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탄스님의 ‘산방원려(山房源慮)’] 임란영웅 ‘수은 강항 선생’이 여의도 위정자들에게 남긴 교훈
[탄탄스님의 ‘산방원려(山房源慮)’] 임란영웅 ‘수은 강항 선생’이 여의도 위정자들에게 남긴 교훈
  • 탄탄(呑呑) 스님
  • 승인 2017.06.24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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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탄스님 여진선원 주지, 용인대 객원교수

[굿모닝충청 탄탄스님 여진선원 주지, 용인대 객원교수] 우리의 역사에서 임진년 1592년(선조25년)의 치욕을 왜란이라고 지칭한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여 7년간 1598년(선조31년)까지 이어진 이 전쟁은 동북아시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제2차 침략인 정유재란까지 국토의 황폐화와 인민(人民)의 무자비한 살상 또한 문화유산이 전부 파괴 되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닌, 참혹했던 이 전쟁은 TV나 소설 등의 매체에 의하여 대략은 아는 듯하다.

그러나 조일전쟁, 임진전쟁, 도자기 전쟁이라고 칭하기도 하고 일본에서는 당시 그들의 연호를 따서 분로쿠의역(文祿の役 분로쿠노에키)라 하며 중국 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에서는 당시 명나라 황제였던 만력제의 호를 따 만력조선전쟁(萬曆朝鮮戰爭)이라고 한다.

조선이 개국한 이후 100여년간 창업을 주도했던 개국공신과 세조의 집권을 도왔던 공신 집단과 그 후손들로 형성된 훈구파 세력에 의하여 왕조의 안정과 융성을 유지해 오다 훈구파 정권이 안정되어 지니 그 부패가 날로 극심하여지고 이러한 변화 속에서 이른바 사림파 세력이 등장하여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정치, 사회질서의 재정립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개혁을 진행하게 된다. 이로 인해 신진사대부와 훈구파 세력의 갈등이 분출되고 이러한 마찰이 계속되자 성종 임금은 훈구 세력을 견제 하려고 사림들을 청요직에 등용하면서 표면화되기에 이른다.

정치, 경제, 사회 각 분야에서 혼란이 일어나고 신분 제도와 균역제도가 무너지고 권문세도가는 많은 농장을 확대하여 백성들의 삶은 피폐하여 지고 사회 전반이 동요되는 기미가 보였다. 세제가 무너지고 조정에서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왕실 척신들의 정권 쟁탈전인 을사사화가 발생하고 사림 또한 내홍으로 상호 대립하는 양상이었다. 명종의 모후인 문정왕후의 대리정치 탓에 외척 세력이 정치의 중심으로 권력이 개편되며 부패가 극심하였다. 이후 사림파가 집권하게 되며 동인, 서인, 양대 세력으로 분열되어 대립을 거듭하며 국정에 혼란으로 치닫고 있었다.

국방은 200년간 전란을 겪지 않아 상비군 해체에서 병농일치의 예비군 체제로 전환되어 여진족과의 분쟁이 빈번한 북부지방과 남부 수군은 상비군이 유지되었지만 기타 지방에서는 문서상으로만 병력이 존재할 뿐 병력의 질은 막 통일 전쟁을 끝낸 일본에 비하면 형편없었다.

보잘 것 없는 농민 출신 토요토미히데요시가 간파쿠가 되어 천왕에게서 일본 전국 지배권을 위임받아 ‘센코쿠시대(全國時代)’를 종식시키고 히데요시의 천하야망을 동아시아 정복으로 확장하려는 의도에서 조선정벌을 준비하라고 명한 것이 이미 1581년이다.

1591년에 쓰시마(대마도) 국주 소요시토시(宗義智)가 게이테츠겐소(景轍玄蘇) 등을 사신으로 보내서 ‘가도입명(假道入明)’ 이를테면 명나라를 칠 테니 길을 열어라 라는 당치도 않는 명분을 내세운다.

조선은 명과 ‘책봉-조공체제’에 기반을 둔 사대관계였다. 조선은 명을 섬기는 상황이며 조선과 명 사이에는 군신‧상하 관계가 성립되고 조선은 제후국으로서 예와 명분에 합당한 불평등한 국가 지위를 감수해야만 했다. 구체적으로 명 황제에 의거한 조선국왕 책봉의 수용, 명 연호의 사용, 정기로 계속하는 조공 등 제후국으로서 의무가 부과되었다.

명나라에서는 북방으로는 몽골족의 침입, 남방으로는 왜구의 침입을 막아서 양방에서 싸워야 했으며 환관의 발호로 정치가 혼란해지고 전국이 반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만큼 크게 동요하였다. 국력 쇠퇴의 가속화 요인이 여러 부분에서 작용하고 있는 시점이었다.

