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의 우리 어원 나들이] 남의 말처럼 들리는 우리말
[정진명의 우리 어원 나들이] 남의 말처럼 들리는 우리말
정진명 시인, 우리말 어원 고찰 연재 '5-우리말’
  • 정진명 시인
  • 승인 2024.03.14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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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깍지협회 회원들과 미국인 댄율 버커스((Daniel M. Burkus, 앞줄 가운데).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굿모닝충청 정진명 시인] 앞서 몇 가지 살펴본 사례처럼, 말은 사람의 무의식 속에 깊이 박혔기 때문에 쉽게 바뀌지도 않고, 쉽게 새겨지지도 않습니다. 이번에는 다른 데서 들어온 말이 우리말을 밀어낸 듯하지만, 잘 보면 우리말이 다른 말을 소화한 경우도 있어, 이를 몇 가지 살펴보겠습니다.

연못을 뜻하는 ‘소’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글 사전에는 소(沼)라고 나옵니다. 한자 말이라고 풀이한 것이죠. 그런데 이것은 우리말입니다. 정철의 “관동별곡”에 ‘화룡쇠’가 나오는데 ‘쇠’는 ‘淵ㅣ’입니다. 따라서 깊은 물웅덩이를 ‘소’라고 한 것입니다. 한자 말 소(沼)는 깊은 물웅덩이가 아니라 물이 잘 빠지지 않아서 고여있는 늪을 말합니다. 일본말로 소는 ‘saha’이어서 같은 뿌리를 보여줍니다. 원래 우리말이었던 ‘소’가 한자 沼가 들어오면서 밀려난 듯한데, 자세히 보면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한자의 뜻까지도 포함하였습니다. 

이와 비슷한 말 중에 ‘신’과 ‘손’도 있습니다. 신은 한자 말입니다. 神. 하느님을 뜻하죠. 그런데 이게 우리말처럼 친숙하게 쓰입니다. 우리가 오랜 세월 빌려 써서 입에 익어서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꼭 입에 익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느님은 ‘하늘’과 ‘님’이 결합한 말입니다. 고등종교인 불교나 기독교가 들어와서 더욱 자리를 확실하게 잡은 말입니다. 특히 잡신과 구별되어 쓰이는 말이죠.

그렇다면 잡신을 뜻하는 우리 말은 무엇일까요? 그게 <손>입니다. ‘손님, 마마’ 같은 말에서 알 수 있죠. 손은 예의를 차려서 맞아야 할 존재입니다. 옛날에 예의를 차려서 맞아야 할 존재는 신이었고, 그것이 사람에게 적용되면 귀한 신분을 지닌 사람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손’과 ‘神’의 소리가 아주 비슷합니다. 그래서 ‘신’이라는 한자가 들어왔을 때 ‘손’이라는 본래의 토착어 소리와 익숙하여 쉽게 우리말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니 신(神)에는 한자 말의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손’이라는 우리 말의 뜻도 들어있습니다.

이렇게 한자와 우리말의 소리가 닮은 데는 사연이 있습니다. 한자는 원래 갑골문에서 시작된 문자이고, 갑골문은 은나라의 지배층이 쓰던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은나라는 원래 동이족이었습니다. 서쪽 오랑캐가 중원으로 들어와서 은나라를 쓰러뜨리고 주나라를 세웠죠. 그것이 중화민족의 시작입니다. 주나라에서는 금문을 썼는데, 이후 중국의 표기 수단으로 자리 잡으며 한문으로 발전합니다. 그래서 한자의 음에는 갑골문의 소리가 들어있고, 갑골문은 우리와 같은 동이족의 언어여서 ‘神’과 ‘손’처럼 서로 닮은 소리를 지니게 된 것입니다. 

‘손’은 신이라는 뜻이니, ‘손님’은 신 같은 존재라는 뜻일 겁니다. 만약 이것을 사람에게 쓴다면 신처럼 극진히 섬겨야 할 존재라는 뜻이죠. 그래서 우리 집을 찾아온 외부 사람을 ‘손님’이라고 하는 겁니다. 얼마나 극진한 마음이 드러나는 말인지 어원을 추적하면 아실 겁니다. 그런데 이 좋은 말이 어느 날 우리 사회에서 매장되고 말았습니다. 일부 장사꾼들 때문입니다. 백화점이나 마트에서 잘 쓰이던 ‘손님’을 일부 대형 매장에서 ‘고객님’으로 대체하면서 벌어진 황당한 일입니다. 

