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기자의 눈] 상산삼매<象山三昧>에서 내포 판소리의 뿌리를 찾는다
[시민기자의 눈] 상산삼매<象山三昧>에서 내포 판소리의 뿌리를 찾는다
  • 이기웅
  • 승인 2018.07.11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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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웅 예산 시민기자

[굿모닝충청 이기웅 ] 조선 전기부터 일부 사족(士族)층에서 행해진 산수 유람은 조선 후기에 크게 유행했다.

가야산은 사족층의 산수유람 과정에서 뷸교 지명과 전승으로 채워져 있는 곳으로 발견된다.

조선후기 산수 유람은 산에서 이뤄진 유불의 접촉을 보여주면서 불교의 실태와 그 사회적 위상을 증언한다.

이를 통해 유불의 교유나 침탈이라는 차원을 넘어 산이라는 공간을 두고 벌어진 담론의 경합, 문화적 지배권의 추이를 주목할 수 있다.

1753년 내포 장천에 살던 선비 예헌(例軒) 이철환(李嚞煥, 1722~1779)은 가야산을 네 차례 유람하며 가야사가 쇄락했던 당시 상황과 수정암에서 공연되던 스님들의 연희를 기록한다.

대표 실학자 이익의 손자인 이철환은 1753년 10월부터 1754년 1월 29일까지 네 차례나 가야산을 들려 정수암의 승려 여견과 일락사의 희잠, 여옥이라는 사미승의 공연을 구경하고 가야산 여행기 상산삼매<象山三昧>(1754년 작, 33세 때)를 남긴다.

1차 여행은 1753년 인천의 소호(蘇湖, 소래 포구)에서 배편으로 시작되며, 10월 23일 영사암, 정수암(淨修菴), 슬치를 구경하고 11월 5일 그의 집이 있는 장천(長川, 현 예산군 고덕면)으로 돌아간다.

2차 여행은 그 해 11월 7일부터 12월 29일까지 가야산을 거쳐 장천으로 귀가하는 일정이었다. 또 이철환은 그 다음해 1월 11일 가야산으로 출발했다가 지병을 회복하려 22일 장천으로 귀가했다.

3차 여행은 1754년 1월 25일부터 29일까지며 그가 기대한 연희를 관람한 기록을 남긴다.

그는 2차 여행 당시 12월 4일 밤 가야산 승려들의 구기(口技)와 풀잎 연주와 기예를 구경하고 스님들의 구기와 막연한 서양의 음악에 대한 느낌을 자세하게 기록으로 남긴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일락사에는 회잠(會岑)과 여옥(呂玉)이라는 17살의 두 사미승이 있었다. 그들은 용모가 단아하게 잘 생겼으며 두 눈은 빛이 났다고 한다.

불경을 외는 소리가 맑고 고왔으며 회잠은 입술을 모아 바람을 불어 나각(螺角)과 비슷한 소리를 잘 내었는데 이철환은 이를 두고 ‘천연스레 교묘(巧妙)해 당에 가득 시끌시끌했다’라는 기록을 남긴다.

당시 입술로 하는 구기 공연은 지금 남보원이나 백남봉이 하던 입술로 소리 내는 연기의 효시가 아닌가 싶다.

또 가야사의 외암인 정수암 승려 여견은 이 빠진 나무빗에 마른 풀잎을 끼고 음악을 연주하는데 이는 유유하고 부드러워 호드기 소리도 아니고 퉁소 소리도 아닌 것이 듣는 이를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한다고 이철환은 기록한다.

이철환은 서양의 아코디온(혹은 풍금)과 비교해 승려 회잠의 기예가 기술면에서 하잘 것 없다고 하고, 손등(孫登)의 소(嘯휘파람)와 약산(藥山, 당나라 승려 유엄惟儼)의 소(笑)와 비교해 회단순히 예(藝)에 그친 것일 뿐이라고 폄하하기도 했다.

