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 대전(大田) 이야기] 예학에 밝은 성리학자이자 뛰어난 문장가
[우리고장 대전(大田) 이야기] 예학에 밝은 성리학자이자 뛰어난 문장가
(16) 대전의 인물-송준길(宋浚吉)
  • 자료협조=대전평생교육진흥원
  • 승인 2018.06.1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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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생몰연대 : 1606년(선조39)∼1672년(현종13)
ㆍ거    주 : 대전시 대덕구 송촌동
ㆍ사    적 : 동춘당 공원(대전시 대덕구 동춘당로 90)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송시열과 함께 ‘양송(兩宋)’으로 불렸던 송준길은 서울 정릉동 삼현대(三賢臺)에서 태어난다. ‘삼현대’라는 말은 성균관 문묘에 배향되는 김장생, 김집, 송준길의 3성현이 태어난 집이란 뜻인데, 이것은 송준길과 김장생이 외척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송준길의 외할아버지가 곧 김장생의 친동생이었다.
송준길을 예가(禮家)의 종장(宗匠)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서인의 이이-김장생-송준길로 이어지는 기호계 예학과 남인의 이황-유성룡-정경세로 이어지는 영남계 예학의 정통을 계승했다는 뜻으로 송준길이 정경세의 딸과 혼인을 함으로써 두 예학의 적자(嫡子, 정통)가 되었음을 뜻한다. 이와 같은 가문의 위상으로 송준길 고택을 중심으로 송촌동이 형성되었고, 숙종의 외척이 될 수 있었고, 안동김씨 및 여흥민씨 일가와도 혼인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송준길은 회덕향약을 만든 장본인으로, 그 당시 향약의 기본 덕목인 덕업상권, 예속상규, 과실상규, 환난상휼의 4대 조항을 따랐다.

동춘당

생애
송준길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문묘에 배향된 해동 18현인 중 한 분으로 김장생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한 조선 예학의 대가이다. 그의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同春堂),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그는 쌍청당 송유(1389∼1446)의 7대손이고, 아버지는 청좌와(淸坐窩) 이창(爾昌)이다. 동춘당은 아버지의 나이 46세, 어머니 광산김씨의 나이 42세에 낳은 첫 아이였다.
그는 몸이 약해서 일생동안 잦은 병에 시달리며 살았다. 1622년(광해군14) 그가 16세 되던 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1628년(인조6) 22세에 아버지 청좌와공을 여의었다. 어머니를 잃고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건강을 잃었는데 부친상의 아픔을 겪으면서 병환이 깊어졌다. 동춘당이 평생 쇠약한 증세는 여기에서 근거한 것이라고 한다. 그가 회덕 송촌에서 살기 시작한 것은 세 살 때이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아버지를 따라 이곳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1623년(인조원년) 18세에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송준길의 평소생활태도와 학문에 임하는 자세를 보고 사계는 “이 사람은 훗날 반드시 예가(禮家)의 종장(宗匠)이 되리라”하고 칭찬하였다. 같은 해 10월에 그는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막내딸과 혼인하였다. 이때에 정경세가 부제학으로 휴가를 얻어 상주로 내려와서 보니 인조가 혼수를 내렸다.

동춘당과 우암의 우정
송준길이 9세 되는 1615년(광해군7)에 수옹(睡翁) 송갑조의 셋째 아들 우암을 송이창 에게 보내와서 함께 공부하게 되었다. 송준길은 송시열보다 한 살 위이고 항렬도 바로 위 항렬이었지만 서로 형제처럼 지냈다. 이때부터 동춘당과 우암은 각별한 교분을 맺어 훗 날 ‘양송(兩宋)’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송준길의 조부와 송시열의 조부는 광주이씨 이윤경의 딸을 아내로 맞아 동서가 되었 다. 그래서 송준길과 송시열은 가계상 13촌이지만 진외가 쪽으로는 6촌 재종간이다. 나 이 한살 위인 송준길을 송시열은 13촌 숙으로가 아니고 재종형으로 늘 춘형이라 불렀다.

1625년(인조3) 여름에 별시초시(別試初試)에 합격하였다. 이때 시관(試官)이었던 장인 정경세가 동춘당의 시험지를 감추며 합격시키지 않았는데, 이는 미리 자신이 사위를 등제(登第)시켰다는 혐의를 피하고자함이었다. 1632년(인조10)에 사계 상을 당 하여서는 가마기복(加麻期服:잔을 쓰고 일 년 동안 복을 입음)을 하고 스승에 대한 예우를 다하였다. 나라가 내린 벼슬을 동춘당이 누차 사양하였는데, 이는 그의 건강 문제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인조가 대군사부·예산현감·사헌부지평·한성부판관 등을 제수하였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송준길의 묘

1649년(효종즉위) 5월에 인조가 돌아가고 효종이 즉위하자마자 신독재 김집·동춘당 송준길·우암 송시열이 함께 천거되어 6월에 부사직을 제수받고, 진선(進善)·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올랐으며 통정대부(通政大夫)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이 되었다.

