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호의 영산강 라이딩] ②“동지는 간 데 없고”… 광주에서 마주한 ‘5·18’
[임영호의 영산강 라이딩] ②“동지는 간 데 없고”… 광주에서 마주한 ‘5·18’
  • 임영호 전 코레일 상임감사
  • 승인 2017.06.12 19:05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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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강은 전남 담양군 용면 용연리 용추봉(龍湫峯, 560m)에서 발원해 광주·나주·영암을 거쳐 서해로 흘러 들어간다. 총 길이 길이 115.5 km. 유역면적 3371 ㎢. 북에서 남으로 호남의 민초들과 함께하며 역사를 관통하고 있다. 지난 2월 13일 임기를 마친 임영호 전 코레일 상임감사는 오랜 계획 끝에 봄기운이 한창이던 4월 초 영산강 강줄기를 따라 길을 달렸다. “라이딩 후 소회를 남기지 않을 수 없어 몇 자 적었는데, 대선이 한창이었던 터라 이제야 글을 내어 보인다”고 한다. 세 차례에 걸쳐 그의 글을 소개한다.

송강정 산 너머에 망월동 국립묘지가 있다. 
국회의원시절 행사 때문에 방문한 적은 있으나 뭔가 부족한 느낌이다. 29번 국도로 20분가량 가다가 석곡동 주민센터 가기 전에 다시 우회전하여 10분정도 달리니 그 곳이 보였다.

광주 5·18 민주화 운동은 광주가 고향인 대학의 같은 과 친구에게 들었다. 당시 나는 군대를 갔다와서 야간대학에 들어가 행정고시 공부를 하고 있었다. 하루는 늦게까지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막차를 놓쳐 그의 하숙집에서 자게 되었다.

이불을 덮고 전등을 껐어도 금방 잠이 들지 않았고, 이 얘기 저 얘기를 나누다가 불쑥 작년 5·18때 겪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한참 이야기를 끌어가다가 목이 메여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도 나도 베게위로 눈물을 적셨다. 그때까지 그저 신문에서 보도한 그대로 믿었다. 불순분자들이 사주하여 일으킨 것으로 생각했다.

국립 5ᆞ·18 민주묘지는 대전 현충원보다 작았다. 정문 안내판에 ‘4월에 기억하여야 할 5·ᆞ18 민주유공자’로 선정된 임병철 님의 포스터가 정문 게시판에 붙어 있었다.

임병철 님은 1956년생으로 나와 비슷한 또래였다. 
그는 당시 연탄공장 운전기사로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1980년 5월 24일 계엄군 공수여단이 피해를 입자 무고한 동네 사람들에게 보복을 하였다. 공수부대원들은 임병철 님을 포함하여  함께 살고 있던 세 사람을 끌어내 경전선 철길부근에서 총격을 가해 죽였다.

안장된 분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수십 명 정도 일거라고 생각했으나 수백 명 정도 되는 것 같았다. 이 많은 분들이 국가의 총구에 의해 맞아 죽었다고 생각하니 미칠 것만 같은 기분였다. 화가 뭉크(1863~1944)의 ‘절규’ 그 자체이다.

“삶속에서는 언제나 밥과 사랑이 원한과 치욕보다 먼저다.” 누군가의 책 속에서 이글을 보았다. 과연 정의롭고 바람직한 국가는 어떤 것인가? 훌륭한 국가는 어떤 모습일까? 진보주의자 유시민 님은 이렇게 정의했다. ‘훌륭한 국가란 국민 한 사람 한사람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는 국가, 국민을 국민이기 이전에 인간으로 존중하는 국가, 부당한 특권과 반칙을 용납하거나 방관하지 않으며 선량한 시민 한 사람이라도 절망 속에 내버려 두지 않은 국가’ 라고.

나는 임병철 님의 무덤을 찾았다. 묘비 옆의 사진 속을 들여다보니 티 없이 맑은 청년이었다. 명복을 빌었다. 자식을 가슴에 묻었을 부모가 떠올랐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그의 회고록에서 “국군을 죽이고 무기고에서 탈취한 총으로 국군을 사살한 행동을 3·1 운동과 같은 ‘운동’이라고 부를 순 없다. (…) 폭동은 폭동일 뿐”이라 했다.

