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호의 책으로의 여행]영혼과 생명을 바쳐 그림을 그린 화가
[임영호의 책으로의 여행]영혼과 생명을 바쳐 그림을 그린 화가
  • 임영호 동대전농협 조합장
  • 승인 2024.04.19 06:3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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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충청 임영호 동대전농협 조합장] 그림에 관심 없는 사람도 이 사람만은 알 것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1853~1890). 이 세상에 존재했던 화가들 중 가장 많이 알려진 사람, 숱한 이야기 거리로 지금 이 순간 세계 곳곳에선 고흐에 관한 기사나 방송, 전시회가 열리고 있을 겁니다. 

어느 휴일, 영화 관람 전 시간이 남아 영화관 아래층에 있는 서점에 들렀다가 이 도발적인 책 제목에 끌렸습니다. 박우찬의 <고흐와 돈, 그리고 비즈니스>.  

생전에 화가로서 단 한 점의 그림만을 팔았고,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던 너무 빈곤한 처지였기에 돈과 비즈니스는 좀 엉뚱했습니다.

개 같은 인생
고흐는 자기 신세를 한마디로 끔찍한 ‘새장에 갇힌 새’와 같다고 말합니다. 더구나 사람들의 관심조차 끌지 못하는 그의 그림과 그로 인한 궁핍함, 그를 지원해주는 동생에 대한 미안함,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상처와 그로 인한 발작 증세의 반복으로 피폐해진 삶… 그에게 한 가닥 희망과 꿈꾸는 영혼은 사치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상처받은 영혼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고흐의 첫 인생 목표는 성공한 샐러리맨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1869년 16세의 고흐는 흥미를 잃은 학교를 그만두고 삼촌의 소개로 헤이그의 구필화랑(Goupil &Cie)에 취직합니다. 고흐는 화랑 일에 아주 만족하고 틈나면 미술관에 들려 그림을 연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얼마 후 그 곳을 떠납니다. 사람을 현혹시켜 그림을 파는 장사에 대한 환멸과 영국 근무 중에 있었던 첫사랑의 실패에서의 상처 때문입니다. 

고흐는 아버지의 후원으로 목사가 되고 싶었으나 이것도 잠시, 골치 아픈 신학 공부를 포기하고 벨기에 남부 어느 탄광촌에서 임시직 전도사 자리를 얻습니다. 거기서도 고흐는 강론을 잘 하지 못하는데다가 성직자로서 품위를 지키지 못하고 노동자같이 처신하고 다닌다는 이유로 해고당합니다. 

어느 날 고흐는 네덜란드의 바로크 화가인 렘브란트 (Rembrandt 1606~1669) 그림을 보면서 화가는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느끼며 1880년 10월, 27살 늦은 나이에 전업화가의 길에 들어섭니다. 그는 아버지께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아버지는 이미 고흐를 포기한 지 오래였습니다.

하지만 4살 아래 남동생 테오 덕분에 화가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남동생 테오는 형 고흐가 죽는 날까지 고흐를 뒷바라지 하였습니다.

그는 고흐와 형제관계를 넘어선 평생의 친구였고 후원자였습니다. 고흐가 동생에게 쓴 800여 통 편지는 항상 “친절한 편지와 100프랑 고맙다” 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나는 농민과 직조공이 좋다
고흐는 대단히 지적인 인물로서 조선의 김홍도(1745~1860)처럼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고뇌를 그리고 싶어 했습니다. 착하고 수수한 사람들이 좋았고, 늙고 가난하고 배운 것이 없는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더 마음이 갔습니다. 

고흐는 폭풍 같은 드라마, 슬픈 인생이 담긴 드라마가 감명적이라며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얼굴에 인생의 고단함이 녹아있지 않은 인물들은 그리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시간과 계절감각을 가지고 있지만, 부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소신 때문인지 그는 한 번도 아버지의 얼굴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평생 자기 혼자 불꽃을 태웠다가 제풀에 꺼져버리는 그런 사랑을 한 그는 유일하게 짧은 기간 동거했던 창녀 시엔을 모델로 그린 그림  〈슬픔〉, 사회에서 버림받은 낙오자들이 복권가게에서 일확천금을 노리며 서 있는 모습 〈복권가게〉, 양로원과 고아원에서 근근이 목숨을 부지하는 사람들 〈커피를 마시는 고아노인〉, 〈식사 전의 기도〉, 서민들의 순박한 삶과 그들의 힘든 노동을 그린 작품 〈직조공〉, 〈방직기를 돌리는 여인〉,〈감자 먹는 사람들〉 등을 작품으로 남겼습니다. 

돈이 없어 궁여지책으로 그린 자화상 33점
“인물화나 풍경화에서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은, 감상적이고 우울한 것이 아니라 뿌리 깊은 고뇌다. 내 그림을 본 사람들이 ‘이 화가는 정말 격렬하게 고뇌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의 경지에 이르고 싶다. 어쩌면 내 그림의 거친 특성 때문에 더 절실하게 감정을 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의 모든 것을 바쳐서 그런 경지에 이르고 싶다. 그것이 나의 야망이다.” (반 고흐 영혼의 편지, 신성림 ) 

고흐는 〈자화상〉을 많이 그렸습니다. 고흐가 평생 33점의 유화로 자화상을 그린 것은 정물화가 그랬듯이 순전히 돈 때문이었습니다. 모델료가 없어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일입니다. 또 한 가지 사람의 마음을 그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특히 두 눈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고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것도 그릴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순간에만 그림을 그렸습니다. 

