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마지막 전쟁의 진실] ② 역사와 호사가들이 의자왕을 타락의 프레임에 가두었다
[백제 마지막 전쟁의 진실] ② 역사와 호사가들이 의자왕을 타락의 프레임에 가두었다
  • 이재준 청운대 남당학연구소 연구교수
  • 승인 2017.11.17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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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은 백제의 마지막 왕이다. 따라서 백제 패망의 모든 원인이 의자왕에게 모아질 수밖에 없다. 사료에 기록된 내용들은 의자왕이 황음무도하고 무능한 왕으로 백제를 패망의 길로 이끌어 간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백제가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괴담이나 재이(災異)현상이 고구려에 비해 너무 많다. 그리고 삼천궁녀 이야기가 백제 의자왕의 대명사처럼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마지막 기록된 역사는 백제가 남긴 역사라고 보기 어려우며 철저하게 승자들에 의해서 각색되었다. 의자왕의 즉위와 대외정책, 멸망징조의 진실 등에 대해 알아보자. [편집자 주]

 

낙화암 전경

해동증자(海東曾子) 의자왕

이재준 예비역 육군대령 영남대 한국군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청운대 남당학연구소 연구교수

553년 신라가 한강유역을 기습적으로 빼앗아가자 백제는 이듬해부터 신라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554년 신라를 공격하는 태자 여창(餘昌-뒤에 위덕왕이 됨)을 격려하기 위하여 전선으로 향하던 성왕이 관산성에서 전사한 이후 백제의 최대 적은 신라였다. 이후 성왕의 아들 위덕왕은 신라를 2회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패하였다.

백제가 신라에 대하여 승기를 잡기 시작한 것은 무왕 때부터이다. 무왕은 재위기간 중 9회에 거쳐 신라를 침공하였고, 10여 성을 회복하였다. 또한 무왕 28년 신라에게 빼앗긴 땅을 회복하기 위해 군사를 크게 일으켜 웅진에 주둔시키자 신라가 당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여 신라정벌을 중단한 일이 있었다.

『수서(隋書)』와 『삼국사기』에는 백제는 수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 돕겠다고 약속하고 안으로는 고구려와 내통하는 등 두 마음을 가졌다고 하였다. 그리고 무왕이 죽었을 때 당 태종이 소복을 입고 현무문에서 곡을 하였다고 『구당서』와 『신당서』에 기록되어 있다. 즉 무왕은 수(隋), 당(唐)과의 관계 속에서 나름대로 이익을 추구하면서 신라에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한 전쟁을 지속한 왕이었다.

641년 3월 무왕이 죽고 그의 아들 의자왕이 왕위에 올랐다. 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로 태어나 632년 태자에 봉해진 뒤 9년이 지난 40세 전후에 즉위하였다. 당연히 의자왕은 41년간 재직한 아버지 무왕대의 대·내외정세를 익히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신라에 빼앗긴 옛 땅을 회복해야 하는 백제의 숙원에 대해서도 충분히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자왕은 용감하고 대담하며 결단성이 있었다. 부모를 효성으로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 당시에 해동증자라고 불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의자왕은 641년 당 태종으로부터 ‘주국 대방군왕 백제왕’으로 책봉되어 정통성을 인정받았다. 이에 감사의 표시로 당에 사신을 보내고 토산물을 바쳤다.

익산 쌍능제각 소장, 무왕(표준영정 71, 2001지정) 최웅 그림

642년 2월에는 왕이 주·군을 순행하면서 사형수를 제외한 모든 죄수들을 다 용서하여 주었다. 이와 같이 내외적으로 정권을 안정시킨 후 아버지 무왕의 위업을 이어가기 위해서 신라를 침공하였다. 즉위 2년 7월 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침공하여 미후성(獼猴城) 등 40여 성을 항복시켰다.

의자왕은 백제 31대 왕으로 즉위하여 20년간 백제를 통치하였다. 즉위 4년차인 644년 이후 신라가 백제가 자주 침공한다고 당에 호소하며 청병외교를 전개하면서 당과는 소원해졌다. 하지만 고구려 및 말갈, 왜 등과 교류하면서 신라에 대한 침공을 계속 이어갔다. 재위기간 중 11회 신라를 침공하고 80여 성을 함락시키거나 회복하였다. 660년 나당의 침략이 있던 전해인 659년에도 신라의 독산(獨山)·동잠(桐岑) 두성을 침공하기도 하였다.

