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서울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효창공원엔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해 여러 애국선열들이 잠들어 있다. 윤석열 정부 들어 뉴라이트 역사관이 우리의 역사를 오염시키는 것에 저항하고 '진정한 애국'을 되새기는 의미에서 3.1절을 맞아 효창공원을 찾았다.
본래 효창공원은 조선 22대 국왕 정조의 장남인 문효세자와 생모 의빈 성씨가 사망한 후 그들의 묘소를 조성하면서 그 역사가 시작됐다. 정조는 이곳이 풍수지리적으로 좋다고 판단하여 묘소를 조성하고 이곳에 ‘효성스럽고 번성하다’라는 의미의 '효창(孝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현재는 이곳에 용산구청이 들어서고 주거단지가 조성되며 옛말이 되긴 했지만 조선시대까지는 소나무 숲이 우거진 곳으로 인적이 꽤 드물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었고, 묘역도 광활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들어선 일본군이 '구용산고지'라는 이름을 붙이고 숙영지로 삼는 동시에 병참기지로도 활용하며 독립군 토벌 및 소탕 작전을 비밀리에 펼치는 곳이 되기도 했다. 해방 후 일본군이 사용했던 숙영지 및 병참기지는 일본군이 한반도에서 모두 철군한 뒤에야 공식 철거되었다.

효창원 일부가 공원으로 조성된 것은 1924년으로 그 때부터 '효창공원'이란 이름이 생기게 됐다. 1930년대에는 놀이시설이 들어서고 벚나무, 플라타너스 등의 외래 식물들이 심어져 유원지로 조성되었다. 이후 1944년 효창원이 현재의 고양시에 위치한 서삼릉 권역으로 이장되면서 그 이름만 남게 됐다.
이러한 역사를 지닌 효창공원이 독립운동가들을 모신 장소가 된 것은 해방 이후의 일이다. 1946년 박열, 이강훈 등 아나키스트계 독립운동가들이 백정기, 이봉창, 윤봉길 삼의사(三義士)의 유해 수습을 촉구하여 '3의사국민장봉장위원회'를 발족하고 그 유해가 국내에 공식적으로 운구되어 삼의사묘(三義士墓)에 안장되었다.

이후 1948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출신인 이동녕·조성환·차이석의 유해가 안장되었으며 1949년에는 백범 김구가 서울 경교장에서 암살당함에 따라 국민장을 통해 그의 시신이 운구되어 안장되기도 했다. 2002년에는 김구의 생애와 항일 업적 등을 기념하는 백범 김구 기념관이 설립되었다.
삼의사의 묘 옆에는 안중근 의사의 가묘도 함께 있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발견되면 이곳에 안장할 계획이나 안타깝게도 안 의사가 순국하고 115년이 흐른 현재까지도 그의 유해는 찾지 못해 주인 없는 가묘로 남아 있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일본이 이미 1941년부터 안 의사의 유해가 묻힌 곳을 적은 자료를 은폐한 것으로 확인돼 더욱 안타깝다.

그나마 효창공원에 안장된 삼의사 중 윤봉길 의사의 유해를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윤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의 훙커우공원에서 물통 폭탄(기자 주 : 흔히 도시락 폭탄으로 알려져 있지만 윤 의사가 실제 던진 폭탄은 물통 폭탄이다.)을 던져 일본 육군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 등을 폭사시킨 의거를 행한 인물인데 그는 그 해 12월 19일 처형된 후 인근 야산의 쓰레기 소각장이었던 노다 산 공동묘지 관리소로 가는 좁은 길목에 사람들이 밟고 가도록 암매장되었다.
광복 이후 백범 김구 선생은 박열, 이강훈 등에게 윤 의사와 백정기, 이봉창 의사의 유해 발굴을 부탁했는데 온갖 수소문을 거친 끝에 윤봉길 의사의 시신을 매장할 당시 그 자리에 불경(佛經)을 외웠던 여승이 있었다는 걸 알아냈다. 그들은 그 불경을 독경했던 여승을 통해서 가까스로 윤봉길 의사의 유해가 묻힌 곳을 알아내 고국으로 모셔올 수 있었다.

그 밖에 이봉창 의사의 경우 1932년 1월 8일 일본 도쿄의 경시청에서 당시 일왕이었던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졌던 인물이었다. 당시 그는 도쿄 교외에서 열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히로히토를 겨냥해 도쿄 경시청 부근에서 수류탄 1개를 던졌지만 일왕이 탔던 첫 번째 마차가 아닌 두 번째 마차에 명중하는 바람에 마차를 끌던 말과 말에 탄 근위병에게 부상을 입히는 것에 그치고 말았다.
이봉창 의사는 서울 용산구 출신인데 마침 효창공원 역시 서울 용산구에 있으므로 삼의사 중 유일하게 고향 땅에 묻힌 사람이다. 광복 후 백범 김구 선생이 1946년 일본 정부에게서 이봉창 의사의 유해를 돌려받아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공원의 '삼의사' 묘에 윤봉길 의사 등과 함께 안장됐다.

마지막 백정기 의사는 윤봉길, 이봉창 두 의사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아나키즘 계열의 독립운동가인데 그 역시도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 당시 윤 의사와 별도로 거사를 준비했으나 안타깝게도 입장권이 없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 이듬해 1933년 3월 17일 주 중화민국 일본 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가 일본 정객, 참모부원 및 중국의 친일 정객, 일본 제국 육군 소속 군인 등 100여 명을 상하이 훙커우의 로쿠산테이(六三亭)라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요릿집에 초대한다는 기밀을 탐지한 뒤, 정현섭, 원심창(元心昌), 이강훈(李康勳) 등의 아나키스트 동지들과 함께 이들을 습격할 준비를 완료하고 대기하던 중 일본 제국 경찰의 역습을 받아 같은 날 원심창·이강훈 등과 함께 체포돼 실패하고 말았다.
체포 후 그는 일본 나가사키로 끌려가 이른바 살인예비 및 치안유지법 위반, 폭발물 취체벌칙 위반 등의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후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지병이던 폐결핵이 재발해 악화되었고, 결국 1934년 6월 5일에 옥사, 순국했다.

이렇게 독립운동가들의 묘역을 돌아보면 다시 한 번 그들의 희생에 감사하게 되고 가슴이 뭉클해진다. 삼의사의 묘와 백범 김구 선생의 묘 외에도 임시정부 요인들의 묘도 있다. 모두 이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가 일제로부터 해방되어 주권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친일 청산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친일파들의 후예는 해방 후 80년째 바퀴벌레처럼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윤석열 정부 들어선 친일파들의 후예인 뉴라이트 세력들이 마치 제 세상이라도 만난 듯이 날뛰며 식민지 근대화론을 부르짖고 독립운동가들에게 색깔론을 뒤집어 씌우며 역사를 왜곡시키고 있다.

소설가 故 이외수 씨의 장편소설 <장외인간>에 나오는 등장인물인 한 도사(본명 한대규)는 친일파들을 두고 "그놈들은 남북통일을 민족의 숙원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한일합방 재실현을 민족의 숙원으로 생각하는 놈들이야!"라고 일갈한 바 있는데 거의 그와 다를 바 없는 작태들을 벌였다.
그런 윤석열 정부는 12.3 내란 사태를 일으키며 종말을 앞두고 있다. 윤석열 정부의 종말이 다가오는 시점에서 또 3.1절을 맞이하는 시점에서 효창공원을 돌아보며 역사를 반드시 바로잡겠다는 다짐을 또 한 번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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