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과 아파트
쌀과 아파트
  • 전우용 역사학자
  • 승인 2023.01.16 16:50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굿모닝충청 전우용 역사학자]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2021년 한국인 1인당 식량 소비량은 쌀이 57kg, 밀가루가 33kg, 육류가 54kg, 유제품이 86kg이었다. 이보다 9년 전인 2012년의 1인당 쌀 소비량은 70kg이었다.

한국인 한 사람이 9년 전보다 연간 13kg씩을 덜 먹게 된 셈이다. 통계수치가 드러내는 바와 같이, 밥은 이제 한국인의 주식이 아니다.

곡식보다 고기와 우유를 더 많이 먹는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한국인은 ‘농경민’이라기보다는 ‘유목민’이다. 게다가 인구 감소가 본격 시작했으니, 쌀 소비량은 앞으로도 계속 줄어들 것이다.

이른바 ‘자유시장경제’ 논리에만 따른다면, 벼농사는 사양산업(斜陽産業)일 수밖에 없다. 논에서 벼를 재배하는 농민들은 하루속히 지목(地目)과 작물을 바꾸거나 전업(轉業)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다.

하지만 쌀은 역사적으로 한국인의 정체성에 각인된 작물이다. 한국인들은 쌀 이외의 곡식들을 ‘잡곡(雜穀)’이라고 통칭함으로써 차별했으며, 벼농사의 작황을 기준으로 세상의 치란(治亂)을 구분했고, ‘쌀밥에 고깃국’ 먹는 것을 일상의 소원으로 간직해 왔다.

논과 벼와 쌀은 한국인들을 ‘정서 공동체’로 묶는 상징이다. 그뿐 아니라 정치·군사적으로도 쌀은 매우 중요한 곡물이다.

벼는 한국 내에서 자급도가 높은 작물이며, 국제 곡물가격이 급등하거나 외국산 농작물 수입에 차질이 생겨도 그 충격을 완화할 수 있는 작물이다.

한반도에 전쟁이라도 일어난다면, 국민의 쌀 의존도는 더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아무리 쌀 시장 확대의 전망이 어두워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게 벼농사다.

벼를 심는 농민들은, 민족 공동체의 토대를 지키는 사람이자 전략적 필수요원인 셈이다.

그런데 ‘선제타격’이니 ‘전쟁불사’니 하며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높이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윤석열 대통령과 그의 정부는 막상 쌀의 ‘전략적 문화적 가치’에 대해서는 극단적일 정도로 무지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연초 윤 대통령은 쌀 가격 보전을 위한 국회의 ‘양곡관리법 개정안’ 상정에 대해 “무제한 수매는 결코 우리 농업에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거부권을 행사할 뜻을 밝혔다.

국회 법사위가 동 개정안을 제2 소위원회에 회부한 1월 16일에는 정황근 농림축산식품부 장관도 “쌀 의무 수매는 농민과 농업에 도움 안 된다”고 단언했다. 국가 재정에 부담이 되고 쌀 공급 과잉이 심화하며, 장기적으로 쌀값에도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인데, 기본적으로 쌀 시장 격리는 ‘자유시장경제’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논리이다.

사진= YTN (2022. 12. 28.)

민족 공동체의 상징이자 전략 물자인 쌀을 수요와 공급의 ‘시장 논리’로만 파악하는 것도 문제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이 ‘자유시장경제 지상주의’가 일관되지 못하다는 데에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쌀 수매 거부’ 의사를 표명한 직후, “미분양 주택을 정부가 분양가대로 매입하는 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건설 원가도 현재 시장가도 아니고, 건설업체들이 책정한 ‘분양가’대로 매입하라는 그야말로 파격적인 지시였다.

거기에 소요될 예산은 무려 27조 원, 남는 쌀을 30년간 수매할 수 있는 액수다. 아파트가 공동체 통합의 상징도 아니고 전략물자도 아닌데, 이 ‘물건’에는 왜 ‘자유시장경제’ 논리를 적용하지 않는 것일까? 남는 쌀은 전 세계의 굶주리는 사람들을 위해 제공할 수 있지만, 남는 아파트는 그럴 수도 없다. 그런데 왜 그럴까? 아파트 건설업자들이 벼농사 짓는 농민보다 훨씬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일까?

아마 그럴 것이다. 몇 달째 세간의 화제가 되어 있는 이른바 ‘대장동 사건’을 통해 지금까지 알려진 돈 흐름을 보면, 우리 사회의 엘리트들에게 ‘건설업체’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대장동 일대에 아파트를 지어 분양하는 사업을 총괄한 업체는 전현직 판검사 여러 명에게 50억 원씩을 주었고, 언론인들에게도 수억 원씩을 뿌렸다.

