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프리즘] 운주당(運籌堂)
[시사프리즘] 운주당(運籌堂)
  • 이홍준
  • 승인 2017.07.03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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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준 세종특별자치시 문화체육관광과장

[굿모닝충청 이홍준 세종특별자치시 문화체육관광과장] 운주(運籌)는 인간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나무인 산가지를 움직인다는 뜻이다. 신목(神木)으로서 역할을 한 나무는 느티나무이며, 우리 민족의 삶과 역사가 깃들어 있다. 불세출의 명장 이순신 장군이 머물었던 한산도의 제승당은 운주당이라고도 불리웠다. 장군은 진(陣)을 친 이후 늘 이곳에 기거하면서 휘하 참모들과 작전계획을 논의하고 자기만의 독서실이자 집무실로 활용했다. 그가 머문 곳마다 운주당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1740년 통제사 조경(趙儆)은 이 옛터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우고 제승당이라 바꿔 이름했다.

난중일기에는 화(話), 의(議), 론(論) 등의 한자가 자주 나온다. 이순신 장군은 참모진들과 자주 ‘대화’하고, ‘의논’했으며, ‘토론’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운주당은 매일 밤 건물의 불이 꺼지지 않았다고 한다. 신분의 높고 낮음을 떠나 누구나 자유롭게 자주 드나들도록 출입 문턱을 없앴던 것이다.

그는 여수에 전라좌수사로 임명돼 도착하자마자 왜의 침략야욕을 간파했지만 해전은 알지 못했다. 해안의 물길과 지형을 파악하기 위해 그 지역에서 태어난 병사와 백성을 운주당으로 불러 이야기를 나누고 이를 되새겨 다음날이면 바다로 나갔다. 물결을 헤아리고 파도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바다의 깊이와 암초의 위치를 해도에 기록했다. 이른바 경청을 통해 바다를 속속들이 꿰뚫고 해전에서 전략과 전술에 이용함으로써 전승을 이뤄낸 것이다. 막강한 왜와의 수많은 전투에서 수적, 물적 자원의 불리를 극복하고 세계 해전사에 기록된 것도 넓게 해석하면 경청과 대화의 결과물이 아닐까 싶다.

경청은 타인의 말을 들음에 있어 가장 품격있는 행위다. 경청은 대화 도중 상대방의 말을 조용히 청취하는 수동적 청취(hearing)가 아니라 상대방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적극적 듣기(listening)다. 경청은 말을 풀이하는데 그치지 않고 말과 말 사이에 배어 있는 감정과 상대의 절박한 말까지 헤아리는 행위다.

그러나, 이순신장군의 품격과 정반대의 행보를 보인 인물이 있다. 바로 이순신의 뒤를 이어받아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운주당 주변에 대나무 울타리를 치고 참모와 부하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막았다. 운주당은 대화와 소통이 열린 공간이 일거에 막힌, 불통의 공간이 돼 버렸다. 대화의 채널이 막힌 장수의 말로는 비참했다. 그가 이끄는 수군은 사기가 떨어졌고, 독선과 아집의 전략은 패배로 이어졌다. 마침내 1597년 7월 칠천량 해전에서 왜군의 교란 작전에 말려들어 거의 괴멸됐다. 그도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우리 사회는 지금도 여전히 남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자기의 생각만 관철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급속한 경제발전과 정보의 범람 속에 경제사회의 규모화는 전후 2, 3세대에게 학력 인플레에 집착하게 되고 오직 자기만이 살아남는 전장이 돼 버렸다. 7, 80년대의 번듯한 직장에 들어가 열심히 일해 돈 모아 가족이 머물만한 아파트 한 채 장만하면 성공이라는 공식은 깨어진지 오래다. 삶 자체가 경제적인 논리와 성장에 바탕을 두다 보니 사람과 사람사이의 만남과 소통은 제한되고 모두가 경쟁자로 치환된 것이다. 정치인, 기업인, 학자 등 사회의 리더를 자처하는 이들마저도 위계와 불통, 독선과 아집으로 자기만의 생각을 설파하고 이념적 사고에 매몰돼  반대는 멸시하는 지적 오류에 빠져 주위의 말을 듣는데 인색하다. 경청은 안중에도 없다. 쌓은 지식을 지혜로 승화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최근 우발적으로 터진 ‘욱’하는 분노조절장애도 이웃과 주변의 대화의 단절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파트 외벽을 칠하는 노동자의 음악소리가 듣기 싫다고 옥상에 올라가 매단 줄을 끊고, 원룸의 인터넷 속도가 느리다는 이유로 자신의 원룸을 방문한 수리기사에게 흉기를 휘둘러 살해하고 논문 작성과 관련해 여러 차례 질책을 한 교수에게 앙심을 품고 연구실 앞에 폭발물을 놓아 해당 교수가 상해를 받는 분노범죄가 그렇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받는 극심한 스트레스나 불만의 해결책은 사회안전망을 촘촘하게 갖추는 것도 필요하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상대방을 인정하고 문제의 해결을 듣는, 경청이 아닐까 싶다. 인간, 그 자체는 하나의 소우주다.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어제와 오늘, 내일의 삶이 각박하고 팍팍하지만 상대방을 인정하고 공감하기 위해 가슴속에 운주당을 세워 경청했으면 한다.

“이청득심(以聽得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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