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역사 바로알기] 대덕의 정신 ‘효(孝)’
[대전역사 바로알기] 대덕의 정신 ‘효(孝)’
  • 김정곤
  • 승인 2015.03.19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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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시직정려
▲ 삼강려암각 (옮긴 후)
[굿모닝충청 김정곤 전통예절 및 향토사학연구가] 대덕에는 정려들이 많았다. 삼강의 정려들이 마을 곳곳에 있었다. 삼강이란 군신·부자·부부의 인간관계로서 ‘충효열(忠孝烈)’로 요약된다. 병자호란 시 강화도에서 순절한 이시직, 은진송씨 3세와 차윤주 형제, 고흥류씨와 은진송씨 사적들이 있다.

이 밖에도 효부 애분(愛分), 열녀 옥계(玉桂)의 애틋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옥계는 비천한 노비출신이었다. 과거 삼정동의 ‘젖밭’이라는 들에 열녀비가 있었다. 옥계는 정유재란 때 왜군이 가슴을 만지며 희롱하자 젖을 도려내고 자결하였다. 댐으로 마을이 수몰되면서 비는 충남대학교 교정으로 옮겨졌다.  

효는 백행의 근본이라 하였다. 예로부터 숱한 고사와 일화가 전한다. 삼강려의 고을 대덕은 유독 효행이 으뜸이었다. 그 하나가 은진송씨 3세에 걸친 효행이다. 3세란 3대를 말하지만 4대에 이르는 동안 3대가 이름난 효자였다. 그 1대가 송경창이다. 2대 송시승은 (송경창의) 손자이고, 3대 송유관은 증손자이다. 송경창의 아들 송유록은 부친과 조부가 왜구에게 피살되는 것을 목격한 후 절치부심하여 무관이 되었다. 정유재란에 거제도에서 왜적과 싸워서 큰 전공을 세웠다. 뒤에 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었다.

송경창(1541~1592)은 52세가 되던 해에 임진왜란을 맞았다. 회덕에 살던 그는 왜적이 몰려오자 81세의 부친을 모시고 피란을 가던 중 왜적과 만났다. 당시 왜구들은 노인들을 보이는 대로 살상했다. “늙은이들이 젊은이들을 선동하여 의병을 일으키게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부친을 해치려 할 때 사정을 하니 왜적도 효심에 감동하여 물러가려 했다. 이 때 부친이 왜적들에게 호통을 치자 다시 칼을 빼었다. 송경창이 두 팔을 벌려 부친을 가로막자 오른팔을 자르고 왼팔마저 내려친 후, 부자를 함께 살해하고 말았다. 1592년 8월 9일의 일이었다. 왜란이 끝난 후 송경창의 효행이 조정에 알려지자 정려를 내렸다. 또 그림으로 그려서  ‘삼강행실록(三綱行實錄)’의 부록으로 삼도록 하였다.

▲ 송씨효자3세 유허비
송시승(1583~1638)은 송경창의 손자로 원종공신에 녹훈된 송계록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33세가 되던 광해 7년(1615)에 부친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베어 피를 흘려드림으로써 열흘 동안 생명을 연장시켰다. 상을 당하자 이사리(현 동구 이사동)에 장례를 치르고 삼년간 시묘를 하였다. 여름에는 습기가 차고, 겨울에는 눈물이 얼어붙고 손발이 터지는 움막에서 죽으로 끼니를 때웠다.

송유관(1627~1665)은 송시승의 아들이다. 송준길·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나 벼슬에는 뜻이 없었다. 그는 부친이 전염병으로 죽었을 때 겨우 열두 살 이었다. 돌보아 주는 이가 없어도 상을 치러서 예법에 부족함이 없었다. 후에 어머니가 병들자 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먹여드렸다. 상을 당해서는 좁쌀죽을 먹으며 토굴에서 지냈다. 온 몸에 부기가 생기고 두 눈이 어두워지더니 마침내 상기(喪期)를 마치지 못하고 죽었다. 이들 3대의 정려가 동춘당 공원 안에 있었다. 지금은 작은 유허비(宋氏三世孝子旌閭舊墟碑)만 남아있다.

차윤주 정려각
차윤주·차윤도 형제의 정려각은 대덕구 미호동(대청댐광장 아래)에 있다. 미호천을 끼고 산책로가 있어서 많은 시민이 오가지만 좀처럼 눈길이 미치지 않는다. 차윤주는 정조 때 회덕 일도면(현 신탄진 미호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마을에서 효동이라 일렀다. 모친이 학질로 죽을 지경에 이르자 인육(人肉)을 먹으면 낳는다는 말에 허벅지 살을 베어 국을 끓여드렸다. 곧 어머니 병이 나았고, 베어낸 곳은 평상대로 회복되었다고 한다. 모친상을 당하여 슬픔으로 몸이 손상되고, 흘린 눈물이 무덤을 적셨다. 3년 동안 풍우한서를 무릅쓰고 산소를 찾아 호곡하니 세상이 모두 효자라고 소문이 자자하였다.

송기문은 순조 2년(1802)에 태어나서 진골(현 장동)에서 살았다. 정려는 장동의 한적한 밭 가운데 있다. 그는 부친이 위독하자 대변을 맛보고 손가락을 끊어 피를 먹여서 석 달을 연명시켰다. 상을 당하자 땅을 치며 울부짖다가 자주 기절하였다. 3년 안에 또 모친이 병들자 구호하기를 몸소 하고 남에게 시키지 않았다.

대변을 맛보고 손가락을 끊어 부친에게처럼 피를 드리니 넉 달이나 더 연명하였다. 세상을 떠나자 조석으로 호곡하니 초군목동과 지나는 행인들이 모두 감동하였다. 이런 사실들은 모두 문헌으로 전하고, 유적으로 남아있다. ‘할고단지(割股斷指)’는 전설이 아니라 과거 우리 고장 효자들의 일상이었다.

오래 전 오웅진 신부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음성 꽃동네에 어느 할머니가 버려졌더란다. 수소문 하여 가족을 찾고 보니, 대전의 모 대학 교수가 그 아들이었다고 했다. 엄마가 뺨을 때렸다고 아홉 살 난 아이가 경찰에 신고하는 세상이다. 늙은 부모가 자식을 상대로 불효소송을 거는 세상이 되었다.

“父父子子”는 언감생심일까? 우리 고장은 충효로 이름이 났었다. 유독 효자효부들이 많았다. 전국유일의 효를 테마로 한 뿌리공원은 거저먹은 것이 아니다. 대전의 자랑, 시민의 긍지이다. 효는 현대인들의 덕목이 되어야 할 것이다. 굳이 효를 화두로 삼은 이유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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