그들이 매수한 사람들의 면면은 아직 다 드러나지 않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법조계와 언론계에 돈을 뿌린 업체가 화천대유 하나만은 아닐 것이라는 점이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토건업체와 개발업체들이 ‘법률적 문제’나 ‘여론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뇌물을 뿌렸는지는 그저 짐작만 할 수 있을 따름이다. 한국 사회에서 법조계와 언론계를 하나로 묶어 온 것이 뇌물이라는 의심을 거두기 어렵다.

오늘날에는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쌀 소비량에는 별 차이가 없다. 오히려 부자일수록 쌀을 덜 먹는 편이다. 부자가 쌀보다 비싼 고기, 과일, 유제품을 더 많이 먹기 때문이다.

그들은 쌀에 별 관심이 없다. 해방 직후에는 누가 “쌀이 없으면 빵을 먹으면 되지. 왜들 난리인가?”라고 말했다는 소문이 대중을 분노케 했지만, 요즘 사람들은 이런 말에 흥분하지 않는다. 반면 아파트 소비는 소비자의 재산 규모에 정확히 비례한다.

아파트 한 채도 못 가진 사람이 많은 반면, 두 채, 세 채, 나아가 수십 채까지 소유한 사람도 적지 않다. 이들이 우리 사회의 가시적 기득권자이다.

가난한 사람들, 특히 농민들에게는 아파트 가격이 오르든 떨어지든 ‘남의 일’일 뿐이다. 아파트 가격을 높은 상태에서 유지시키는 것이 국민 통합을 위해서나 국가 경제를 위해서 ‘좋은 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왜 ‘남는 쌀’은 사 주면 안 되고 ‘남는 아파트’는 사 줘야 하는가?

사진=게티이미지뱅크

건설·개발업자들은 판검사나 기자 등 ‘힘 있는’ 사람들에게 ‘로비자금’을 바치지만, 농민들은 그러지 않는다. 아니, 그럴 수 없다. 정부가 ‘안 팔린 쌀’은 사 줄 수 없다면서도 ‘안 팔린 아파트’는 사 주겠다는 황당하면서도 이율배반적인 정책을 버젓이 발표하는 것은 누구의 이익을 보장해야 부패 엘리트들에게 이익이 되는지 정확히 알기 때문이다.

현재의 대통령과 정부 관료들의 안중에 농민은 없다.

농민들이 무시당하는 것은 대체로 가난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농민들의 투표 행태가 기득권 옹호 정치세력에게 ‘농민은 무시해도 좋다’는 신호를 거듭 주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무시당할 짓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무시당하면서도 왜 무시당하는지 모르는 것은 더 어리석은 일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5longyears 2023-01-20 15:20:19
논리정연하고 설득력 있는 내용에 전적으로 공감하면서도 지금의 상황이 답답하고 안타깝습니다. 조회수가 많지 않은 굿모닝충청 외에 다른 매체에도 실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글을 꼭 읽어야 할 사람은 이 글을 절대 읽지 않을 것이 분명하지만 아마 읽어도 이해를 못할 것 같습니다.
전우용님 전에는 공중파에서 모습을 많이 뵀는데 요즘은 안 나오시는 것 같습니다. 이런 도탄지경 속에 좀더 모습을 자주 보이시면 좋겠지만 아무도 찾지 않나 봅니다.

  • 굿모닝충청(일반주간신문)
  • 대전광역시 서구 신갈마로 75-6 3층
  • 대표전화 : 042-389-0080
  • 팩스 : 042-389-0088
  • 청소년보호책임자 : 송광석
  • 법인명 : 굿모닝충청
  • 제호 : 굿모닝충청
  • 등록번호 : 대전 다 01283
  • 등록일 : 2012-07-01
  • 발행일 : 2012-07-01
  • 발행인 : 송광석
  • 편집인 : 김갑수
  • 창간일 : 2012년 7월 1일
  • 굿모닝충청(인터넷신문)
  • 대전광역시 서구 신갈마로 75-6 3층
  • 대표전화 : 042-389-0087
  • 팩스 : 042-389-0088
  • 청소년보호책임자 : 송광석
  • 법인명 : 굿모닝충청
  • 제호 : 굿모닝충청
  • 등록번호 : 대전 아00326
  • 등록일 : 2019-02-26
  • 발행인 : 송광석
  • 편집인 : 김갑수
  • 굿모닝충청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굿모닝충청.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mcc@goodmorningcc.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