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재 콩트, 살다보면…] 막걸리 처방전
[정덕재 콩트, 살다보면…] 막걸리 처방전
  • 정덕재 시인
  • 승인 2021.03.28 17: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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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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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충청 정덕재 시인] “요즘 어디 안 좋으세요? 술을 끊었다는 소문이….”

사흘째 금주를 이어가고 있다는 소식에 후배는 다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제저녁 술자리에서도 밥만 먹고 들어갔다는 걸 전해들은 모양이었다. 술잔을 뿌리치기란 대단한 인내심이 필요하다. 고깃집에서 먼저 냉면 한 그릇을 주문한 뒤 후루룩 먹는 데는 불과 십분 남짓, 두 시간 가까이 이어진 술자리는 차라리 고문이었다. 대화는 앞뒤 맥락도 없었다. 하루만 늦게 팔았어도 오십만 원은 더 벌었을 텐데, 영양가 없는 주식 이야기나, 술만 안 마셔도 살 빼기 쉽다며 폭탄주를 즐기는 녀석의 쓸데없는 다이어트 이야기나, 압축하면 주워 담을 게 별로 없는 술자리였다. 그동안 나도 저렇게 술을 마셨구나, 하면서 잠시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잡스러운 대화를 들으면서 술잔을 들지 않은 것은 나름의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내일 건강검진이라.”

“건강 검진한다고 평소에 꾸준히 마시던 술을 마시지 않으면 그게 제대로 된 결과가 나오겠어요. 검진이라는 게 평소의 건강상태를 진단하는 건데 이삼일 전부터 금주를 하면 왜곡된 결과가 나오죠. 참으로 이상한 분이시네.”

후배는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건강검진 앞에서 소심한 태도를 보이는 나를 힐난했다. 본인은 건강검진 전날까지 술을 마셨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아직 혈압약 한 알 먹지 않는다는 말을 자랑스럽게 내뱉었다.

“위나 대장은 수면으로 하세요?”

“아니, 나는 수면내시경을 한 번도 안 해봤어.”

“정말요, 놀라운 일이네요. 참으로 독하시네.”

40대부터 챙기기 시작한 건강검진에서 내시경 검사는 모니터를 직접 확인하며 받았다.

“내가 눈을 부릅뜨고 내시경을 하는 이유는 걱정이 많아서 그래. 혹시 대장하고 바로 위내시경을 할까 봐 그렇지.”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말 그대로 항문으로 들어간 내시경 장비를 바로 입에 넣어 위장검사를 할까 봐 그렇다는 거지. 순서를 거꾸로 하면 그나마 괜찮긴 하겠지만, 상상만 해도 끔찍하잖아.”

내가 몸서리치며 말하는 모습에 후배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냐며, 검사시스템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며, 그런 병원이 세상에 어디에 있냐며 나의 괜한 망상을 맹비난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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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일찍 병원에 갔다. 검진환자들로 대기실은 북적댔다. 가운을 입고 앉아 있는데 나이 칠십은 훌쩍 넘어 보이는 어르신이 말을 걸어왔다.

“어디 검사 받으려구?”

“매년 하는 정기검진이에요.”

“정기검진 받으면 회사서 돈이 나오나?”

“네 기본적인 건 나오죠.”

“그거 좋구먼, 난 돈 아까워서 피만 뽑아.”

“그래도 나이 드시면 내시경도 정기적으로 하셔야 될텐데.”

“소화 잘되고 똥 잘 싸는디 뭘.”

단순 명쾌하게 본인의 건강상태를 정리하는 할아버지는 소주보다는 막걸리를 마시는 게 건강을 지키는 지름길이라는 말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내 친구 중에 소주만 마시던 애들은 골골하거나 죄다 세상 떴어. 막걸리 마신 친구들만 남아 있다구. 술은 막걸리가 젤여.”

막걸리를 즐기지 않는 나로서는 곤혹스러운 조언이었지만, 막걸리 마신 친구만 남아있다는 말에는 묘한 설득력이 있었다.

차례가 되어 몸무게와 키 재는 걸 시작으로 검진에 들어갔다. 몸무게는 68kg, 키는 168cm를 가리켰다. 1년 전에 비해 무려 1cm나 줄어들었다. 축구의 신이라 불리는 리오넬 메시와 내가 똑같은 169cm였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었는데, 그 위안마저 무너져 버린 것이다.

“그냥 반올림해서 170이라고 적으면 안 되나요?”

나는 간호사에게 지난해에는 169cm였다며 170cm로 적어달라는 부탁을 했다. 조금 억지스러운 부탁을 한 것은 메시도 그렇게 키가 컸다는 심증이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인터넷 포털에 나온 메시의 키는 169cm였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170cm으로 검색되기 시작했다. 아마 메시도 건강검진을 받으면서 간호사에게 170cm이 되고 싶은 욕망을 호소했을 것이고, 나는 그의 팬인 간호사가 적극 수용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했다.

