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기자의 눈] ‘가야사지 석탑’ 이름 찾고 제자리에 있어야
[시민기자의 눈] ‘가야사지 석탑’ 이름 찾고 제자리에 있어야
  • 이기웅
  • 승인 2016.06.10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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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웅 예산 시민기자

[굿모닝충청 이기웅 예산 시민기자] 석탑은 가야사지에 있던 것을 1914년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 가야사터에 붕괴돼 있었지만 덕산 옥계리백모씨가 군산에 거주하는 일본인 모리 키구고로(森菊五郞)란 상인의(1906년 모리상점) 의뢰로 반출하는 것을 당시 보덕사 주지가 항의하여 다시 회수해 예산군청내에 보관하게 됐다고 1937년 예산군지는 기록하고 있다.

1936년 5월27일 충청남도지사가 학무국장에게 보낸 ‘석탑반출에 관한 건’에는 1936년 5월 20일에 예산군청에 옮겨졌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 탑은 2000년에 현재의 위치인 보덕사로 옮겨져 오늘에 이른다. 그러나 석탑의 애초에 있었던 곳와 반출에 대해 87세의 마을주민 이모의 주장은 좀 다르다.

가야사지의 북쪽에 있던 석탑은 보덕사에 세워진 석등과 마을사람들이 상여처럼 떠메어 보덕사로 옮겼다고 한다.

석탑 옆에 세워진 석등 역시 가야사지에서 같은 시기에 옮겨 세워져있다. 언제부터인지 석탑에 대한 기록은 인용되며 잘못 알려진 반출사가 역사적 사실로 정설처럼 되어 있다.

반출과정과 명칭에 대해 주민들의 아쉬움도 이번기회에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민들은 안내판의 설명과 이름부터 뜬금 없어 한다. ‘예산읍삼층석탑’인데 이 석탑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 언제 왜 예산 석탑으로 불려지는지 아무런 설명도 없다. 이제라도 석탑의 안태지인 ‘상가리석탑’, ‘가야사지 석탑’이 무리 없어 보인다.

이 석탑의 원 소재지가 가야사지이기 때문에 가야사지석탑이라든가 아니면 가야사지가 상가리이기 때문에 상가리석탑이라고 하는 것이 맞겠다.

▲ 석탑은 2.88m의 삼층석탑 1984년 5월 17일 지방문화재자료 제 175호로 지정되어 있다.

상가리 미륵불 가야사 석등과 같은 연대에 조성된 석탑
석탑과 석등은 가야사지에 있던 상가리미륵불(석조관음보살입상)의 연대가 990년께로 같은 절터에의 석탑인 점으로 미루어 석등과 예산읍삼층석탑은 990년대 중반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애초 석탑은 5층 석탑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남아 있는 석탑의 부재는 3층만 남아 있어 1층과 2.3층은 급격하게 작아지고 있다. 각 층의 지붕돌은 3단의 받침을 하고 있으며, 처마는 비교적 날렵하게 곡선을 그리고 있다. 상층부는 노반과 복발만이 남아 있다.

예산3층석탑 외 가야사지에는 70년대까지 몇 기의 탑부재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지만 삽교천의 제방석으로 반출되거나 모두 사라졌다.

결국 가야산도 타지역의 문화재 반출과 같은 있을 법한 많은 일이 있었고 당시 7기의 석탑과 2기 이상의 마애불이 반출되었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그래도 남아 있는 3층의 석탑으로 가야사의 일부라도 볼 수 있는 것에 감사해야겠다.

백제시대 가람 가야사의 폐사
가야사지는 상가리 중심에 위치하며 현재는 경작지로 변했으며 출토되는 기와조각이 백제시대와 통일신라 것이 출토되고 있다. 예산군지에도 백제 성왕 계묘(522.A.D)년 겸익대사가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가야사는 각종기록과 발굴 성과로 볼 때 3번 중창하며 17세기까지 운영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고 수덕사를 말사로 두고 가야산 가득 100개 이상의 부속암자를둔 거대한 사찰이었지만 1728~1753년쯤 폐사하고 가야사의 주변에 남아 있던 남전, 보웅전, 묘암사, 인암 등이 가야사로 모칭되며 1846년 대원군에 의해 모두 불태워지며 폐사하게 된다.

예산3층석탑으로 불려지는 탑은 가야사의 법통을 이어가던 암자중 하나의 절집에 있던 탑으로 볼 수 있다. 남연군 묘지가 조성되면서 사찰의 모든 목조물은 소진되어 폐사가 되고 이곳의 석탑과 명문이 있는 모든 석비는 명에 의해 원지의 이탈을 면할 수가 없었다.

정확한 절집의 이름은 알 수 없지만 1753년 이전이나 이후 대원군에 의해 최종 폐사하는 1846년께 폐사하며 5층석탑도 붕괴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또 하나 가야사를 상징하던 거대하고 유명한 탑이 있었다. 현재 마곡사의 탑과 비슷한 규모와 형태의 5층 석탑이 있었으며 평지 금당에서 높은 곳에 위치한 석탑까지 연결하던 77계단의 아름다운 운제가 있었다고 기록한다.