동춘고택 : 동춘당 뒤편에 있는 동춘 고택은 인조 20년(1642년) 건립 되었고 당시의 모습이 잘 간직되어 있다. 조선 시대 양반집의 전형을 보여주는 곳이다.

동춘당 : 송준길의 호 ‘동춘당’은 자신의 집 별당 이름에서 따온 것 이다. 조선 시대 별당을 표준으로 삼은 건물로 ‘살아 움직 이는 봄과 같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는 효종이 즉위하면서 청에 아부하던 공서파(功西派)의 김자점을 탄핵하였고, 그 후 송시열과 함께 북벌계획에 깊이 참여하였다가 김자점이 효종의 북벌계획을 청에 밀고하는 바람에 동춘당도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는 농민들에게 평상시에는 농기구로서 쇠스랑을 쓰고, 유사시에는 쇠스랑 끝을 뻗쳐서 창으로 사용하게 하는 방법을 찾았다. 그리고 국민들에게 파랗고 빨간 이불호청을 쓰도록 하였는데, 이는 유사시에 이불 호청을 뜯어 군복으로 만들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전한다.

한편, 문하에서 민유중, 황세정, 남구만 등이 배출했다. 제자 중 민유중을 눈여겨 본 송준길은 그를 사위로 삼는데, 민유중에게는 그의 딸을 주어 사위로 삼았고, 후에 이들 사이에서 인현왕후가 태어난다. 송준길의 외손자는 민진후로, 송준길은 명성황후의 7대 외조부가 된다. 민진후-민익수-민백분-민기현-민치록-명성황후로 가계가 이어졌다.

1659년(효종10, 현종즉위년) 나이 54세 때 다시 이조참의에 나아간 동춘당은 조대비의 복상 문제로 예송이 일어났을 때 송시열이 주장하는 기년제(朞年制: 1년)를 지지하였다. 이에 남인 윤휴, 윤선도, 허목의 3년제를 누르고 예송(조선 현종 때 궁중의례의 적용문제, 특히 복상(服喪)기간을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 크게 논란이 벌어진  두 차례의 사건)에서 승리함에 따라 우참찬을 거쳐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그러나 윤선도에 의해 다시 논의된 예송으로 낙향하였다.

동춘고택

1665년(현종6) 원자의 보양(輔養) 문제를 상소하여 첫 번째 보양관(輔養官)이 되고 현종에게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지어 올려 더욱 더 신망을 얻었다. 그러나 기년제의 잘못으로 남인들의 규탄과 거듭되는 상소로 사퇴했다. 예송논쟁에 연루되었으나 고향 회덕으로 내려와 후학 양성에 힘을 쏟고 회덕 향약을 만드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동춘당에서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등졌다.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1756년(영조32)에 문묘에 배향되어 공주의 충현서원(忠賢書院), 옥천의 표충사(表忠祠), 회덕의 숭현서원(崇賢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동춘당은 문장뿐만 아니라 글씨에서도 뛰어났다. 그는 명필이어서 이시발 신도비(李時發神道碑)를 비롯하여 충렬사 비문(忠烈祠碑文), 윤계 순절비(尹啓殉節碑), 박팽년 유허비(朴彭年遺虛碑) 등 송시열의 문장에 송준길의 글씨로 된 금석문이 대덕구를 중심으로 많이 남아 있다.

저서로는『동춘당집(同春堂集)』·『어록해(語錄解)』가 있다. 유적은 동춘당과 동춘 고택(송촌동,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호 지정), 옥류각(비래동)이 있으며, 묘는 원정동에 있다.

송준길의 철학 사상
동춘당 송준길은 이이의 학통을 계승하면서 충청유학의 주류를 차지하였으며, 학문과 글씨와 시에 두루 능통하였다. 그는 대외적으로는 자주의식을 강조했지만, 학문적으로는 융합의 태도를 유지하였다. 송준길은 ‘터럭 한올이라도 틀리면 내가 아니다’ 라며 평생 초상화를 남기지 않았다. 동춘당의 철학사상은 송시열이 쓴송준길의「묘지문」에 잘 나타나 있다.

“인애를 주로 삼고 예로써 모든 일을 처리하였다. 그러므로 논리가 지극히 바르고 은의가 두터워서 후세의 법도가 될 만 하였다.”라고 하였고, 효종은 “(송준길은)마음을 잡아 지킴이 지극히 공변되어 사사로이 한쪽으로 편벽됨이 없다”라고 하였다. 송준길은 공자·맹자·주자로 전승되어 온 도통의 학맥을 받들었고, 이이(李珥)의 학설을 따라 율곡(이이)-사계(김장생)-신독재(김집)로 이어지는 기호학통의 학문체계에 충실하면서 경(敬)을 강조하였다.

송준길은 형식적인 예행을 경계하고, 의식적인 예행을 중시하였다. 그의 의리 위주의 입장은 제사의 예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사회의 모든 면에 적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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