고객(顧客)은 ‘돌아보아야 할 손님’이라는 뜻입니다. 顧는 무엇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리거나, 누군가 불러서 고개를 돌아보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손님’과는 그 뜻이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손님’을 엿 먹이는 방법이 ‘고객’이라고 낮춰 부르는 겁니다. 순우리말 쓰지 않기 운동을 맹렬히 벌이는 국립국어원식으로 표현하자면 고객이란 ‘손님을 낮잡아 이르는 말’입니다. 매장에서 직원들이 말끝마다 손님들을 엿 먹이고 있는데, 손님들께서는 그게 자신들 엿 먹이는 줄도 모르고 좋아합니다. 이런 황당한 용어를 장삿속으로 이용한 장사꾼들은 크게 반성해야 할 일입니다. 

어수룩하여 등쳐먹기 쉬운 손님을 요즘 생긴 말로 ‘호갱’이라고 하는데, ‘호구 고객’의 준말이겠죠? 호구는 어수룩하여 남에게 이용당하기를 잘하는 사람이니, 장사꾼이 ‘손님’을 ‘고객’으로 바꿔 엿 먹이는데도 그 엿을 묵묵히 처먹고 계신 분들이야말로 ‘호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하하. 그러니 호갱이 아니시라면 ‘고객님’이라고 존경하는 척하는 장사꾼들에게 ‘손님’으로 불러달라고 한 마디 따끔하게 말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아니면 고객님이라고 엿 먹이는 매장에는 가지 말든가.

본래 있던 우리 말이 한자가 들어오면서 그 말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 중의 또 하나가 '칸'입니다. 한자로 ‘間’이라 적고 '칸'이라 읽죠. 그런데 ‘헛간, 마구간, 뒷간’ 같은 말들을 보면 이 '간'이 도저히 '사이'(間)를 뜻한다고 믿기 어렵습니다. 언뜻 봐도 이것은 순우리말에 한자 말이 들어오면서 거기다가 붙여버린 것이 분명합니다. 

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 깐에는 될 줄 알았지.” 같이 쓰이는 말이죠. 여기서 ‘깐’은 재보거나 가늠하는 어떤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間으로 기록된 것이 공간을 나눠보는 어떤 기능과 관련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헛간이나 마구간의 ‘간’이 한자말 間이 아님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맛을 표현할 때 쓰는 ‘간’도 이런 것의 연장입니다. ‘간 본다’는 것은, 그 맛이 어떤 상태인지 가늠해 본다는 뜻입니다. ‘간장'은 간을 맞추는 장이라는 말입니다. 맛을 조절하고 가늠해 주는 기능을 하는 음식을 말합니다. ‘가늠하다'라는 말의 ‘가늠’도 ‘간+음’의 짜임을 보입니다. ‘음’은 한눈에 보기에도 명사화 접미사죠. 같은 뿌리를 지닌 말입니다. 한발 더 나아가, ‘깐보다, 깐뵈다, 깐깐하다’로 넓혀 쓰입니다.

이와 달리 우리말처럼 보이는 남의 말도 있습니다. ‘과녁’ 같은 경우가 그렇습니다. 한자말 ‘貫革’인데, 아예 우리말처럼 굳었죠. ‘짐승’도 15세기에는 모든 생명을 가리키는 ‘즁ᄉᆡᆼ(衆生)’이었는데, ‘즘생’을 거쳐서 ‘짐승’으로 음운변화를 겪으면서 사람과 짝을 이루는 말로 자리 잡았습니다. 차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래는 ‘차뎨(次第)’인데, 유음화를 거치면서 ‘차례’가 되었죠. 순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일상생활에서 많이 쓰이는 말들은 지역별로 혹은 개인별로 변화를 많이 겪어서 원래 어떤 말이었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경상도 말 ‘데끼리’는 좋다는 뜻으로 쓰이는데, 이게 무슨 말에서 온 것인지 모르고 쓰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이것은 ‘입춘대길’이라고 할 때의 대길(大吉)에서 온 말입니다. 크게 좋다는 뜻이죠. 경상도 발음으로 ‘대길이’라고 발음하다가 경음화를 거쳐서 변한 말이죠. 

다반사(茶飯事)라는 말도 고려 때 만들어진 말입니다. 워낙 오래 쓰이다 보니 우리말처럼 느껴져서 원래의 뜻을 몰라도 저절로 쓰게 되는 말이죠. 고려 때는 불교가 국교였고, 불교를 따라서 차 문화도 들어 왔습니다. 이것이 일반 여염집까지 퍼져서 차를 내는 습관은 온 나라에 두루 퍼졌습니다. 그 결과 손님을 대접할 때 차를 많이 냈는데,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다반사’가 자리 잡은 것입니다. 

