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살아야 한다
책은 살아야 한다
스토리밥 작가 협동조합의 ‘그곳에 가면 이야기가 있다’ ⑨ 함순례 시인의 원동 헌책방 순례기
  • 스토리밥 작가 협동조합
  • 승인 2015.02.10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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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당서점

나는 책을 좋아한다. 그것도 새책을 좋아한다. 도서관에서 빌려보는 것도 즐겨 하지 않는 편이다. 공부에 필요한 교과서나 참고서뿐만 아니라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대부분 새책을 사곤 했다. 일상의 속도에 따라 천천히 혹은 빠르게 그리고 여백에 자유롭게 메모하거나 밑줄을 치며 읽는 것을 즐긴다. 누구의 손때도 묻지 않은 새책의 행간에 나의 호흡과 사유를 담는 습관 때문이다. 숫눈 위에 첫 발자국을 찍을 때의 신선함 같은 것이다. 독서량이 남들보다 대단한 것도 아니고 책 구입비용이 어마어마하지도 않다. 다만 책에 대한 태도가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한 내가 헌책방 거리에서 반나절을 보낸 날이 있었다. 타지에서 대전에 놀러온 친구와 무엇을 하며 놀까 궁리하던 중, 헌책방을 둘러보고 싶다는 친구의 바람으로 찾게 되었다. 북클럽을 운영하고 있는 친구는 헌책방 매니아였다.

▲ 육일서점
눈을 크게 뜨면 돈이 보인다
대전중앙시장 한복거리 옆 신중앙시장 주차타워 앞에 몇 개의 헌책방들이 모여 있다. 주차를 하고 거리에 나서자 나란히 붙어 있는 영창서점, 고려당서점, 부여서점이 눈에 들어왔다. 비교적 날씨가 온순한 주말 오후라 그런지 여러 명의 손님들이 책을 고르고 있었다. 책들이 첩첩 산을 이루고 있는 고려당서점 앞에는 책더미를 의자 삼아 서너 분의 어르신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 중의 연세 지긋하신 노인이 주인 장세철 씨(80세)였다. 50여 년 가까이 헌책방과 함께해온 산증인이다. 친구가 익숙하게 책을 고르는 동안 나는 어르신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나라에 칼라책이 부족한 때였는데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책들을 보니 칼라책들이 많았어. 저걸 그냥 쓰레기로 버리면 안 되겠다 생각했지. 예상대로 잘 팔렸어. 그게 도화선이 되어 지금껏 이어지고 있네.”
“뭐 찾아요? 말씀만 하면 나오요.”

장 씨는 단골들과 쌍화탕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도 사람들이 다가오면 먼저 말을 건네고 책을 찾아주곤 했다. 아주 좁은 입구의 다락방창고에도 서슴없이 드나든다는 장 씨는 정정했다. 인심도 좋다고 한다. 오늘같이 쌍화탕이나 커피 한 잔 기어코 대접한다고 했다.

그림을 공부하는 한 단골은 그림책 몇 권을 골랐다. 민화, 삼국지 등의 그림을 그리며 문인화, 한국화 등의 캐릭터를 구상한단다. 엄마와 함께 헌책방을 찾은 아이는 보물을 찾듯 책더미를 뒤졌다. ‘먼나라 이웃나라’․‘Why’․‘그리스로마신화’ 시리즈들이 눈에 띄었다. 아이 키우는 집이면 으레껏 읽히는 책들이다. 헌책방에서는 새책보다 적은 비용으로 양질의 책을 구입할 수 있으니 보물인 셈이다.

“직업이지만 재미있으니까 하는 거지. 국문과를 전공하고 학교 연구실에서 근무하다가 서점을 열게 되었는데 고소설이나 가사에 관심이 많아 희귀본이 들어오면 자료를 찾아보곤 했지. 단골 대학 교수들에게 연결하여 논문에 포함되기도 하고 대학박물관에 전시도 되니 재미있는 거지. 눈이 보배라고, 잘 찾아봐. 진귀한 책을 발견하면 그게 돈이야.”

“책을 팔 때도 봉사하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해. 베스트셀러라고 덮어놓고 좋은 게 아니듯 그 사람에게 꼭 필요한 책을 찾아주어야 하지. 한 권의 책이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하기도 하거든.”

동국정운, 국보 영인본을 만나다
오랫동안 몸담아온 직업의 가치와 재미를 전해준 고려당서점 주인과 헤어진 후 원동 사거리 큰 길 쪽으로 조금 나아가 육일서점에 들렀다. 육일서점은 서너 개의 분할된 공간에 분류별로 책꽂이가 정리되어 있다. 전통시장 이부자리 옆 자투리 공간에도 책꽂이가 마련되어 있고 출입문 상층부에도 전집류가 화분처럼 놓여 있다. 5년여 전 육일서점을 인수한 조방현 씨는 80년대 홍명서점을 운영했고, 서적도매업에 몸담기도 한 서점맨이다. 독서를 좋아하고  특히 사회과학과 역사에 관심이 많은 주인답게 관련서적들이 즐비하게 꽂혀 있다.