“이게 무슨 고무줄이에요. 168입니다.”

간호사는 단호했다.

“아침이라 몸이 굳어 그럴텐데. 작년에는 10시쯤 검사를 했거든요. 한 두 시간 움직이다 보면 1-2센치 늘어나는 건 일도 아닐걸요.”

“그럼 몸무게 68키로를 70으로 늘릴까요?

구차스럽게 키를 늘리려 호소하고 있는데 간호사는 예상하지 못한 기습질문을 날렸다. 그동안 이런 역습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키 169cm와 170cm가 어마어마한 느낌의 차이가 있듯, 몸무게 68kg과 70kg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내 또래쯤으로 보이는 간호사는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혀만 내밀면 메롱 내가 이겼지, 이런 풍경이 연상되는 장면이었다. 시계는 8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내시경 검사 결과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침을 질질 흘리고, 허리를 잔뜩 웅크린 채 신음을 내야 하는 과정이 일종의 굴욕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우려는 기우로 끝났다. 대장을 넣었던 내시경 장비가 위로 곧바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젊은 의사는 약간의 식도염 증세를 보이는 정도라고 했다.

“2년 전에 장 출혈이 있어서 걱정했거든요.”

“걱정할 정도는 아녜요 아버님. 약을 먹을 정도도 아니고요, 혹시 중간에 속이 자주 쓰리면 와서 약 타가세요.”

아버님이라는 호칭을 따져볼까 잠시 고민하다가, 친절한 의사의 심기를 굳이 건드릴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수고했다는 인사를 건네고 진료실을 나왔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으며 한쪽 다리로 서서 바지를 벗고 입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목욕탕에서 할아버지들이 마룻바닥에 앉아 옷을 벗고 입는 모습에 의아했던 기억이 스쳤다. 결국 나이 듦은 한쪽 다리로 지탱을 하는지 못 하는지 여부로 결정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탈의실에서 나와 수납창구 앞에 앉아 주위를 살펴보았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검사를 받느라고 대기하고 이동하고 있었다. 막걸리를 마시라는 할아버지가 저만치에서 혼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나 할아버지에게 다가갔다. 나를 한 번에 알아보는 눈치였다.

“다 끝나셨어요?”

“늙으면 피 한번 뽑기도 대간햐.”

“힘드셨어요?”

“몸뚱아리 움직이는 거 자체가 힘들지 뭐.”

“검사는 괜찮으시대요?”

“별 탈이야 있겄어. 또 탈이 있다고 해도 어쩌겄어. 내 몸은 내가 젤 잘 알어.”

“근데 왜 안 가시고요.”

“아들이 델러 온다고 혀서, 굳이 안 와도 되는디, 일이 바쁜 앤디.”“아드님이 효자네요.”

“내가 크게 병치레 안 하니까 그냥 효자가 된 거지,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도 있잖여.”

“듣고 보니까 그러네요.”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할아버지의 아들이 들어왔다. 사십 대 중반쯤은 되어 보였다. 아버지를 부축하는 모습은 다정했다. 병들지 않고 늙어가고, 혹여나 병이 들더라도 직립보행으로 병원에 다녀야 하고, 그도 아니면 지팡이라도 의지해서 늙어간다면 그나마 편안한 늙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며 세월을 견디고 있다면,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검사결과가 좋은 모양이네요.”

저녁에 술 한 잔 하자는 말에 후배는 밝은 표정으로 화답했다. 어제저녁 술자리에서 밥만 먹었던 식당에 갔다. 화장실에서 손을 닦고 온 사이에 탁자 위엔 소주와 맥주가 놓여 있었다.

“그동안 얼마나 드시고 싶었겠어요. 제가 시원하게 한 번 제조해 보겠습니다.”

“여기 막걸리 없나?”

“뭐, 지금 막걸리라고 하셨나요?”

그동안 셀 수 없을 정도로 자주 술자리를 가졌던 후배는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그 어떤 술집에서도 막걸리를 먼저 찾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처방을 받았는데 막걸리를 마시라고 해서.”“세상에 어떤 병원에서 그런 처방을 해요.”

“진짜라니까, 병원에서 그렇게 처방했다니까.”

병원 대기실에서 만난 할아버지의 말을 처방으로 들었으니, 의사가 아니라 병원에서 받은 처방이라는 말은 궁색하지만 솔직한 처방전임에는 분명하다. 해창막걸리, 송명섭막걸리, 양촌막걸리 등 처방전이 여러 개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정덕재 시인
정덕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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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재 시인
199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으로 등단, 시집 ‘비데의 꿈은 분수다’, ‘새벽안개를 파는 편의점’, ‘나는 고딩아빠다’, ‘간밤에 나는 악인이었는지 모른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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