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밖에도 효부 애분(愛分), 열녀 옥계(玉桂)의 애틋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옥계는 비천한 노비출신이었다. 과거 삼정동의 ‘젖밭’이라는 들에 열녀비가 있었다. 옥계는 정유재란 때 왜군이 가슴을 만지며 희롱하자 젖을 도려내고 자결하였다. 댐으로 마을이 수몰되면서 비는 충남대학교 교정으로 옮겨졌다.
효는 백행의 근본이라 하였다. 예로부터 숱한 고사와 일화가 전한다. 삼강려의 고을 대덕은 유독 효행이 으뜸이었다. 그 하나가 은진송씨 3세에 걸친 효행이다. 3세란 3대를 말하지만 4대에 이르는 동안 3대가 이름난 효자였다. 그 1대가 송경창이다. 2대 송시승은 (송경창의) 손자이고, 3대 송유관은 증손자이다. 송경창의 아들 송유록은 부친과 조부가 왜구에게 피살되는 것을 목격한 후 절치부심하여 무관이 되었다. 정유재란에 거제도에서 왜적과 싸워서 큰 전공을 세웠다. 뒤에 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었다.
송경창(1541~1592)은 52세가 되던 해에 임진왜란을 맞았다. 회덕에 살던 그는 왜적이 몰려오자 81세의 부친을 모시고 피란을 가던 중 왜적과 만났다. 당시 왜구들은 노인들을 보이는 대로 살상했다. “늙은이들이 젊은이들을 선동하여 의병을 일으키게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부친을 해치려 할 때 사정을 하니 왜적도 효심에 감동하여 물러가려 했다. 이 때 부친이 왜적들에게 호통을 치자 다시 칼을 빼었다. 송경창이 두 팔을 벌려 부친을 가로막자 오른팔을 자르고 왼팔마저 내려친 후, 부자를 함께 살해하고 말았다. 1592년 8월 9일의 일이었다. 왜란이 끝난 후 송경창의 효행이 조정에 알려지자 정려를 내렸다. 또 그림으로 그려서 ‘삼강행실록(三綱行實錄)’의 부록으로 삼도록 하였다.
송유관(1627~1665)은 송시승의 아들이다. 송준길·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나 벼슬에는 뜻이 없었다. 그는 부친이 전염병으로 죽었을 때 겨우 열두 살 이었다. 돌보아 주는 이가 없어도 상을 치러서 예법에 부족함이 없었다. 후에 어머니가 병들자 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먹여드렸다. 상을 당해서는 좁쌀죽을 먹으며 토굴에서 지냈다. 온 몸에 부기가 생기고 두 눈이 어두워지더니 마침내 상기(喪期)를 마치지 못하고 죽었다. 이들 3대의 정려가 동춘당 공원 안에 있었다. 지금은 작은 유허비(宋氏三世孝子旌閭舊墟碑)만 남아있다.
송기문은 순조 2년(1802)에 태어나서 진골(현 장동)에서 살았다. 정려는 장동의 한적한 밭 가운데 있다. 그는 부친이 위독하자 대변을 맛보고 손가락을 끊어 피를 먹여서 석 달을 연명시켰다. 상을 당하자 땅을 치며 울부짖다가 자주 기절하였다. 3년 안에 또 모친이 병들자 구호하기를 몸소 하고 남에게 시키지 않았다.
대변을 맛보고 손가락을 끊어 부친에게처럼 피를 드리니 넉 달이나 더 연명하였다. 세상을 떠나자 조석으로 호곡하니 초군목동과 지나는 행인들이 모두 감동하였다. 이런 사실들은 모두 문헌으로 전하고, 유적으로 남아있다. ‘할고단지(割股斷指)’는 전설이 아니라 과거 우리 고장 효자들의 일상이었다.
오래 전 오웅진 신부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음성 꽃동네에 어느 할머니가 버려졌더란다. 수소문 하여 가족을 찾고 보니, 대전의 모 대학 교수가 그 아들이었다고 했다. 엄마가 뺨을 때렸다고 아홉 살 난 아이가 경찰에 신고하는 세상이다. 늙은 부모가 자식을 상대로 불효소송을 거는 세상이 되었다.
“父父子子”는 언감생심일까? 우리 고장은 충효로 이름이 났었다. 유독 효자효부들이 많았다. 전국유일의 효를 테마로 한 뿌리공원은 거저먹은 것이 아니다. 대전의 자랑, 시민의 긍지이다. 효는 현대인들의 덕목이 되어야 할 것이다. 굳이 효를 화두로 삼은 이유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