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산정(山頂), 정신과 영혼의 안식처를 향하여
[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산정(山頂), 정신과 영혼의 안식처를 향하여
  • 이규식
  • 승인 2017.12.30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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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사진=김형효

산정(山頂), 정신과 영혼의 안식처를 향하여

겨울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
간밤의 눈이 다 녹아버린 이른 아침,
산정(山頂)은
얼음을 그대로 뒤집어 쓴 채
빛을 받들고 있다.
만일 내 영혼이 천상(天上)의 누각을 꿈꾸어 왔다면
나는 신이 거주하는 저 천상(天上)의 일각(一角)을 그리워하리.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
저 아래 흐르는 것은 이제부터 결빙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침묵하는 것.
움직이는 것들도 이제부터는 멈추는 것이 아니라
침묵의 노래가 되어 침묵의 동렬(同列)에 서는 것.
그러나 한 번 잠든 정신은
누군가 지팡이로 후려치지 않는 한
깊은 휴식에서 헤어나지 못하리.
하나의 형상 역시
누군가 막대기로 후려치지 않는 한
다른 형상을 취하지 못하리.
육신이란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 것.
헛된 휴식과 잠 속에서의 방황의 나날들.
나의 영혼이
이 침묵 속에서
손뼉 소리를 크게 내지 못한다면
어느 형상도 다시 꿈꾸지 않으리.
(..........)
한때는 눈비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한때는 바람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그리고 다시 한때는 물과 불의 형상으로 오던 나날의 어둠.
그 어둠 속에서 헛된 휴식과 오랜 기다림
지치고 지친 자의 불면의 밤을
내 나날의 인력으로 맞이하지 않았던가.
어둠은 존재의 처소(處所)에 뿌려진 생목(生木)의 향기
나의 영혼은 그 향기 속에 얼마나 적셔두길 갈망해 왔던가.
내 영혼이 내 자신의 축복을 주는 휘황한 백야(白夜)를
내 얼마나 꿈꾸어 왔는가.
육신이란 바람에 굴러가는 헌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영혼이 그 위를 지그시 내려누르지 않는다면.

- 조정권, ‘산정묘지 1’, 부분

#. 문학의 ‘힘’을 찾아서

2016년 1월부터 시작한 ‘이 한 구절의 힘’ 연재를 이번 주 98회로 마친다. 독자에게 힘과 긍정적 사유의 물꼬 그리고 인간과 사회에 대한 낙관적인 시각을 준다면 이즈음 시가 처한 위상의 변화, 영향력 감소에 맞설 수 있는 대안이 나올 수 있다고 오랫동안 생각해왔다. ‘시의 힘’을 화두로 98회를 연재하면서 인용한 여러 시 (일부 소설, 희곡, 수필 그리고 아동문학 포함) 작품은 그리하여 팍팍한 삶과 일상, 인간관계에서 직, 간접으로 희망과 힘을 일깨우는 가능성이 있음을 나름 확인할 수 있었다. 문학의 기능과 소임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양하겠지만 지금처럼 물신숭배의 정보사회에서 첨단문명의 위력이 나날이 거세지고 특히 소외와 갈등이 두드러지는 상황에서 문자예술인 문학이 감당할 나름의 역할은 무엇일까, 그러기 위하여 어떤 미덕과 메시지를 강화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그 힘의 전파, 수용여부와 영향은 글 쓰는 이와 읽는 이의 독특한 능력과 환경에 따라 다르겠지만 오랜 문화사를 통하여 예술의 맏형으로 자리잡아온 문학, 특히 시의 역할에 대한 보다 다양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어서 더욱 그러하다.
 
#. 산정을 향하여, 정신을 드높이며
고 조정권 시인 (1949-2017)의 ‘산정묘지’는 작품의 주제나 스케일, 시인의 의지와 호흡이 크고 힘이 있다. ‘산정묘지’ 연작은 언어에 대한 개성적이고 예민한 반응과 긴장감으로 정신이 도달할 경지를 남성적이고 정결한 시어로 표현한다. 물질의 득세를 거부하고 정신의 고양을 지향하는 시인의 독특하고 청량하면서도 선이 굵은 목소리가 유장한 볼륨감에 실려 다가온다. 모든 사물에 영혼이 있다고 믿는 이른바 범신론, 정신주의는 18세기 유럽에서 태동했지만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의미 있는 지표의 하나이며 사유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정신의 잠재력, 도저한 영혼의 역할과 거기서 형성되는 확신에 찬 시적 상상력의 힘은 크기 때문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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