가야사의 금당지에서 금탑이 있던 높이까지 300척 정도라고 기록한다.
이철환(1722~1779)과 이의숙(1733~1807)은 비슷한 시기에 가야사를 방문하여 글을 남기는데 가야사 절집이 불타 사라진후에서 탑은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 형승조(形勝條)에 “금탑의 윗머리는 구리쇠로 씌우고 네 모서리에 철사를 꼬아 만든 줄을 걸어 늘어뜨리고 풍경을 달았다.

그 형태가 웅장하고 만든 법이 기이해 다른 탑과도 달랐다”고 적혀있다. 아마 공주 마곡사의 탑과 비슷했을 것 같다. 라마교 방식의 탑처럼 탑 상륜에 구리쇠로 보개를 씌었는데 금빛이 나서 금탑이라 한 듯하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공민왕 7년(1358) 나옹화상이 세운 것이라 전한다. 금탑이 있던 자리가 현재 남연군묘가 된다.

석탑 반출의 마을주민들 주장
석탑안내판 등 잘못 기록된 석탑 반출에 대한 기록은 마을주민의 주장과 사실과 많은 다르다. 1914년에 일본인이 반출했다는 연대는 신빙성이 떨어지며 내용의 출처가 명확하지 않다.

현재 보덕사에 있는 예산읍삼층석탑은 1940년 경 마을주민들이 힘을 모아 가야사지와 백암사지 등 절 터에 흩어져 뒹굴던 부재를 모아 3층탑 형태만 갖추어 놓은 것이다.

석탑 옆에 세워진 석등 역시 가야사지에서 옮겨 세워져있다. 어르신들은 주장은 가야사지(남연군묘주변)에 붕괴되어 깨어진 채 흩어져 있던 석탑을 마을사람들이 상여를 이용하여 떠메고 인근의 보덕사로 옮겼다고 한다.

그 시기는 어른신이 11세쯤인 (1940년경) 이라고 한다.
옥계석은 상가리마을 옥양봉과 으름재에서 합수하는 냇가에서 옥계석1개와 백암사에서 1개 수습하고 옥계석 2개와 탑신석. 노반.복발은 현재 가야사지 옆의(옥양봉아래개울) 김동선씨 논에서 수습했다고 한다.

또한 2012년도 백제의 미소 길 마을 다리 공사중 석등의 연화하대석과 석탑의 옥계석이 어려점 발견된다.
주변에서 석등의 간주석도 발견된다.

보덕사에 세워진 예산읍 삼층석탑은 1970년 이전에 반출된 가야산의 7기 이상의 석탑중 하나이며 마을주민들이 뜻을 모아 마을의 이곳저곳에서 흩어진 탑부재를 모아서 현재의 3층 탑으로 조합한 것이다.

당시 석탑과 함께 석종형의 부도 1기도 남연군충정비 주변에서 수습하여 보덕사로 옮겨졌다고 한다.
석종형 부도는 그 후 소재를 알 수 없지만 당시 여러기가 있었다고 증언한다.
가야사 가람구조로 볼 때 현재의 충정비 부근은 부도가 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가야산에 고대인들의 유적은 흔적만 남기고 모두 사라졌다.
이 터에 있던 절집이, 그리고 남아있는 석조유물들이 당대에 역사지리적 중요성과 어떤 의미를 지니고 어떤 역할을 했는지 생각해볼 필요는 있지만, 모든 것에는 성쇠(盛衰)가 있기 마련이니 스러져간 것들에 대해 꼭 아쉬워할 필요는 없겠다.

다만 남아있는 유물이나마 제자리와 합당한 이름을 찾고 보존될 수 있으면 좋겠다.
한 때 내포지역의 역사와 문화의 중심으로 위대했던 가야사는 대원군에 의해 사라졌지만 그 터를 지키던 삼층석탑이라도 남아 있음에 감사한다.

가야산의 자연과 역사는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보전하고 지켜내어 지역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유산을 후손에 물려주어야  할 절대 가치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잘못 기록되고 재생산 인용되는 상가리의 유물사와 왜곡된 역사가 바로잡아졌으면 한다. 석탑이 있던 황량한 가야사터 그 한가로움과 그 여백의 유구함은 오늘의 모습이다.

그 터 위에 새로운 것을 창조해낼 수도 있겠지만, 오늘은 그런 생각보다는 그저 스러져 간 것들을 시공을 넘어 추억해 본다.

문화재 정보 지금이라도 오류를 정정하고 마을주민들이 힘을 모아 가야사지 등에서 옮겨 세운 사실을 기록으로 정정하고 보덕사석등과 예산삼층 석탑의 이름도“가야사3층 석탑” “상가리3층 석탑”으로 하는 것이 맞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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