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민기자의 눈] 끝나지 않은 한국전쟁, 군화의 주인은 누구인가?
    [시민기자의 눈] 끝나지 않은 한국전쟁, 군화의 주인은 누구인가?
    • 이기웅 시민기자
    • 승인 2018.06.10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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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웅 예산시민기자
    이기웅 예산시민기자

    [굿모닝충청 이기웅 시민기자] 우리가 살고 있는 어느 곳이나 그 장소가 지니고 있는 역사와 문화 자원이 있다.

    예산 가야산도 마찬가지. 이곳의 자연, 역사, 문화 자원의 가치는 엄청나다.

    가야산은 역사적 격변기에 피난처로, 항쟁지로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빨치산 주 활동 무대 가야산, 그 아픔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서울이 수복되면서 패잔병이 된 북한군은 퇴로가 막혀 가야산 깊은 계곡으로 들어갔다.

    때문에 가야산은 국군, 유엔군, 지방 방위군과 빨치산 간 격전지로 아픔을 피해가지 못한다.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이 가야산에 숨어들면서 주민들의 피해가 많았다고 한다.

    해마다 6월이 되면 전쟁을 경험한 어른들은 전쟁의 희생자이면서도 죄인이 된다. 여전히 그들은 한국전쟁을 입에 담기 조심스러워한다.

    빨치산에 의해 마을이 점령당하자 피난을 떠나지 못한 젊은이들은 의용군으로 징집되고 남아 있던 일부는 어쩔 수 없이 빨치산 동조자가 됐다고 한다.

    빨치산이 마을에서 철수하고 국군과 경찰이 다시 들어오면 빨치산에 동조한 젊은이들에 대한 철저한 보복이 자행됐다. 그 보복이 두려워 산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빨치산이 되기도 했다.

    1950년 11월부터 미군이 가야산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탱크를 동원했다. 이후 예산과 홍성, 당진, 서산 4개 지역 경찰과 지역 방위군이 빨치산 잔당을 소탕하기 시작했다.

    가야산 빨치산 얼마나 됐기에…

    한국전쟁 직전인 1949년 이곳에서 유격훈련을 받았던 남로당 출신의 빨치산들이 먼저 들어와 있었다. 인민군 대위, 정치군 등 약 10명의 정규군 출신에 이어 인민군 패잔병들까지 가세하자 그 기세가 등등해졌다.

    기록과 주민들의 구술에 따르면 가야산 빨치산은 약 80~300여명으로 추정된다.

    주민 김 모(87) 씨는 “가야산 빨치산의 이동 경로는 도시래미~능인~빈발~곤양골~구랑골~용현리으로 기억한다”며 “상가리의 용연과 점토 도시레미에서 빨치산을 사살하거나 생포해 미군에 넘기고 그들이 활동하던 집을 태워버렸다”고 증언했다.

    당시 운산 지서장으로 빨치산 토벌대장이었던 변흥명 씨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충남 지역 빨치산이 3만 명이 넘어 죽을 고비를 수 없이 넘겼다”며 “특히 가야산이 빨치산 천국”이라고 했다.

    하지만 변흥명 씨의 주장은 내포지역 남로당 및 인민군 패잔병 숫자와 가야산의 규모를 볼 때 상당히 과장됐다고 볼 수 있다.

    마을 주민 이 모(89세)씨는 “지역 방위군과 미군의 폭격으로 희생된 빨치산이 정말로 많았으면 도시래미와 곤양골, 용현리 깊은 곳에 유골이 널려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충남 빨치산 故 송세영 선생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가야산은 크지도 않고 동쪽과 연결이 안 된 독립산입니다. 후퇴를 못한 서산군당, 홍성군당, 여타 군당 일꾼들이 가야산에 모였는데, 수천 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당 일꾼들이 유격지도부를 구성하고 몇 개의 소부대를 편성하여 기습전, 매복전을 통해서 무력을 획득, 강화하고 유격전을 전개했답니다. 군경이 1950년 11월경부터 가야산 인근의 산에 나무를, 주민을 동원해 다 베어버리고 그 나무를 가야산 주위에 싸놓고 불을 질렀답니다. 안에 있던 동지들이 여러 날을 불 속에서 불에 타죽고, 총 맞아 죽고, 손들고 나간 사람들도 모조리 사살했답니다”

    이제는 관광 명소된 가야산, 빨치산 연구 진행돼야

    이처럼 양 측 모두 깊은 상처로 남은 한국전쟁은 벌써 68년이나 지났다.

    가야산은 한 해 45만 명의 탐방객이 찾던 곳이지만 전쟁의 상흔을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이름난 풍광 뒤에는 참상이 숨어있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가야산의 명소는 한 때 향화(香火)을 밝히던 곳이고 전쟁의 상흔으로 아파하는 유적지다.

    가야산 계곡에 버려진 군화에 가슴이 저며 온다.

    가야산의 빨치산 이야기 그들에게는 고통이고 말하기 어려운 납덩이같은 침묵으로, 또 빠져 들 것이다.

    한 때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지 못한 책임은 망각하고 1970년 대 말까지 부역자라는 죄명으로 가족까지 벌했다. 그들이 겪었던 수난 시대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더 끔찍한 것은 우리는 같은 시대에서 있으면서 이데올로기에 갇혀 당연시 살아왔다는 것이다.

    아픔의 역사는 흐르고 시간도 벌써 68년이나 지났다 가야산에서 벌어진 좌우 사상 대립은 많은 사람들에게 견디기 힘든 상처를 안겨줬다.

    이들은 지리산으로 입산했던 남부군 소속의 빨치산이 아닌 내포지역 빨치산들이다.

    6.25 한국전쟁 발발하고 68여 년이 지났음에도 가야산의 빨치산에 대한 연구는 없다.

    이제는 좌우를 떠나 역사상 가장 비극을 남긴 빨치산 활동을 객관적으로 연구해 후손들에게 알려줘야 한다. 더 이상 이런 비극이 발생하지 않기 위해서다.

    당시 전쟁을 겪었던 미군, 국군, 지역 방위군, 빨치산 모두 역사 앞에 죄인이자 패자가 아닌가.

    비극적인 무대였던 가야산의 빨치산 역사를 당당하게 풀어내야할 것이다.

    한국전쟁 68년 만에 한반도를 중심으로 꿈도 꾸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종전 선언과 평화 협정 이후 남한과 북한이 자유롭게 왕래로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에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종전선언과 평화체제의 한반도를 기대하며…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 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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