서점 안에서 고문헌과 필사본을 열람하고 있는 한 손님을 만났다.
“1986년부터 헌책방을 다녔는데 빠른 속도로 없어지고 있어 안타까워요. 250년 전 책도 깨끗한 책이 많아요. 옛날책은 예술성이 짙어 입이 떡 벌어질 때가 있죠. 활자 자체가 예술이에요.”

그가 고른 책들을 보여주었다. ‘노소상부록’‧‘이유당실기서(苡憂堂實記序)’‧‘우리한지’‧‘동국정운(東國正韻) 1권’‧‘월인석보(月印釋譜) 1,2권’‧‘동몽선습(童蒙先習)’과 동생 주려고 샀다는 고전 한의서였다. ‘노소상부록’ 책갈피 속에는 1938년 경산군 남산면의 세금고지와 부적이 끼어 있었다. 책과 함께 당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덤이다. 나는 한자에 어두웠지만 그의 친절한 설명을 들으며 잠시나마 고문헌의 가치와 예술적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고객과 고객이 서로의 관심사와 정보를 나누는 것도 헌책방의 매력이다.

그 중 ‘월인석보(月印釋譜)’는 조선시대, 1459(세조 5)년에 임금의 명으로 고승 10명과 김수온(金守溫) 등이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과 ‘석보상절(釋譜詳節)’을 합하여 엮은 석가의 일대기이다. 훈민정음 창제 이후 처음 나온 불경 언해서로서 국어사에서 매우 귀중한 문헌이다. 목판본. 초간본 10권(권1·2·7·8·9·10·13·14·17·18) 8책과 중간본 4권(권21·22·23·25) 4책이 보물 제745호로 지정되었으며, 초간본 2권(권11·12) 2책이 보물 제935호로 지정되어 있다. ‘동국정운(東國正韻)’은 1448년(세종 30) 신숙주(申叔舟)·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 등이 세종의 명으로 편찬하여 간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운서(韻書)이다. 6권 6책. 활자본. 국보 제71호(간송미술관 소장, 권1·권6)와 국보 제142호(건국대학교박물관 소장, 완질)가 있다. 헌책방에 나와 있는 것은 둘 다 영인본이다.

▲ 청양서점김진문씨
정감 가득한 청양서점
사십 년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청양서점은 공간도 크고 비교적 깔끔하게 책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바닥부터 높은 천정까지 책들이 꽂혀 있는 서점에서 몇 시간을 소일해도 좋을만큼 정감이 가는 책방이었다. 무엇보다 구석구석 스며 있는 주인의 정성이 남다르게 다가왔다. 출입문 쇠손잡이에 고객이 다치지 않도록 폼으로 마감한 거라든지, 장판으로 책장 모서리를 갈무리한 거라든지, 자투리 공간도 허투루 비워두지 않고 책꽂이를 만들어 배치한 흔적들은 이곳이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는 듯했다. 한쪽 벽면에 붙여 놓은 “웃는 곳, 하하하~”라는 글귀는 미소를 머금게 한다.

“모두 아버지 솜씨들이에요. 서점문을 닫은 이후에도 아버지가 이런 저런 갈무리를 하고 있으니 어머니 또한 퇴근할 수 없어서 고생하시기도 했는데 부모님 세대에는 여기에 모든 걸 담았기에 정성을 다했죠.”

부모의 업을 이어받아 서점을 운영하고 있는 아들은 서점 안에 걸려 있는 흑백사진이 아버지라고 일러 주었다. 지금의 청양서점을 일궈온 사진의 주인공 김진문 씨는 훈남이다.

▲ 전통시장과함께하는육일서점
책 좀 봤으면 좋겠어요
헌책방을 찾는 사람들은 다양했다. 당시(唐詩)를 찾는 사람, 맛집책을 찾는 사람, 시험서나 실용서를 구하는 사람, 고문헌이나 희귀본 등 일반 서점에서 구할 수 없는 책을 찾는 연구자들도 많다. 육일서점에서 만난 한 분은 서당을 하시며 명필가로 유명했던 할아버지의 유품을 찾아 자주 헌책방을 찾는다고 했다. 큰어머니가 다 팔아 없앤 할아버지의 글씨가 혹시라도 돌고 돌아서 헌책방에 나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아요. 공부, 학습, 스펙 쌓는 위주로 돌다보니 그렇죠. 헌책방이 조명되기도 하고 취재도 많이 오는데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책 좀 봤으면 좋겠어요. 헌책 새책 가릴 것 없이…”

서점주인의 바람뿐이겠는가. 헌책방의 매력은 폐지로 버려질 수 있는 책들이 숨결을 이어간다는 것. 그리고 헌책방 서점 주인과 단골들은 주인과 고객의 관계를 뛰어넘는다. 고객과 고객 간에도 자연스러운 소통이 이루어진다. ‘하늘아래 남의 책을 인용하지 않고 새로운 것이 나오기는 어렵다’는 법고창신의 정신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새책만을 고집했던 내게도 작은 변화가 생겼다. 헌책방 매니아인 친구의 도움이 컸다. 헌책방을 순례하며 구입한 책들이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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