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기자의 눈] 70년 만에 쥐어보는 연필
[시민기자의 눈] 70년 만에 쥐어보는 연필
  • 이희내
  • 승인 2017.02.07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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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내 방송작가, 대전대학교 외래교수

[굿모닝충청 이희내 방송작가, 대전대학교 외래교수] 작년 12월 17일, 충청남도 논산시 문화예술회관이 웃음과 울음이 뒤엉킨 환희와 감동으로 가득 채워졌다.

환희의 주인공들은 바로 당당히 학문을 마친 수료자들. 그런데 학사모를 쓴 학생들 모두가, 고령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다.

평생을 까막눈으로 살아온 논산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한글대학에 다니면서 쓴 시다. 긴 세월 쌓아온 깨달음과 진심이 만나면 '감동'이 탄생한다.

고추 심던 할머니가 학생이 되고, 밭 매던 옆집 어르신도 연필을 쥐었다.

일주일에 두 번 마을회관이 학교가 되는 곳. 70년 만에 연필을 쥔 기쁨과 설렘이 가득한 논산 한글학교의 학생들이 바로 그 날.

그 동안 여러모로 힘들고 지쳤던 국민들에게  감동을 선사해 주며, 2017년의 시작을 희망으로 채워주었던 주인공이었다.

딸기로 유명한 충청남도 논산의 한 시골마을. 이 곳 마을회관은 일주일에 두 번씩 학교가 된다.
지난 해 6월부터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어르신들을 위해 논산시가 문을 연 '마을로 찾아가는 어르신 한글대학' 때문이다.

일반적인 한글학교는 읍내까지 버스를 타고 가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이 학교는 동네로 직접 찾아와 밭 매던 할머니가 호미를 던져놓고 수업을 들으러 간다.

22개 마을에서 280여 명의 어르신을 대상으로 주 2~3회 한글 교육을 실시하며 마을을 돌며 학생들을 가르친다. 과목은 한글, 산수, 음악으로 모두 시골 실정과 어머니의 눈높이에 맞춰 수업을 한다.

한글학교에서 '가갸거겨'를 배우고 난생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쓰게 된 한 어르신. 초등학교 문턱도 못 넘어본 할머니는 몇 년 전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문맹의 막막함을 몸으로 뼈저리게 느꼈다.

그래서 한글학교를 다니며 주경야독해 전화번호부를 찾으며, 이웃집에 전화를 걸고, 50년 전에 발급 받은 주민등록증도 읽을 수 있게 됐다.

앞집에 사는 공부 잘하는 할머니에게 과외를 받을 만큼 공부에 열성적인 할머니. 등교 시간 직전까지 받아쓰기 공부를 했다는 그녀는 이제 간판읽기, 신문 읽기가 너무도 즐겁다고 말한다.
부적면 아호리의 한글학교 우등생이신 한 어르신에겐 학교를 다닌 기억은 국민학교 2학년 때까지가 전부라고 한다.

못 배운 것이 늘 한이 되어 어린 시절 책가방을 매고 학교를 가는 갈래머리 친구를 부러워했고, 자식들 교육만큼은 늘 모든 걸 해주기 위해 평생을 농사지었다고 한다.

한글학교를 다니기 전까지 종종 잠잘 때 학교를 다니는 꿈을 꿔왔다고 말하기도 하는 이 어르신. 지금은 학교를 다닌다는 기쁨에 똑같은 숙제를 밤에, 또 학교 가기 전에 두 번 할 만큼 애정이 넘친다.

일주일에 두 번 학교 가는 날이면 가장 좋은 옷을 준비하고, 늘 아이처럼 설레는 자신을 만나신다며, 환하게 웃으신다.

이렇게  한 글자  한 글자마다 적어 놓은 그리움이 남다른 어머님들.

며느리가 사줬다는 공책 안에는 삐뚤삐뚤한 글씨로 빼곡한 글들이 가득하다. 아들과 손녀들, 영감님이 그리워 잠 못 이루는 밤이면, 한글학교에서 배운 글로 가슴 속에 묻어 놓은 못 다한 얘기를 공책 가득히 풀어냈다며 인생에서 가장 값지고 보람찬 순간들이었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평생을 까막눈으로 살아온 논산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더 이상 까막눈이 아니다.

또한 이것에 만족하지 않고, 앞으로 100세가 될 때까지, 비로소 눈뜬 이 환한 세상에서, 다시 연필을 잡겠다고 한다.

그 날 황명선 시장의 격려사 중 이런 말이 있었다. “배우지 못한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안 배우려는 자세가 부끄러운 것이다”.

아마도 이 의미는, 아마 우리 모두에게 통용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2017년만큼은 정치권, 경제권, 교육권 모두가 까막눈을 떠야 할 때다. 진정 배우지 못한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안 배우려는 자세 자체가 가장 부끄러운 것이라는 걸 깨우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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