이었던 천주절도사가 자칭이라고 할지라도 최소한 ‘절도사(節度使)’를 자칭했다면 그만한 세력을 거느리고 있었기에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고작 현의 이름을 따서 절도사를 자칭했는지는 많이 의문스럽다. 또한 절도사란 관직은 고려시대 이전엔 우리 역사 상 쓰인 예가 없었고 오로지 중국에서만 썼던 이름이었다.

또한 정말 국사학계의 주장대로 왕봉규가 927년에 고려에 의해 제거되었다면 『고려사』에 왕봉규의 이름이 한 번쯤은 언급되어야 할 것인데 정작 『고려사』엔 왕봉규란 이름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런 점으로 볼 때 후삼국시대가 한창 활발하게 진행 중이었던 곳과 왕봉규의 세력권이 별개의 지역이 아니었나 하는 의심이 든다.

즉, 927년에 고려가 점령한 강주 지역과 왕봉규의 세력권이었던 강주는 이름만 같을 뿐 서로 다른 지역이라는 것이다. 927년에 고려가 점령한 강주는 아마도 지금의 경상남도 진주시일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왕봉규가 차지했던 강주는 경상남도 진주시가 아닌 다른 곳일 가능성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이로 볼 때 왕봉규의 최초 근거지였던 천주가 국사학계의 주장대로 경상남도 의령군이 아니라 중국 복건성 천주시였을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또한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을 살펴보면 중국 광동성 조경(肇慶)시 덕경(德慶)현이 강주였다고 한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복건성 용암시 신라구는 천주와 강주 사이에 위치해 있다.

왕봉규가 활동했던 시절에 우리나라는 후삼국으로 분열되어 있었는데 중국 또한 당나라가 무너지고 5대 10국으로 분열되어 있었던 혼란기였다. 왕봉규가 대륙의 혼란기를 틈 타 일시적으로 복건성 천주시에서 광동성의 강주까지 점령해 독자 세력을 형성했을 수도 있고 본래 그 지역이 신라 영토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왕봉규가 단시간에 복건성에서 광동성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다 독자 세력을 형성한 것을 보면 그가 일종의 해적처럼 한반도에서 건너와 점령했다기보다는 본래 이 지역이 신라 영토였을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이미 조선시대 때 연암 박지원이 복건성 천주 지역이 신라 영토였다고 주장했지 않던가?

붉은색 원으로 칠한 곳이 왕봉규의 세력권이 있었던 지역이다. 당나라가 무너진 후 대륙은 혼란기에 빠졌는데 이 때 당나라의 옛 땅과 껍질만 남은 대륙신라 지역으로 군웅들이 기어 들어가 할거하면서 5대 10국 시대가 펼쳐지게 된다. 왕봉규 역시 이 때 잠시 일어난 독자 세력이었으나 결국 버티지 못하고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지도 출처 : 네이버 이미지)
붉은색 원으로 칠한 곳이 왕봉규의 세력권이 있었던 지역이다. 당나라가 무너진 후 대륙은 혼란기에 빠졌는데 이 때 무너진 당나라의 옛 땅과 껍질만 남은 대륙신라 지역에서 군웅할거가 이어지면서 5대 10국 시대가 펼쳐지게 된다. 왕봉규 역시 이 때 복건성 지역에서 잠시 일어난 독자 세력이었으나 결국 버티지 못하고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지도 출처 : 네이버 이미지)

천주시가 있었던 복건성 지역에는 5대 10국의 10국 중 하나인 민(閩)이란 나라가 있었고 강주가 있었던 광동성 지역에는 10국 중 하나인 남한(南漢)이란 나라가 있었다고 한다. 『고려사』엔 왕봉규의 기록이 없고 그의 세력권이 후삼국이 있었던 곳과는 별개의 지역에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하마도 그는 고려가 아니라 민과 남한 사이에서 샌드위치처럼 끼어 있다가 제거됐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군웅인 그가 924년과 927년에 뜬금없이 후당에 조공을 한 것도 민과 남한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어 있어 위기에 몰리게 되자 후당의 힘을 빌리려는 뜻에서 추진한 것으로 보인다. 왕봉규가 정말로 국사학계의 주장대로 한반도 서부 경남 지역에서 활동했다면 굳이 후당에 사신을 보낼 만한 이유가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후당이란 나라는 923년에 세워져 936년에 멸망한 나라이고 주변에는 여러 나라가 난립한 상황이었기에 바다 건너 한반도에서 일어난 일에 개입할 여력도 없었고 도움을 줄 만한 처지도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볼 때도 왕봉규가 활동했던 지역은 서부 경남 지역이 아니라 중국 복건성 지역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왕봉규가 살아 있었을 때까진 그의 세력권이었던 복건성 천주~광동성 강주 지역이 아직 신라의 영토였지만 결국 그의 세력권이 민이나 남한에 병합된 이후엔 완전히 중국의 영토로 넘어간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왕봉규를 비롯해 그곳에 거주했던 신라인들도 결국 세월이 흘러 한족에 동화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견강부회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선 안 돼

복건성 용암시의 신라구는 진(晉)나라 때 진안군(晉安郡)의 속현이었던 신라현(新羅縣)에서 유래된 지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왕봉규란 인물을 통해 복건성 지역과 신라와의 연관성이 드러났다. 따라서 진안군 신라현이자 현재 복건성 용암시의 신라구 또한 우리의 옛 왕조 신라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은 높여주는 것이고 연암 박지원이 아무 근거 없이 신라가 복건성 지역을 차지했다고 주장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본지에서 주장하는 백제 진평군으로 추정되는 지역. 진평군은 중국 광서장족자치구의 남령시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본지에서 주장하는 백제 진평군으로 추정되는 지역. 진평군은 중국 광서장족자치구의 남령시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현재까지도 신라와 복건성 용암시 신라구의 연관성을 부정하며 지명 유래를 조작하고 있다. 이런 사례들을 볼 때 『광서장어지명선집』과 『옹녕현지』 등에 적힌 기록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백제와의 연관성을 부정하기 위해 억지로 비슷한 현지 언어를 갖다 붙여 견강부회한 것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백제향이란 마을이 1764~1820년에 건립된 마을이라 주장하면서 그 이전엔 사람이 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도 박현규 교수의 추정일 뿐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다. 백제와 광서장족자치구 백제향의 관련성을 주장하는 쪽보다 오히려 백제와 관련성을 부정하는 주장 쪽의 근거가 더 빈약해 보인다. 백제 진평군은 중국 광서장족자치구 남령시 일대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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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봉 2024-01-27 05:51:51
삼천포로 빠졌군.
요동이 북경인데, 어떻게 요서를 그 멀리에 비정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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