비록 당시에는 국가우선주의로 사태를 수습했을지라도 지금은 반성의 마음이 있어야한다. 국가가 국민을 소유한 것이 아니다. 국민이 국가를 소유한 것이다. 오랫동안 당시 뜨거운 함성은 사그라지지 않을 것 같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구전으로 전해진 민중의 노래이다. 
군사정권에서 금지되어 부르는 사람에 따라 가사와 가락이 조금씩 차이가 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추념식에서 이를 제창할 것인가를 두고 오랫동안 정부와 힘을 겨루었다. 뭐가 중헌디? 뭐가 중헌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노래는 바로 민심이다. 여러 사람이 공감하고 동의하지 않으면 전승될 리 없다. 공자는 백성들의 노래인 시경(詩經)의 시를 ‘사무사(思無邪)’라고 했다.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 거짓이 없다는 뜻이다.

임병철 님의 묘비에 이렇게 적여 있었다. “폭군의 비바람을 헤치고 이 한 몸 역사에 바쳤다. 오월의 피, 당신의 피는 사람 사는 세상에 밑거름이니 영원한 자유의 넋이다.”

5ᆞ·18 민주화 운동은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에 큰 기여를 했다. 짧은 시간 안에 민주화를 앞당긴 역사적 사건이다. 빅토르 위고가 ‘레미제라블’에서 말했다. “땅을 갈고 파헤치면 모든 땅들은 상처받고 아파한다. 그 씨앗이 싹을 틔우고 꽃피우는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시간이 오후 3시를 가리킨다. 
영산강 자전거 길로 돌아가야 한다. 오늘은 영산포에서 여장을 풀 계획이다. 국립묘지는 나지막한 구릉지에 위치하고 있어 강가까지 낮은 경사형태의 들판이다. 우리는 농로를 따라 20분 정도 힘차게 달렸다. 시원한 바람이 마음을 어루만져주었다.

담양댐에서 25㎞ 지점이다. 대나무 숲이 저 건너에 있다. 담양은 고려시대부터 대나무를 심었다. 식목일처럼 죽최일이라 하여 대나무 심는 날을 정하여 권장했다.

대나무 숲은 하천습지에 있었다. 대숲에 피어오르는 새벽안개가 일품이란다. 이곳은 동식물들에게는 최고의 안식처이다. 멀리서 참새 떼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참새들이 서로 대나무 숲 사이사이로 뛰어 다니면서 부르는 환희의 합창이다. 맹꽁이와 수달도 살고 있다. 

중국 진나라의 왕휘지(王徽之)는 흥에 겨워 밤새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 친구 집을 찾아 갔었다. 그가 지금 여기 산다면, 휘영청 달 밝은 밤, 눈이 내려 사방이 온통 흰 빛일 때, 술 한 병 차고 이 대나무 숲을 찾을 것 같다.

다시 출발할 때 시계를 보니 오후 4시가 되었다. 우리는 승촌보로 향했다.  마치 대전의 3대 하천을 라이딩한다는 생각이 든다. 하천 정비한 모습이 대전과 비슷했다. 많은 젊은이들이 봄 햇볕 속에서 유니폼을 입고 외마디 소리로 서로를 격려하며 야구를 즐기고 있었다. 

상무대교 밑으로 광주천이 흐른다. 광주천은 광주도심을 흐르는 하천이다. 오염되었는지 검은 빛이다. 늦은 오후일수록 조금씩 심신이 지쳐간다. 궁둥이도 아프다. 한 참을 가니 황룡강이 합류한다.  

산동교가 나왔다. 1934년 건설된 목포와 신의주를 잇는 국도1호 선상의 다리이다  6ᆞ·25때 광주에서 북한군과 유일하게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1950년 7월, 밀물 듯이 내려오는 북한군에 군인과 경찰이 합세하여 대항했으나 수적 열세로 퇴각했다. 지금은 차량이 다니지 않는 퇴역한 다리이다. 

승촌보까지의 길은 15㎞가 넘는다. 
하천 따라 쭉 달려가는 단순한 길이다. 족히 40분 이상 달려야 한다. 멀리 넘어가는 해 저편에 승촌보가 보인다. 나주에서 생산되는 쌀알의 형태를 형상화한 것이다. 송촌보 옆에 오토캠핑장이 있다. 주말에는 이용객이 많다고 한다. 아직도 광주 시내이다. 