하지만 장황한 서술을 한 것을 보면 그 기예에 얼마간 감동을 했음에 틀림없다.

이철환은 대외로 개방된 내포의 지역 특성과 중국을 오가던 실학자 집안의 영향으로 중국과 유럽의 음악을 이해했던 게 아닌가 싶다.

실제 그의 집은 지금의 고덕 상장리로 삽교천의 상류 구만포구 주변에 있어 상당히 개방돼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을 오가는 가족이 많았으며 그 영향으로 외국과의 교류도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기록에는 구라파주(歐邏巴州) 에스파니아 왕의 편소(編簫)를 언급하고, 이탈리아 로마성의 유상곡수(流觴曲水) 정원에 있는 수중 편소(編簫)까지 적혀 있다.

그는 가야산 스님들의 연희공연을 관람한 뒤 ‘빨리 알아 한번 시켜보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고 했다.

이철환은 1월 12일 밤 ‘꼭두각시놀음을 보았다’라고 기록을 남기고 그 기교의 타락상을 비판한다.

그의 기록으로 볼 때 당시 일락사와 정수암 등 가야산에선 스님들의 정기적인 연희 공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음악 전통과 토양은 최선달로부터 방만춘까지 이어진다. 1820년 산 아래 해미에서 태어난 방만춘은 일락사에서 소리를 배워 득음하고 조선의 명창이 된다.

일락사 연희에서 공연되던 소리는 내포지역의 소리꾼에게 전승된다.

한 예로 덕산(혹은 여주) 출신으로 알려진 염계달(생몰년 미상)도 가야산 어느 절에서 10년간 판소리 공부하고 득음했다고 전해지며 조선 영조 시대의 명창인 권삼득(1771∼1841)의 창법을 모방했다고 전해진다.

권삼득이 하던 창법은 새소리 물소리 벼락소리를 흉내 내는 창법으로 일락사 희잠과 여옥이 이들이 득음하기 50년 전에 하던 그 소리다.

1753년 이철환이 봤다는 일락사의 도리 연희는 태생적 특징을 고려할 때, 불가 연희적 기반이 모태가 돼 내포지역에 판소리에 폭넓게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여진다.

결성 출신의 판소리 창시자인 최선달(1726~1805)과 그 후세대인 덕산 염계달(1802∼?), 갈산 한성준(1875∼1941), 해미 서산지역의 방만춘. 방진관, 심상건, 심정순, 심화영으로 이어지는 예술과도 무관치 않다.

조선시대 판소리 중흥기에 많은 소리꾼 중에는 최선달의 영향으로 충청도 홍성, 예산. 서산 출신이거나 가야산에서 소리공부를 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최선달의 영향을 받은 내포 소리꾼 중 상당수는 조선 8도를 대표하는 조선 8대 명창이 됐으며 바닷길을 통해 큰 무대가 있던 한양과 전라도와 황해도까지 오가면서 활동을 한다.

실제로 최선달이 태어난 성남리 마을의 김 모(95) 할머니는 자신이 어렸을 때 마을에는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소리를 배우고 익혔다고 기억한다.

이처럼 내포지역이 판소리의 탯자리가 될 수 있었던 배경은 예부터 바닷길이 열려 멀리는 황해도, 전라도를 하루나 한나절이면 오갈 수 있는 교통의 요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내포의 비옥한 토지를 소유한 사대부와 재력가 만석꾼이 소리꾼을 후원할 수 있어 소리를 하기엔 가장 적합한 곳이었다.

세월이 흐른 지금, 이철환이 봤다는 가야산의 공연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정수암 승려 여견과 일락사의 여옥, 민초들이 울어 내던 그 소리와 풍류 이야기도 잊히고 판소리의 원류와 탯자리도 잊혀졌다.

많은 세월이 흐르고 18세기 가야산의 풍류 이야기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 세상에 나오지 못하니 마음이 편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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