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어머니, 누나, 석류꽃, 뻐꾸기, 햇빛 그리고 나는…
[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어머니, 누나, 석류꽃, 뻐꾸기, 햇빛 그리고 나는…
  • 이규식
  • 승인 2017.10.28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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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창희(재미화가)

어머니, 누나, 석류꽃, 뻐꾸기, 햇빛 그리고 나는…

내 어릴 적 어느 날 외할머니의 시 외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머니가 노랗게 익은 뭉뚝한 노각을 따서 밭에서 막 돌아오셨을 때였습니다
누나가 빨랫줄에 널어놓은 헐렁하고 지루하고 긴 여름을 걷어 안고 있을 때였습니다
외할머니는 가슴속에서 맑고 푸르게 차오른 천수(泉水)를 떠내셨습니다
불어오는 바람을 등지고 곡식을 까부르듯이 키로 곡식을 까부르듯이 시를 외셨습니다
해마다 봄이면 외할머니의 밭에 자라 오르던 보리순 같은 노래였습니다
나는 외할머니의 시 외는 소리가 울렁출렁하며 마당을 지나 삽작을 나서 뒷산으로 앞개울로 골목으로 하늘로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해보니 석류꽃이 피어 있었고 뻐꾸기가 울고 있었고 저녁때의 햇빛이 부근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외할머니는 시를 절반쯤 외시곤 당신의 등 뒤에 낯선 누군가가 얄궂게 우뚝 서 있기라도 했을 때처럼 소스라치시며
남세스러워라, 남세스러워라
당신이 왼 시의 노래를 너른 치마에 주섬주섬 주워 담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외할머니의 시 외는 소리를 몰래 들은 어머니와 누나와 석류꽃과 뻐꾸기와 햇빛과 내가 외할머니의 치마에 그만 함께 폭 싸였습니다

- 문태준, ‘외할머니의 시 외는 소리’

[굿모닝충청 이규식 한남대 프랑스어문학과 교수] 짧지 않은 분량에 얼핏 산문을 행갈이 한 듯 보이지만 나지막히 읽어보면 일정한 리듬이 솟아나면서 외할머니와 함께 시를 따라 읽는듯한 느낌이 든다. ‘외할머니’였다. 친할머니와는 또다른 푸근함과 정다움, 끝없는 사랑을 주고도 늘 아쉬워하는 외할머니.. 어쩌다 보게된 외할머니의 시 외우던 모습은 그 가락과 배경과 함께  유년의 풍경 속에 한 폭의 그림처럼 깊이 각인되어 있다.

노각, 천수, 빨랫줄, 키, 보리순, 삽작, 석류꽃, 뻐꾸기처럼 무심하게 등장하는 이름들 역시 나름 정연한 하모니를 이루면서 할머니가 외우는 시의 가락에 살그머니 동참한다. 이제는 사라지고 잊혀져가는 여러 사물들, 그 이름들은 각기 지닌 물성을 최대한 뽐내고 서로 어우러지면서 외할머니 시의 배경음악, 반주로 자리잡고 있는듯 하다. 그러고 보니 외할머니는 자연이라는 멋진 무대에서 온갖 물상들의 지원을 받으며 마음 내키는대로 시를 읊었던, 삶의 애환을 자신의 가락에 담을 줄 알았던 시낭송의 원조가 아니었던가. 뒷산으로, 앞개울로, 골목으로, 하늘로 그 목소리는 끝없이 퍼져나갔다.  지금처럼 시낭송대회 무대에서 조명을 받으며 배경음악에 맞추지 않아도 그날 외할머니의 기분에 따라 시는 날개를 달고 들로 산으로 퍼져나갔을 것이다. 많이 암송되는 작품을, 우아하고 예쁜 목소리로 거의 비슷비슷한 분위기로 읊어나가면서 대상이나 금상을 갈망하는 시낭송대회 분위기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자연스러움과 공감이 외할머니의 목소리와 치마폭에서 솟아난다.

시 낭송 풍년 시대, 그만그만한 목소리와 느낌으로 낭송작품의 특징과 차잇점이 자칫 가려지는 이즈음 아마도 수줍고 투박했을지 모르는, 그래서 더 정겨웠던 외할머니의 목소리에서 시인은 “가슴속에서 맑고 푸르게 차오른 천수”를 느꼈고 “불어오는 바람을 등지고 곡식을 까부르듯이 키로 곡식을 까부르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풍요로운 가운데 척박해지는 우리 삶의 언저리에서 외할머니가 외우시던 싯구절을 한 두 대목이나마 떠올린다는 것은 여간 행운이 아니다. 헛헛한 가슴에 그런 추억의 불씨를 가져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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