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설화(雪花) ③
[연재소설] 설화(雪花) ③
  • 유석
  • 승인 2015.03.19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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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충청 유석 김종보]

지금까지 수많은 고통 속에서 주어진 운명을 헤쳐 나왔지만 그 끝자락이 어딘지 조차 알 수 없었다. 모진 생을 욕질해가며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밀어 닥칠때마다 무릎을 꿇고 싶은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왔다.

어쩌다 악처를 만나 사랑의 협착증에 걸려 자신의 인생이 철저하게 얼어붙었는지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힘들때마다 지난날의 솜사탕 같았던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과거 설화의 미움에 대한 증오는 지금 미란에게 단 일분간 당하는 모욕감에 비교도 안 되다보니 자연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때로는 사소한 것 가지고 칼 끝 같은 성질을 부려 댈 때마다 설화에 대한 그리움은 한 겨울에 날리는 함박눈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천길 낭떨어지 빙벽에 매달린 신세가 되었을때도 설화와의 사랑은 그를 다시 끌어 올리는 신비의 마약 같은 힘이 되어주기도 했다.

실체 없는 상상 속에 지나간 사랑의 봄을 떠 올리며 피폐해져가는 그의 앞에 나타난 환영은 오뚝이 같은 마력을 일으켰다. 그런 와중에 설화가 진 빛 갚느라 생활비가 부족할 때면 카드를 긁어 미란에게 생활비를 보태주었다. 그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도 이미 오래 된 구형이다보니 이래저래 고민은 깊어갔고, 월세마저 밀릴 때면 잠도 오지 않았다. 미란이 들이대는 이유도 나무랄 수만은 없었다.

결국 또 한 번 물러설 수 없는 대립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본래 똑똑한 척, 잘난 척을 밥 먹듯이 하고 자존심이 강한 미란의 등살에 이제 더 터질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남편을 말려 죽일 작정이라도 한 듯, 또 다른 싸움 거리를 만들어놓고 있었다. 또 다시 피할곳이 없었다.

어쩌면 자존심이 강한 그녀로서 참기도 많이 참아온 터였다. 남편의 낡은 승용차를 바라볼 때마다 동네사람들한테 창피한 것을 참다못해 기어코 터트린 이유는 살고 있는 그곳을 떠나지 않을 바에야 새 차로 바꾸라는 것이었다. 지수로서는 차마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 문제로 몇날 며칠을 들볶아대 수차례 공방이 오갔다.

남의 집 월세방을 살아도 자동차는 보증금보다 비싼 것을 타고 다니는 세태다보니 지수의 나이도 나이거니와 차종 따라 그 사람의 신분과 인격이 좌우되는 현실을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따르라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생활비를 적게 받으며 고통을 함께 나누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지수의 생각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울며 겨자 먹기로 들어주기에는 터무니없는 선택을 해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되었다.

한참 더 탈 수 있는 승용차를 버리고 미란이 원하는 대로 한 단계 올려 할부로 새 차를 구입하자는 의견을 반대하는 날에는 또다시 쌍욕을 동반한 난폭한 행동과 욕설을 감수해야 한다. 그 고통은 둘째 치고, 당장 살지 않겠다며 위자료 3천을 내놓으라며 물고 늘어질 것이 뻔하다보니 그게 더 무서웠다. 거액의 차값에 대한 부담을 고스란히 끌어안아야 하는 현실에서 그가 짊어져야 하는 멍에는 더욱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미란은 자존심이 생명이었고 과시가 삶의 전부였다.

지수는 또 한 번 사랑에 속고 돈에 울어야 하는 현실에서 온몸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 사람들이 황금의 노예가 되어 사랑을 욕되게 하고 있는 마당에, 미란 같은 여자들도 쓰나미처럼 쓸려나가고 있는 현실을 바라보며 가슴을 내리 칠 수밖에 없다보니, 힘없는 남자들은 이 땅에서 숨 쉬고 살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는 것이 비참할 뿐이었다.

능력부족의 재혼남들이 겪는 수모는 그 어떤 모욕보다 비굴했다. 조건부 사랑의 굴레 속에 물먹은 스펀지처럼, 단물 빠진 거리마다 휘청거리는 풍경을 바라볼 때마다 밀려오는 괴로움을 달랠 길 없어 낙심의 술잔을 기울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뜻하지 않은 악처를 만나 빠져 나 갈 수 없는 사랑의 덫에 걸려 꼼짝 달싹 할 수 없는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힌 자신의 몰골을 바라보고 있자니 기가 막혔다. 차가운 밤바다에 조난당한 사람처럼, 자신을 건져줄 그 어떤 구명정하나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세상이 야속하기만 했다.

밀려오는 괴로움에 자신의 운명 줄을 끊어버리고 어디로 도망치고만 싶었으나 그 마저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부평초처럼 떠다니는 거리의 패잔병 같은 몰골이 너무나 처참하기도 했지만, 지금까지의 인생살이가 허무하고 실패의 연속을 거치다보니 훗날, 어떤 방법으로든지 보상받고 싶었다. 억울한 인생을 생각해서라도 섣불리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의 인생이 동상에 걸려 있어도 누구 하나 시린 창가를 두드려 주는 사람 없는 고통 속에서도 못 다한 사랑의 영웅이 되고 싶어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한 올 남은 유일한 길은 오직 패잔에서 회생해야 하기에 강한 의지가 필요했다.

사랑의 영웅이 되려면 돈을 지배해야 했기에, 그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비벼댈 언덕을 찾아 나서야 했다.
그 의지는 신념을 떠나 발버둥치며 추구하는 과정에서의 주어진 운명과 화해하는 사이 반드시 희망이 있을 것이라는 어떤 기대감이기도 했다. 막연하지만 허공에 나부끼는 신기루라 할지라도 그 어떤 행운을 갖고 다가오는 여명의 빛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것은 미란의 원수를 갚기 위한 ‘와신상담’이 아닌 자신을 그토록 괴롭히고 있는 운명과의 한판 대결을 예고하는 모정의 집념이기도 했다. 녹지 않는 차가운 빙벽의 난간에 매달려 생을 욕질하면서라도 뚫고 나가야하는 길은 오직 인생역전의 길 밖에 없다는 것을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실패한 인간일수록 생의 욕질에는 긍정심이 필요했기에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자신 앞에 들이 닥친 운명을 다독이며 끝까지 밀고 나가기로 했다. 오늘까지 버텨온 것이 아까워서라도 나약해져만 가는 마음을 다독였다.

지금 너나 할 것 없이 거리마다 단물이 빠지면 곧바로 길가에 뱉어 버려 찢겨진 사랑조각들이 휴지처럼 널 부러져 있는 현실에서 남들처럼 똑 같은 사랑을 추구하며 살고 싶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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