고흐의 자화상은 고흐가 변해 가는 모습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파리 시절 사랑에 빠졌을 때 남자의 자존심을 보았고, 죽기 바로 전에 살았던 셍 레미(St. Remy)시절의 자화상에는 거의 미친 듯한 표정과 일그러진 흉악한 모습으로 마치 천 길 낭떠러지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일본 목판화는 나를 기쁘게 한다
고흐의 그림에 나오는 화방주인이 있습니다. <탕기영감의 초상>입니다. 마음씨 착하고 인정 많은 사람으로 고흐의 그림을 인정해준 사람입니다.

그는 고흐의 궁핍함을 배려하여 물감이나 그림 그리는 도구를 자기 마누라 몰래 외상 주었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고흐는 생전에 이 탕기영감을 통해 일본의 채색 목판화를 수집했고, 또 흠뻑 빠져 열심히 따라 그렸습니다. 심지어 모르는 한자까지도 정성껏 본 땄습니다. 

단순한 선과 강력한 색면의 일본 목판화는 고흐의 그림에 절대적 영향을 주었습니다. 당시에 지금의 한류처럼 유럽 사회에는 일본문화가 크게 유행했습니다. 프랑스 유명한 인상파 화가였던 모네, 마네, 모두가 일본미술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고흐는 이 때 모은 판화로 평소 잘 가는 카페에서 일본 목판화전을 개최합니다. 고흐 평생에 한두 번 있었던 전시회 중 하나입니다. 현재 네덜란드의 반 고흐 미술관에는 고흐와 테오가 수집한 500여 점의 일본 목판화가 소장되어 있습니다.

정작 일본에는 당시의 목판화가 없습니다. 고흐의 후기 인상파 그림에 커다란 기여를 한 안도 히로시게(安藤広重)의 <빗속의 다리>는 1997년 10월 런던 소더비 경매장에서 약 1억에 경매되었습니다. 고흐가 사후에 네덜란드에 준 부(富)는 어마어마합니다. 

고갱을 위해 뭔가 특별한 것이 필요해
고흐가 귀를 자른 사건은 고흐를 아는 사람은 거의 다 아는 일입니다. 그는 1888년 프랑스 남부 아를(Arles)에 예술가 공동체를 만들어 지금까지 자신을 후원해준 동생의 투자비를 되찾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당시 자기보다 잘 나가는 폴고갱 (Paul Gauguin)을 초대한 것 또한 순전히 비즈니스 차원입니다.

고흐는 고갱이 좋아하는 노란 해바라기 그림을 그려 고갱이 거처하는 방을 꾸미고, 서로의 자화상을 그려 교환하는 등 진심을 보여줬고 덕분에 고갱은 고흐의 아를 노란 집에 합류합니다. 그러나 2개월도 채 못가 고흐가 귀를 자르는 사건이 발생하고 예술가 공동체는 깨지게 됩니다.

그 후 고흐는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때때로 정신분열증이 반복적으로 발생하여 몸을 제대로 가누기도 어려웠음에도 그는 그 병원에서 수많은 걸작을 만들어냅니다. 그중 병원 정원에 핀 꽃을 그린 작품<붓꽃>은 1987년 뉴욕 소더비에서 539억에 경매되었습니다.  

 

테오야. 이렇게 죽고 싶었다
1890년 5월, 병원 생활에 지친 고흐는 요양을 위해 정신과 의사 가셰 박사가 있는 프랑스 북부 시골마을 오베르 쉬르 우와르(Auvers Sur Oise)로 가 그곳에서 마지막 생을 보냅니다.

그는 요양하는 내내 붉게 탄 밀밭이 있는 들판에 나가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러나 동생의 결혼과 조카 빈센트의 출생으로 앞으로 지원이 끊길 것이라는 불안감, 치유 가능성이 없는 정신병으로 인한 절망감으로 들판에서 새 쫓는데 쓰는 권총으로 아랫배를 쏘았습니다. 1890년 7월 29일, 그의 나이 37세 때입니다.  

“아무래도 난, 실패한 것 같다. 그것은 내가 받아들여야 할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테오야, 미안하다・・・.”  

이 책을 다 읽고 책을 덮으면서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누가 말했던가. ‘돼지와 예술가는 사후에 칭송 받는다’고. 존재와 시간이 일치하지 않은 것이 이 한 사람뿐이겠습니까? 삶과 예술은 분리할 수도, 분리될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반 고흐의 예술은 인간의 소리입니다. 예술은 영혼을 먹고 자란다고 합니다. 상처받은 한 인간의 영혼의 소리입니다. 

나는 언젠가 파리에서 밤기차를 타고 아를로 가 고흐의 단골술집 〈지누 부인의 카페〉에서 독한 압센트(Absinthe)한잔 시켜놓고 고흐의 영혼을 달래주고 싶습니다.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 반 고흐,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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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배기 2024-04-19 18:24:33
예술에는 고난이 따른다고 합니다. 지독한 가난이 절박함으로 나타난 것이 예술의 탄생인가 봅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영혼이 오늘의 시대에 간절함을 기대해 보게 되는 좋은 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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