아버지 무왕의 위업을 이어 백제의 숙원인 신라 응징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고 평가된다.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는 해동증자라는 칭호에 어울리는 업적이었다.

백마강의 유람선에서 바라본 부소산성 낙화암

의자왕의 대외정책

당나라는 수나라 이연(李淵)이 617년 태원(太原)에서 군사를 일으켜, 618년 수를 멸망시키고 세운 나라이다. 당시 삼국 항쟁관계에 있던 한반도는 동아시아에 거대한 당나라 출현에 나름대로 조공과 책봉을 통해 당과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당 건국 직후인 621년부터 660년까지 백제와 신라의 대당 외교관계를 비교해보면 다소 차이가 난다.

조공은 백제가 20회인 반면 신라는 23회이며 기타 방문까지를 포함하면 백제가 26회, 신라는 40회로서 신라는 백제에 비하여 1.5배 교류가 더 많았다. 또한 당에서 양국에 파견한 사절의 횟수도 백제에는 4회인 반면 신라에는 8회를 파견하여, 그 차이가 2배나 된다. 이를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물론 조공내용이나 지속관계에도 차이가 난다. 하지만 백제가 처음부터 대당관계를 소홀히 한 것은 아니었다. 무왕은 621년부터 641년까지 20년간 14차례 조공을 하였다. 의자왕도 641년 즉위 이래 644년까지는 매년 조공을 했다. 이후 651년에 1회, 그리고 652년에 1회 이후로는 조공이 없다.

644년 이후에 조공을 중단한 이유는 644년 신라가 당에 백제의 침공사실을 보고하여 당태종이 사농승(司農丞) 상리현장(相里玄獎)을 보냈기 때문이다. 이때 당 사신이 와서 타일렀다(告諭)고 하였으나 사실은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이에 의자왕이 표를 올려 사죄했다.

그러나 그해 9월 신라 김유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 와서 7개의 성을 빼앗아 갔다. 백제가 당에 표를 올려 사죄하는 사이에 신라가 침공하였던 것이다. 당이 신라와 모종의 결탁이 있었다는 의심을 하게 되고 당이 지나치게 백제에게 편파적이라고 생각하여 조공을 중단했을 것이다. 그리고 당과의 외교관계보다도 신라의 이중적인 행태에 대한 응징이 우선하였기에 조공을 중단하였을 것이다.

이후 649년 당 고종이 즉위하였다. 백제는 5년 만인 651년에 고종의 즉위 축하 겸 조공을 하였다. 그러나 당 고종은 “백제가 겸병한 신라의 성과 포로를 모두 돌려줘라. 만약 따르지 않는다면 변방 국가들에게 쳐들어가게 할 것이다”라며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조서를 조공사신에게 내려 보냈다. 전쟁의 근원은 신라가 빼앗아 간 백제의 고토 한강유역 때문인데, 백제의 사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상황이 이러하니 백제로서는 당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독자노선을 갈 수 밖에 없었다. 즉 의자왕은 당과의 관계 때문에 신라에 대한 응징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백제 멸망징조의 진실

『삼국사기』에는 백제가 망할 수밖에 없었음을 나타내는 사료의 기록들이 유난히 많다. 주요 내용들은 “백제의 군신들이 사치를 일삼고 음탕한 생활에 빠져 국사를 돌보지 않으니 백성들이 원망하고 신이 노하여 재괴(災怪)가 빈번히 나타났다”, “8월 웬 여자의 시체가 생초진(生草津)에 떠내려 왔는데 길이가 18척이었다”, “5월 서울 서남쪽 사비하(泗沘河)에서 큰 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길이가 세발이었다”, “들 사슴과 같은 웬 개 한 마리가 서쪽으로부터 사비하 언덕에 와서 왕궁을 향하여 짖더니 잠깐 사이에 간 곳을 알 수 없었으며, 서울에 있는 뭇 개가 노상에 모여 혹은 짖고 혹은 곡을 하더니 얼마 뒤에 곧 흩어졌다” 등 황당한 괴담과 같은 기록이 10건이 넘는다.