풍속 때문에 생긴 이런 어원들은 제가 다룰 일은 아닙니다. 문화사 연구자들이 해야 할 일인데, 가끔 아는 체를 하고픈 심리가 발동하여 이렇게 나서게 되곤 합니다. 그리고 돌아서서는 후회하죠. 후회할 일 한 가지만 더 얘기하고 지나갑니다. 뭐냐면 일본 다도 얘기입니다.

일본에서는 문화 행태에 ‘도’자 붙이기를 좋아합니다. 스포츠에도 ‘도’, 꽃꽂이에도 ‘도’, 무술에도 ‘도’를 붙입니다. 그러다 보니 차 마시는 행위에도 ‘도’를 붙여서 ‘다도’라고 하게 된 겁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당연히 ‘차례(茶禮)’라고 했죠. 같은 한자를 일본과 우리가 달리 부르게 된 겁니다. 

일본의 다도는 건너갈 데라고는 조선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일본의 다도는 근대 들어 많이 변형된 것이고, 그 이전의 원래 일본 다도(특히 말차, 즉 가루차)는 한국에서 건너간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가장 깊이 연구한 분이 있는데, 공교롭게도 미국인입니다. 현재 부산에 삽니다. 이름이 ‘Daniel’인데, 제가 ‘다니엘’이라고 불렀더니 항의하더군요. ‘다니엘’이 아니고 ‘댄율’이랍니다. 이게 뭔 소린가 하고 봤더니, ‘다니엘’은 라틴어식 발음이고, ‘댄율’이 영어식 발음이더군요. 자신이 미국인이니 미국식 발음으로 불러달라는 것입니다. 드러워서 그렇게 불러줬습니다. 이름은 본인의 의견을 존중해 주어야죠. 하하하. 

댄율에 따르면 일본의 현재 다도는 조선에서 건너간 차례가 근대화를 거치면서 많이 변형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을 하니 일본에서는 처음에 파란 눈의 미국인이 와서 일본 문화를 연구한다고 좋아하며 후원을 팡팡 해주다가, 다도가 조선에서 건너온 것이라고 하니 후원이 싹 끊기고 일본에서 살 수가 없어 결국은 한국으로 왔다네요. 그런데 한국에는 그 ‘다도’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일본 다도가 넘쳐나죠.

일본인들이 보물로 여기는 찻주전자가 있는데 뚜껑 모양이 매화를 닮았습니다. 매화꽃 세 송이가 뒤엉킨 형태로 만들어졌죠. 이것을 일본인들은 ‘삼매(三梅)’라고 부르면서도 그 뜻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한국말이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모르는 거죠. 그냥 한국말로 읽으면 됩니다. ‘삼매’는 불교 용어 ‘삼매(三昧): 잡념을 버리고 한 가지 대상에만 정신을 집중하는 경지’인 것입니다. 차를 마시면서도 삼매에 들기를 기원하는 한국인들이 음이 같은 매화 셋을 그려놓고 불심을 북돋운 것이죠. 이게 일본으로 가니, 일본인들이 그렇게 발음하면서도 뜻을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일본 다도의 기원이 된 차례는 지금은 한반도에서 사라진 불교 정토종의 이념 아래서 형성된 문화라고 합니다. 현재 우리나라 불교는 조계종인데, 정토종은 고려 때의 불교입니다. 우리가 ‘도를 닦는다’고 할 때 ‘도 닦는’ 것을 가르쳐준 불교가 정토종입니다. 마음을 닦고 또 닦으면 진리인 불성이 드러난다는 것이 정토종의 이념입니다. 그 이념이 우리의 삶에 깊이 들어왔을 때 도를 ‘닦는다’고 표현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조계종은 그것조차 부인하는 것입니다. 닦아야 할 그 무엇조차 ‘없다’는 것이죠. 이 없음을 깨우치는 것이 조계종의 방향입니다. 

차에 대해서는 저도 이 이상 자세한 것은 잘 모르니, 더 궁금한 게 있으면 부산에서 사는 미국인 차 연구가 ‘댄율’에게 연락해서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발음을 잘해주어야 안 혼납니다. 이 콧대 높은 미국인은 삶의 마지막 작업으로 일본의 다도 경전인 『남방록』을 번역했는데, 그것을 책으로 내자니 또 돈이 없어서 블로그에 자신의 모든 지식을 정리했다고 합니다. 일본에서도 쫓겨나고 한국에서는 알아주는 이가 없어 생고생을 하는 댄율에게, 한국인으로서 고맙다는 말을 여기서 하고자 합니다. 땡큐! 댄율(Daniel M. Burkus).

정진명 시인.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정진명 시인.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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