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천년의 세월을 담다 132] 일본의 꿈, 부여의 꿈 사이에서 난감한 섬잣나무...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섬잣나무
[나무, 천년의 세월을 담다 132] 일본의 꿈, 부여의 꿈 사이에서 난감한 섬잣나무...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섬잣나무
  • 채원상 기자
  • 승인 2021.09.08 09: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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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충청 글 백인환 기자, 사진 채원상 기자] 마지막 빙하기였던 1만 5000년 전까지 육지와 연결됐던 제주도와 달리 250만 년 전 화산 폭발로 생성된 울릉도와 독도는 동해 큰 바다에 외로이 솟아올라 육지와 단절됐다.

삼면이 대륙과 반도로 둘러싸인 서·남해 섬들이 육지와 빈번한 생물 교류로 육상 생물과 동일한 종들이 서식하지만, 울릉도와 독도는 대양 도서(Oceanic Island)라는 특별한 서식 환경으로 육지 생물과 생김새가 유사하나 유전적으로 다른 생물들이 살게 됐다.

예를 들어 육지나 서해 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산딸기에 가시와 털이 많은 이유는 초식동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함인데, 울릉도의 ‘섬나무딸기(섬산딸기)’는 자신을 위협하는 동물이 원래부터 없었기 때문에 굳이 가시와 털이 필요하지 않은 이유처럼 울릉도는 육지와 다른 전략으로 살아가는 생물들이 많다.

울릉도 생물 이름에 ‘섬’, ‘울릉’, ‘우산’ 등의 접두어가 붙은 식물이 많은 이유도 바로 이러한 고립된 섬 특유의 진화방식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섬잣나무도 육지의 잣나무와 다른 선택을 한 것 같다.

5개의 바늘잎과 15m 이상으로 통직하게 자라는 나무 성질은 육지의 잣나무와 동일하지만 짧은 잎과 작은 솔방울은 울릉도 섬잣나무만이 가지는 특징이다.

육지의 잣나무가 청설모나 다람쥐를 비롯하여 잣까마귀, 솔잣새 등의 잣을 즐겨 따먹는 야생동물과 상호 협력 관계를 맺었다면, 울릉도의 잣나무는 공생할 수 있는 야생동물이 없어 종자에 날개를 달아 바람에 멀리 보내려 했던 점도 육지와 울릉도 잣나무의 구별되는 특징이다.

잣나무는 오래전부터 사람 손을 많이 탄 나무이다.

육지의 잣나무가 목재와 씨앗(잣)을 주로 이용했다면, 섬잣나무는 조경과 분재용 나무로 이용했다.

일찍이 중국과 한반도로부터 분재를 수입하여 분재 예술을 꽃피운 일본은 섬잣나무가 다른 침엽수와 달리 잎이 짧고 배수가 좋은 땅을 선호하는 점을 들어 조경과 분재에 적합한 ‘오엽송’으로 개량했다.

우리가 공원과 아파트, 분재와 같이 주변에서 흔히 보는 섬잣나무는 일본이 개량한 오엽송일 가능성이 높다.

부여군청 앞 계백장군 동상 주변의 네 그루 섬잣나무도 정확히 얘기하면 오엽송이다.

현재 나이 140살에 7.5m 수고, 우람한 반원형의 섬잣나무는 2001년도에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고 오래된 이유로 보호수로 지정됐다.

네 그루의 섬잣나무 보호수가 로터리에 심어진 이유는 연륜을 떠나서라도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가야 한다.

일제강점기 때 일제는 민족말살정책 일환으로 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라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세뇌시키고자 고대 일본과 관련이 깊은 부여에 ‘신도(新都)’와 그 핵심 시설인 ‘부여신궁(夫餘神宮)’을 1939년부터 조성하기 시작했다.

1925년 조선을 영구 통치하고자 서울 남산에 여의도 면적의 두 배에 이르는‘조선신궁(朝鮮神宮)’을 조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당시 부여 인구 1만 4천 명 수준을 넘어선 7만 명 규모의 신도(神都)로 건설하고자 부여면과 규암면 일대 1,338만 평에 달하는 부여 시가지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총독부 고시 제900호, 1939. 10. 31).

당시 일제는 부여신궁을 건설하기 위해 엄청난 건축재를 비롯하여 수많은 조경수가 필요했다.

‘실록 충남반세기(저자 변평섭)’와 ‘역사와 전설로 만나는 부여의 나무이야기(저자 박상진)’는 부여신궁에 필요한 조경수를 조선과 일본에서 헌수를 받거나 묘목을 심었고, 부여 섬잣나무도 이때 수집된 나무라 추정하고 있다.

다행히 부여신궁은 일본이 패망하기 전까지 완공되지 못했고, 섬잣나무는 부여고등학교 교정에 남겨졌다가 1966년 계백장군 동상이 세워지면서 네 그루는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이때부터 섬잣나무는 부여신궁 조성을 목적으로 반입된 나무라는 원죄로 최근까지 이전 주장이 제기돼 왔다.

사실 나무에는 죄가 없다.

벚꽃 축제가 벚꽃을 즐기는 일본을 따라 한다고 벚나무를 제거하지 않는 것처럼 섬잣나무가 단지 일제의 손을 탄 이유 빼고는 부여 사람들하고 현대사를 같이 한 나무라는 점에서 가치가 매우 높은 나무이다.

“최근까지 섬잣나무 이전 논란이 계속 이어져 왔지만, 현재 보호수 이전 계획은 보류 중이다”라는 부여군 담당자 얘기도 이전만이 능사가 아님을 엿볼 수 있다.

고대사나 현대사 분야는 민족의 우월성부터 지배와 피지배 간의 정치적 논쟁으로 이어지면서 여전히 일본과 감정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부여신궁은 여러모로 지금의 부여를 만든 역사적 사실이다.

일제의 통치 전략으로 부여는 이전 역사와 많이 단절되었고, 현재의 부여 모습에도 일제가 꿈꾼 부여신도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섬잣나무를 통해 부여의 현대사를 재조명해 부여를 이해하고 내일의 부여를 생각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부여군 동남리 765-1 부여군청 앞 : 섬잣나무 4본 140살(2021년 기준)

[나무, 천년의 세월을 담다]는 충청남도 지원을 받아 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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