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1 이영도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
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우려 기다리며
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
정작 마주 앉으면 말은 도로 없어지고
서로 야윈 가슴 먼 창만 바라다가
그래도 일어서 가면 하염없이 보내니라
*청마(靑馬) 유치환((1908〜1967)으로 부터 5천여통의 사랑의 편지를 20여 년간에 받은 시조시인 정운(丁芸) 이영도(1916〜1976)의 가슴에 묻어 둔 시입니다. 한국전쟁 통에 잃어버린 편지와 시를 제외하고 정운이 고이 간직했던 5천여통 중에서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라고 시작되는 “행복”의 시 첫머리를 따서 <사랑 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라는 청마가 교통사고로 죽은 지, 한 달 후에 정운에게 보내는 서한집을 출판 합니다.
한 여인에 대한 식을 줄 모르는 연정을 더러는 “플라토닉 러브”니, “불륜”이니 하고 말했지만, 그들의 순고한 사랑은 훈풍이 되어 사람들의 언 가슴을 녹여 줍니다. 청마의 부인인들 편치 않고,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겠지만 큰 소란은 없었고, 정운 또한 생전에 “청마”에 대해서 물으면 늘 희미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 했다고 합니다.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퍼‘진다는 정운의 속마음이 훤히 들여다보이지만, 현실은 넘을 수 없었던 그 시대의 풍경으로, 한 폭의 산수화처럼 색칠을 하지 않은 빈 공간이 남아서 가슴을 울렁이게 합니다. 툭하면 만나고 헤어짐이 일상화 돼버린, 막장드라마가 안방을 점령해버린 오늘날,’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므로 행복하였네.‘를 느끼고 살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