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하이 패션(high fashion)의 산실, ‘상의원’
조선 하이 패션(high fashion)의 산실, ‘상의원’
학생기자단과 함께 하는 교실 속 NIE, ‘역사 진로직업 체험’
  • 권성하 기자
  • 승인 2018.08.04 11: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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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충청 교육사랑신문은 한국언론진흥재단의 2018년도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역신문활용교육의 일환으로 '학생기자단과 함께 하는 교실 속 NIE, 역사 진로직업 체험'을 총 12회에 걸쳐 게재합니다. 역사 속 인물들의 직업과 생애를 통해 오늘을 사는 학생·청소년들의 꿈과 끼를 키우고, 진로와 직업의 세계를 풍부하게 생각하는 기회를 제공할 계획입니다. 아홉 번째 주제는 ‘패션디자이너’입니다. 우리 역사 속에는 어떤 패션이 유행했고, 어떤 디자이너들이 활동했는지 학생기자들과 함께 살펴봤습니다. <편집자 주>

 

영화 '상의원'의 메인포스터.

[굿모닝충청 권성하 기자]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다. 옷은 사람의 신분과 지위는 물론 개성까지 드러낸다. 옷은 자신을 표현하는 가장 일차적인 수단이다.

우리 역사 속에는 어떤 옷이 유행했을까? 정해진 복장만 입어야 했던 신분제 사회에서도 패션이 있었을까?

많은 역사학자들은 한국에 ‘패션디자이너’라는 개념이 생긴 것은 개화기 이후부터라고 말한다. 하지만 ‘조선이나 고려, 삼국시대에도 옷을 만들어 입었으니 분명 유행을 만들고 이끌었던 트렌드 세터가 있지 않았을까’라는 의문은 해 볼 만하다.

영화 ‘상의원’은 이런 물음에 명쾌한 답을 내놓은 작품이다. 영화는 궁중 디자이너인 어침장 조돌석(한석규)과 기생들 사이에서 각광 받는 침선비인 이공진(고수)의 신구 디자인 대결을 흥미있게 다뤘다.

재미난 건 ‘상의원(尙衣院)’이라는 기관이다. 이름 그대로 옷을 만드는 곳으로 조선시대 임금의 의복과 궁내의 보물을 관리하던 관청이다. 조선 태조 때 공조(工曹)의 속아문(屬衙門)으로 설치됐고, 1895년(고종 32) 을미개혁 때 상의사(尙衣司)로 이름을 바꿨다. 고려의 장복서(掌服署)의 역할을 그대로 계승한 기관이다.

상의원은 엄격한 신분 질서와 사치를 금했던 조선에서 아름다움을 만드는 공식적인 허가된 공간이었다. 자연스럽게 왕실의 패션을 양반 가문과 일반 서민의 저잣거리에 전한 ‘하이 패션(high fashion)’의 산실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파리의 오트쿠튀르(Haute Couture) 컬렉션인 셈이다.

상의원은 사치를 금하고, 신분 질서가 확고했던 조선에서 하이 패션을 선도한 공식 기관이었다.
영화 속 조돌석과 이공진은 실존인물이 아니다. 하지만 이름 없는 패션디자이너의 존재는 따져 볼 일이다.

상의원은 천민이 왕을 직접 알현할 수 있고, 양반도 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었다. 세종 때의 장영실도 이곳 출신이다. 영화 속에서 어침장 조돌석은 무려 30년간 상의원에서 왕의 옷을 지어온 공로를 인정받아 6개월 뒤 양반이 되는 신분 상승을 보장받는다.

물론 영화 속 조돌석과 이공진은 실존 인물이 아니다. 다만, 드라마 대장금의 ‘장금이’처럼 우리 역사 속에서 패션을 주도했던 이름 없는 디자이너의 존재는 따져 볼 일이다.

영화 ‘상의원’이 선사하는 가장 큰 특징은 의상을 통해 보여주는 눈의 호사다. 또 조선 패션의 화려함이다. 아름다운 옷을 바라는 과정이야말로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이라는 사실을 새삼 전해 준다. 이쯤 되면 개화기 이후에야 패션디자이너의 개념이 생겼다는 생각은 버려도 좋다.