고구려의 경우는 보장왕 19년 660년에 “평양 강물이 3일 동안 핏빛과 같았다”는 기사 한줄 뿐이다. 『삼국사기』가 고려시대에 편찬이 되었고, 김부식이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너무 많은 차이가 난다. 『삼국사기』의 찬자 김부식에 의하여 걸러지기 보다는 추가되고 각색되었을 수도 있다.

거의 같은 시기에 멸망하였는데 왜 백제의 경우는 황당무계한 재이(災異)기록이 많을까? 기록된 백제의 현상들 중 개가 나타나서 짓는 것은 나쁜 일이며, 개의 상징은 모반이나 왕의 사망을 뜻한다. 물고기 또한 흉사의 징조다. 그리고 여우 등 흉조(凶兆)동물의 출현이나 우레 풍수해 등 지이(地異)현상은 왕권의 위기나 사회혼란 등을 예고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록들이 사실이라면 백제를 정벌하기 전 혼란을 유발하기 위해 신라가 조작한 심리전의 일환일 수 있다. 아니면 백제정벌 후 정복자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백제멸망의 필연성을 강조하려는 목적에서 의도적으로 조작된 것일 수 있다.

역으로 생각해보면 백제유민들의 저항정신이 상당하였고 쉽게 동화되지 못하며 백제에 대한 향수가 오래 지속되어 이를 무마하기 위한 것일 수 있다. 허무맹랑한 기록의 저변에는 백제와 의자왕이 무능하고 형편없는 나라가 아니었으며 망할 수밖에 없는 나라가 아니었다는 것을 감추기 위한 조작이라는 반증이 깔려있다. 패망직전의 백제와 의자왕은 재평가 되어야 한다.

의자왕은 무죄, 낙화암과 삼천궁녀는 문학작품

의자왕에 대하여 『삼국사기』는 “궁녀들을 데리고 음란과 향락에 빠져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나라 소정방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새겨진 「대당평백제국비명」에는 “신하를 버리고 요망한 계집을 믿어, 충신에게는 형벌이 미치고 간사한 사람이 총애와 신임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복자들의 기록이다.

한편 의자왕을 이야기 하면 낙화암과 삼천궁녀가 빠질 수 없다. 낙화암이란 명칭은 고려시대 말기에 백제의 옛 수도 부여를 회상하며 쓴 이곡(李穀)의 시(詩)에서 처음 등장한다. 그리고 삼천궁녀는 조선시대 15세기 후기 김흔(金訢)의 낙화암에 대한 시에서 나타나고 있다.

정복자들의 평가나 후세 문장가들이 표현한 삼천궁녀가 사실이라면 멸망직전인 659년에 백제가 신라를 침공한 사실에 대한 해석이 궁해진다. 또한 백제가 항복하고 의자왕이 당나라로 압송되어 국가라는 실체가 없는 상태에서 백제군이나 유민들이 3년 4개월간이나 부흥전쟁을 이어간 부분도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역사와 문학이 의자왕을 황음무도하며 삼천궁녀와 놀아난 호색한으로 둔갑시켰다. 정복자 자신들의 침략 합리화와 후세에 백제를 애틋하게 보는 호사가(好事家)들의 관점이 의자왕을 술과 여자 그리고 정치적 혼란의 프레임 속에 가두어버렸다. 그리고 우리는 갇혀진 백제의 역사를 사실로 알아왔다.

하지만 백제는 패망직전까지 신라를 공격하는 등 대 신라공세를 이어갔다. 의자왕의 업적이었다. 1920년 중국 하남성 낙양의 북망산에서 발견된 부여융의 묘지명에서도 의자왕은 “과단성이 있고 침착하며 사려가 깊어서 명성이 홀로 높았다”고 묘사하고 있다. 중국으로 압송되어 약 8년 만에 죽은 것으로 추정되나 어디에서도 의자왕이 술로 살았다는 이야기는 없다.

이제 의자왕의 술과 여자에 관한 내용은 무죄이며 허구로 과장되었음을 밝혀야 할 때이다. 모든 역사기술이 그러하듯이 승자의 논리가 정의로 각색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승자의 논리가 반드시 정의일 수는 없다. 우리가 역사를 재평가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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