임진왜란 이전 사신으로 갔던 황윤길과 김성일의 일본 정세 보고는 1945년 해방직후에까지 이어지면서 논란이 되었다. 황윤길 집안 후손인 사학자 황의돈이 학봉김성일을 비판적으로 기술한 점이 2000년대에 까지 내려오면서 널리 알려져 그 논란이 계속 이어진다.

현대에 들어와 교과서를 편찬한 현대 한국 사학자에 있어 김성일은 임진왜란을 유발한 전화의 책임 있는 자로 기록이 된다. 해방 후 명문 동국대학교에서 국사학을 연구하는 제1세대 학자인 황의돈은 신편 조선역사 128~129쪽에서 “류성용, 이산해 등 당시 득세한 동인배가 김성일의 편을 들어 군사 시설을 모두 부수고 조정의 대신들이 마음을 놓아 태평한 꿈에 취하여 드러누웠다.”고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신복룡 이라는 학자는 ‘한 역사적 인물의 행적은 그의 진심과 동기를 이해하는 데에서부터 비롯해야하며 그의 진심은 그가 마지막 생애는 어떻게 마쳤는가에 따라 평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 하였다. “김성일이 신중한 애국자이고 충신이었으며 의롭지 않게 거짓말을 말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문중 사학의 희생자였다’며 안타까워” 하기도 했다.

임진왜란하면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 등 여러 기록 문화유산이 존재한다. 그 중에서도 수은 강항(1567~1618)의 『간양록』이 있다. 먼저 강항 이분이 누구인가? 수은 강항 선생은 일본 성리학의 개조이며, 본관이 진주 강씨인 강항 선생이 전남 영광에 살게 된 것은 강항의 고조 강학손이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영광에 유배된 것이 인연이었다.

전라남도 영광은 가장 많은 의병 지도층을 배출한 곳이며 정유재란 당시 의병지도자 중 한 분인 강항 선생이 일본에 그만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압송되어 그곳에서 일본의 현자들과 교류하고 집필활동을 하며 일본 유학에 생명을 불어 넣어 준다. 그 분의 저서 간양록은 당시 일본의 사정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사료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다.

항왜의 기록문화로서 대단한 역사적 보고이다. 일본 교토 후시미성(伏見城)에 억류되어 있을 때 그곳의 여지(輿地), 관호(官號) 그리고 적국의 동향을 적어 몰래 사람을 시켜 본국에 보낸 자신의 섭란사적(涉亂事迹) 및 그 곳에서의 순회, 증답(贈答)한 시편 등을 합친 내용이다. 처음에는 책 이름을 건거록(巾車錄)이라 하였다가 뒤에 그의 문인 윤순거가 간양록(看羊錄)이라 명명하였다. 시남유계(市南兪棨) 역시 간양록의 발문에서 “죽고 사는 것은 제 마음대로 못했더라도 절조와 의리의 마음만은 제대로 한 인물”이라고 선생을 평하였다.

1952년에 『간양록』이 국역 되었으며, 1989년 『수은집』이 국역되었다. 『간양록』은 「적중봉소(賊中封疏)」, 「적중문견록(賊中聞見錄)」, 「섭란사적(涉亂事迹)」, 「고부인격(告俘人檄)」, 「예승정원계사(詣承政院啓辭)」의 5부로 구성되었는데, 크게 공적인 글과 개인적인 글 “섭란사적”으로 나눌 수 있다. 공적인 글은 대체로 글이 순서로 배열되고 있으며, 같은 내용이 담겨 있는 경우, 좀 더 자세한 것을 우선하여 싣고 있다.

이는 그의 문인인 윤순거가 활자화하면서 선생의 초고를 합리적으로 편집했기 때문이다. 『간양록』은 공적인 글에서는 ‘객관적이고 냉철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으나 개인적인 글에서는 ‘포로 생활의 비통함과 분노’를 숨기지 않고 있다. 원수국인 왜(倭)에 대해 객관적 자세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왜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어떻게 해서든 조국에 알려야 겠다는 우국충정과 자신의 정보가 국정에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는 확신 때문이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섭란사적’에서는 가족의 이산과 죽음에 대한 비통함이 절절하게 드러나 있고,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과의 교유에서는 사향(思鄕)의 비통함을 숨기지 않고 있다.

포로의 몸이었지만 강항 선생이 적국 일본에 남긴 모든 글들은 꽃처럼 아름답고 귀한 문화유산이다. 피랍되어 강제연행 되고 혹독한 일본의 만행을 지켜 본 선비의 절의를 잃지 않고 원수국 일본에 학문을 전수한 업적은 일본 근세문화 속 큰 족적이며, 그 속에 불멸의 공이 흐르고 있음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어쩌면 강항 선생의 간양록은 오백년 전 이나 오늘 이나 당파싸움을 하며 백성은 안중에도 없고 자기당의 당리당략(黨利黨略) 만을 내세우는 위정자 들이나 오늘의 여의도 정치 모리배들에게 던져주는 역사적 교훈은 사뭇 준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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