조선 사회에서 미(美)에 대한 열망은 ‘어여머리’인 가체에서도 엿볼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가체를 쓰고 시아버지에게 절을 하던 며느리가 목이 부러져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가체(加髢)는 여성의 머리 위에 둥글게 말아 올리는 가발인데 무게가 많게는 10kg에 달했다. 조선 여성들은 가체의 크기와 치장한 장신구로 부와 신분을 경쟁했다. 보다 못한 영조대왕이 가체를 금하도록 명을 내렸지만 조선 여성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목숨보다 아름다움이 우선이었고, 가체는 패션의 완성이었기 때문이다.

조선후기의 미인도는 엄청난 크기의 가체와 젖가슴이 보일 정도로 짧은 저고리, 풍성한 치마 등 하후상박의 전형적인 여성 패션을 보여준다.

사실 영조 역시 패셔니스타였다. 영조가 입었던 도포는 짙은 청색 계열이었다고 전해진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이고, 과감한 색상이다. 더구나 즐겨 입었던 옷감은 비단 중에서도 가볍고 속이 다 비치는 엷은 사(紗)였다. 또 어깨에 천을 덧대어 ‘어깨뽕’을 넣듯이 풍채를 좋게 만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임금이 패션에 관심을 둔 것은 사회적인 패션 트랜드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여성 한복은 영조 시대를 기점으로 큰 변화가 생긴다. 바로 한복 저고리의 길이다. 조선 초기에는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긴 형태였지만 영조 시대를 기점으로 길이가 짧아져 조선 후기에는 겨드랑이 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짧아졌다. 따로 ‘가리개용 허리띠’까지 생겼다.

저고리 길이가 짧아지는 대신 치마는 허리 위로 올라오면서 길어졌다. 속옷을 입고, 치마를 몇 겹이나 겹쳐 입으면서 엉덩이 부위가 마치 항아리 모양처럼 보였다. 상의는 꼭 끼고, 하의는 풍성한 하후상박(下厚上薄)의 맵시는 조선 여성의 패션 트렌드였다.

역사 속에서 한국인의 패션을 찾아볼 수 있는 자료는 의외로 많다. 고분 벽화와 조각품, 그림, 책의 기록 등을 통해서도 유추할 수 있다.

중국 양나라 원제 때 24개국의 사신을 그린 ‘양직공도(梁職貢圖)’는 우리 역사 속 패션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원본은 없고, 3개의 모사본이 있는데 대만국립박물관이 소장한 당염립본왕회도(唐閻立本王會圖)에는 고구려와 백제, 신라, 왜 등 24개국 26명의 사신의 모습이 등장한다.

고구려 사신은 붉은 바탕에 커다란 꽃술 문양이 점점이 박힌 긴 저고리를 입고 있다. 소매와 바지의 통이 넓고, 대체로 고구려 고분 벽화 속 사람들과 옷차림이 비슷하다. 머리에는 새의 깃털을 꽂은 조우관을 쓰고 있다.

백제 사신은 어깨 아래에 커다란 문양이 그려진 푸른색의 긴 저고리를 입고 있다. 통이 넓은 바지와 검은 가죽신을 신고 있으며 옷차림이 대체로 고구려 사신과 비슷하다. 머리에는 상투만 감싼 형태의 관을 쓰고 있다.

'양직공도'의 모사본인 당염립본왕회도(唐閻立本王會圖)에 그려진 고구려, 백제, 신라, 왜의 사신의 모습(사진 왼쪽부터). 그림은 6세기 각 나라의 의복 스타일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신라 사신은 백제나 고구려에 비해 문양이 없는 수수한 옷차림이다. 뒤로 길게 늘어뜨린 장발이 눈에 띈다. 삼국 모두 관모와 유(襦·저고리), 포(袍·두루마기), 대(帶·허리띠), 고(袴·바지), 화(靴·가죽신)를 착용했고, 옷의 가장자리에 다른 천을 덧댄 ‘선’이 있다.

왜국(일본) 사신의 모습은 상당히 파격적이다. 옷이라기 보다는 옷감을 몸에 두르고 묶은 형태다. 벌거벗은 상체를 겨우 가리는 수준이며 발도 맨발이다.

디자이너는 시대의 스타일을 만드는 직업이다. 의상디자인, 시각디자인, 산업디자인, 환경디자인 등 모두 사람들의 생활양식에 직접 영향을 준다. 우리의 DNA 속에서 끊임없이 발전해 온 패션과 주얼리, 메이크업 등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은 오늘날 전세계가 열광하는 K-뷰티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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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ㅈㄷㄹㅈㄷㄹ 2020-11-09 18:35:45
조돌석 실제 인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