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영호의 인문학 서재] 굳건한 덕(德),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임영호의 인문학 서재] 굳건한 덕(德),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27) 장자 ‘장자’ ③ 덕충부
    • 임영호 우송정보대 특임교수
    • 승인 2018.10.2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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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영호 우송정보대 특임교수
    임영호 우송정보대 특임교수

    [굿모닝충청 임영호 우송정보대 특임교수] 제5편 덕충부(德充符)입니다. 덕(德)이 가득해서 저절로 밖으로 드러나는 표시라는 뜻입니다. 덕이란 무엇입니까.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서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육체적 조건이나 외부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마음입니다. 장자가 덕을 이야기하면서 한사코 장애인을 등장시킵니다. 아마 덕이란 사람의 외모에 달린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달려 있음을 알려주려 합니다.

    노나라에 왕태(王駘)라는 발하나 잘린 사람이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따르는 자가 많아 공자의 고향 노나라에서조차 명성이 높았습니다. 공자는 그가 성인의 경지에 올랐다고 말합니다. 생사에 초연하고 어떤 무엇이 일어나더라도 의연하고, 운명을 운명으로 의젓하게 받아들여 근본을 지키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발하나 떨어져 나감은 흙덩어리 하나가 떨어져 나간 것으로 밖에 보지 않습니다. 순전히 마음의 문제입니다.

    형벌로 발이 잘린 숙산무지(淑山無趾)라는 전과자가 절름거리면서 공자를 찾아갑니다. 공자는 그런 형벌은 인의예지(仁義禮智)라는 유교 윤리에 따라 근신하지 못한 탓이라고 나무랍니다. 무지는 그런 공자의 태도에 실망하고 떠납니다. 공자의 율법주의라는 껍데기에 갇혀 모든 것을 여기에 비추어 따지고 살아간다면 도(道)에 이를 수 없고 지인(至人)의 길에서 한참 멀게 있다고 봅니다. 노자는 무지에게 죽음과 삶은 하나요. 됨과 안 됨이 결국 둘이 아니라는 도가의 진리를 공자에게 왜 일깨워 주지 못했냐고 반문했습니다. 무지는 공자가 ‘하늘의 벌’을 받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늘의 벌이라니요. 인생의 길에서 윤리적 단계 이상을 보지 못하는 답답함입니다. 온갖 것이 다 하나라는 마음은 덕을 우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덕을 앞세워 불안과 공포, 고통과 절망을 없애주는 자유의 세계를 주고 있습니다.

    애태타(哀駘它)는 위나라 사람으로 얼굴도 못생기고 낙타처럼 곱사등입니다. 그러지만 한 번이라도 만나면 그를 못 잊고 떠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서서 주장하는 일이 없고 언제나 사람들에게 동조할 뿐입니다. 빈 배가 된 상태로 ‘나’라는 자의식이 없는 상태입니다. 양쪽을 한꺼번에 보는 사람입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가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공자는 부연해서 그의 덕(德)에 대하여 말합니다. 여러 가지 조건에 흔들리지 않은 마음을 가지고 본심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사철이 바뀌듯이 외부 조건을 운명으로 생각하여 의연히 받아들이고, 안달하거나 초조해하지 않습니다.

    인기지리무신(閵跂支離無脤)은 절름발이에 꼽추고 언청이며, 옹앙대영(甕  大癭)은 혹 뿌리 영감이지만, 그들은 자기 임금에게 훌륭한 의견을 제시합니다. 임금은 이들을 무척 사랑합니다. 오히려 정상인이 이상하게 보입니다. 내면을 온전히 갖추니 겉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 문제 될 것도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장자는 혜자와의 대화에서 하늘에만 의지해 사는 성인(聖人)에게는 정이 없다고 합니다. 목석(木石) 같은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장자는 감정을 넘어선 경지,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 경지를 말합니다. 이렇게 되어야 자유로운 사람이 된다고 합니다. 일체의 이기심이나 집착하는 것이 없이 느끼는 순수한 감정이 무정(無情)입니다. 부동심(不動心), 평상심 같은 것입니다. 혜자처럼 일상적인 분별심,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의식에 매달려 시비곡직(是非曲直), 호불호(好不好)에 매달리면 활기를 잃습니다. 어떤 관념이나 집착에서 벗어나 의연하게 마음을 먹어야 참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다정(多情)도 병입니다.

    장자
    장자

     

    제6편 대종사(大宗師)입니다. 위대하고 으뜸 되는 스승은 과연 어떤 사람인가 하는 문제를 다룹니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믿고 따라야 할 스승은 누구이고, 우리가 따라야할 기준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장자는 니체가 초인(超人)을 내세워 말하게 하는 것처럼, 진인(眞人)을 형상화시켜 구체적으로 참된 스승을 가르칩니다. 진인은 이것도 저것도 ‘하나 됨’의 경지에 있는 사람입니다. 여우(女偶)가 그런 인물입니다.

    여우와 남백자규(南伯子葵)와의 대화에서 득도의 단계를 언급합니다. 우선 외부 물질세계를 잊어버리고 결국에는 우리의 삶 자체, ‘나’라는 것 자체를 잊게 되면 죽음도 삶도 없는 경지에 이를 수 있습니다. 殺生者不死, 生生者不生’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작은 나를 죽이는 것이 진정으로 죽지 않는 길이고, 작은 나를 살리는 것이 사실은 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자의식으로 가득 찬 현재의 ‘나’가 죽어 없어질 때 진정한 ‘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주고 사는 것은 운명입니다.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는 하늘의 이치입니다. 부모 자식 간 관계처럼 조화자(造化者)의 뜻에 따라 순명하는 태도로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대장장이가 연장을 만드는데 어찌 우리 마음대로 ‘막야(莫耶)’같은 명검을 만들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것들 모두를 운명이나 숙명으로 여기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는 최선을 다했지만 어쩔 수 없을 경우 그 한계를 인정하고 그대로 받아들여 자신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허유(許由)는 의이자(意而子)가 요임금에게서 인의를 따지고 시비를 가리는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자, 허유는 이는 마치 형벌로 이마에 먹물이 들고 코가 잘린 것과 같은 것인데, 이런 꽉 막힌 마음으로 저 자유분방한 도의 세계에서 노닐 생각을 하느냐며 의이자를 꾸짖었습니다. 허유는 요임금이 자기 자리를 물려주려 했던 사람입니다.

    허유는 의이자에게 도(道)는 한마디로 자기를 완전히 비운 상태라고 말합니다. 스스로 의롭다 하지도 않고, 편애하는 일도 없고, 잔재주도 부리지도 않는, 자만이나 집착 같은 자의식이 없는 상태로, 이런 도의 세계가 우리가 노닐 곳이라고 합니다. 장자는 소통의 철학자이기도 합니다. 이미 구성된 마음이 없어야 남과의 대화가 원활하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도를 모르는 것은 욕망이란 기름이 마음에 끼인 탓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나를 위한 욕망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삶을 죽인다는 것은 나를 위한 욕망을 죽이자는 뜻입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 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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