여기서 나주대교까지는 뚝방길이다. 약 12㎞, 1시간가랑 가야 한다. 어둡기 전에 도착해야하니 사정없이 달렸다. 나주대교를 건너 금성관(錦城館)에 먼저 갔다. 나주는 통일 신라 때 금성이라 했다. 영산강도 금천 또는 금강으로 불렀다.

금성관은 역사의 현장이다.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객사로 외국사신이 묵었고 연회도 베풀었던 곳이고, 임진왜란 당시 김천일 장군이 의병들을 모아 출정식을 가졌던 곳이다. 3·1운동, 5·18민주항쟁 당시에도 이곳에서 깃발을 올렸다.

바로 앞에는 유명한 곰탕집 ‘하얀 집’이 있다. 주변에 나주 곰탕집이 옹기종기 있으나 이 집이 압권이다. 곰탕 한 그릇은 9000원, 수육은 3만 5000원이다. 100년 전통을 가진 이집이 앞으로 수백 년 이어졌으면 한다. 

식당 문 앞에는 말 못하는 농아인 두 부부가 호떡을 팔고 있었다. 춘풍만면(春風滿面)이다.  이 식당을 찾는 손님이 줄서서 기다린다. 출출해선지 호떡이 크게 보였다.

바로 옆 영산대교로 가는 길에 완사천(浣紗泉)을 들렸다. 큰 도로가에 있었다. 고려 창건주 왕건에 관련된 우물이다. 왕건은 고려가 생기기 전인 후삼국 시절, 궁예의 부하로써 나주에 출정했다. 왕건이 이 길을 지날 때 우물에서 빨래하던 처녀에게 물을 달라고 하자, 버들잎을 띄워서 공손히 바쳤다고 한다.

에리히 프롬(1900~1980)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은 과연 기술인가?”라고 질문한다. 현대사회의 많은 사람들은 사랑은 학습해야 할 ‘기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는 사랑을 ‘하는 것’보다 사랑을 ‘받는 것’이 훨씬 중요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사랑받기 위해서 여성은 외모를 가꾸고, 남성은 사회적, 경제적으로 성공하고자 한다.

사랑은 받기보다는 하는 것이다. 사랑할 줄 아는 인간은 성숙한 인간이다. 자기중심이 아니고, 타인의 마음과 머릿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남에게 너그러운 연민과 동정심을 지닌 사람이다. 사랑의 기술을 아는 오 씨 부인은 나중에 장화왕후가 되었다.

영산포구는 나주시와 붙어 있었다. 
정확히 나주시 영산동이다. 그동안 나주시에서 멀리 떨어진 별도의 장소로 인식했다. 영산포구에는 황포 돛단배가 떠 있다.

1970년대 영산강 하구언이 생기기 전까지 이곳은 목포항에서 영산강을 따라 이곳까지 배가 왕래한 번화한 포구였다. 내륙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등대가 여기에 있다. 영산포는 1897년 목포항 개항과 함께 일제 강점기에는 전라도의 경제중심지이었고 일본수탈의 현장이었다. 아직도 일본식 건물이 여기저기 있다.

영산동은 홍어의 거리다. 왜구의 등살이 심했던 고려 말, 섬을 비우라는 조정의 지시에 의해 흑산도 주민들이 영산포로 이주했다. 흑산도 주민이 이주하면서 가져온 생선은 썩어서 먹지 못했는데 홍어만은 삭혀지기만해서 먹을 수 있었다. 홍어가 죽으면 미생물의 작용으로 암모니아로 변하여 삭힌 홍어가 된다. 홍어 정식은 2만 원 정도이다.

오늘 70여㎞ 달렸다. 숙소는 영산대교 바로 옆 강가에 잡았다. 다리 바로 아래 하천공지에서는 유채꽃 축제가 한창 열리고 있었다. 마이크 소리로 이른 잠자리는 틀렸다. 저녁메뉴로 홍어로 할까, 삼겹살로 할까 잠깐 고민했다. 자전거 라이딩은 힘이 없으면 페달을 밟을 수 없다. 결론은 삼겹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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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웃 2017-06-12 20:23:06
정치적인 얘기는 끼웃거리지 말고 그냥 동네 얘기나 햐~
민초소리도 그렇고~

이주형 2017-06-15 22:19:48
한번도 가보지 못했던 영산강 일대, 5.18 묘역, 대나무 숲, 그리고 맛집까지... 직접 함께 자전거를 타고 여행한 기분입니다. 글 잘 읽었고, 다음편도 벌써 기대가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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