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가 박문수를 태안 안흥진에 보낸 까닭
영조가 박문수를 태안 안흥진에 보낸 까닭
세곡선 점검에 위한 물길 개척 목적으로 굴항 가능성 확인…"박문수는 반대했다"
  • 김갑수 기자
  • 승인 2020.06.05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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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대 박범 교수는 5일 오후 국립태안해양유물전시관 강당에서 열린 ‘안흥진성 사적지정을 위한 1차 학술세미나’에서 안흥진의 주요 기능과 제도적 변화상에 대해 설명하며 승전원일기에 기록된 내용을 설명했다.
공주대 박범 교수는 5일 오후 국립태안해양유물전시관 강당에서 열린 ‘안흥진성 사적지정을 위한 1차 학술세미나’에서 안흥진의 주요 기능과 제도적 변화상에 대해 설명하며 승전원일기에 기록된 내용을 설명했다.

[굿모닝충청 태안=김갑수 기자] 암행어사로 잘 알려진 조선시대 문신이자 현재는 충남 천안시 동남구 북면 은지리에 잠들어 있는 박문수(1691~1756)가 영조의 명을 받아 태안 안흥진(현재의 신진항 일원)을 방문했던 사실이 전해져 눈길을 끌고 있다.

공주대 박범 교수는 5일 오후 국립태안해양유물전시관 강당에서 열린 ‘안흥진성 사적지정을 위한 1차 학술세미나’에서 안흥진의 주요 기능과 제도적 변화상에 대해 설명하며 승전원일기에 기록된 일화를 설명했다.

이날 세미나는 태안군 주최,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주관으로 마련됐다.

박 교수에 따르면 안흥진(안흥첨사)은 수군전선과 세곡선 호송, 산성운영, 군향곡 관리 등의 기능을 수행했다는 것. 그러나 안흥진의 경우 성 자체의 규모가 작아 한계가 있었다는 것이 박 교수의 설명이다.

실제로 1653년 안흥첨사 이저의 사목(일종의 시행규칙)을 보면 ▲사람이 없다 ▲산악지역이어서 농토가 별로 없다 ▲곡물이 적어 군향 비축이 어렵다 등의 내용이 담겼다.

박 교수는 “이런 상황은 17세기의 이야기지만 19세기까지 그대로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암행어사 잘 알려진 조선시대 문신이자 현재는 충남 천안시 동남구 북면 은지리에 잠들어 있는 박문수(1691~1756)가 영조의 명을 받아 태안 안흥진(현재의 신진항 일원)을 방문했던 사실이 전해져 눈길을 끌고 있다. (태안군 제공: 신진항/ 굿모닝충청=김갑수 기자)
암행어사로 잘 알려진 조선시대 문신이자 현재는 충남 천안시 동남구 북면 은지리에 잠들어 있는 박문수(1691~1756)가 영조의 명을 받아 태안 안흥진(현재의 신진항 일원)을 방문했던 사실이 전해져 눈길을 끌고 있다. (태안군 제공: 신진항/ 굿모닝충청=김갑수 기자)

박 교수는 “산성은 육군이 방어 목적으로 쌓은 성으로, 안흥첨사는 수군이어서 구진(舊鎭)이 아닌 신진(新鎭)으로 가게 된 것”이라며 구진과 신진 사이의 갈등이 있었던 사실을 확인한 뒤 “1675년 안흥방어영으로 행정적으로 분리했다. (하지만) 안흥첨사는 별도의 지방관이다보니 태안에 군수 포함, 지방관이 둘이 있는 결과를 초래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런 이유 등으로 안흥진과 안흥첨사 등에 관한 제도가 안정적으로 유지되지 않고 변화를 거듭하게 됐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특히 “세곡선이 안흥항으로 들어가 수리를 받아야 하는데 펄 때문에 뱃길을 확보할 수가 없게 됐다”며 1731년(영조 7년) 굴항(掘港)에 대한 논의가 본격 시작된 이유를 설명했다.

당시 우의정 조문명은 “세곡선의 안전한 운송로를 확보하고 제방을 쌓아 모래 유입을 막아 농토를 만들어야 한다”며 굴항을 적극 제안했다는 것.

이에 영조는 도승지 박문수와 함께 안흥첨사를 지낸 이선을 현지로 보냈고 다시 돌아온 박문수는 “물이 넘나드는 곳이라 다시 모래가 쌓인다”며 반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조는 “목책을 세우면 가능하다”는 이선의 손을 들어줬고, 그를 다시 안흥첨사로 보내 이 일을 맡겼다고 한다.

1732년부터 시작된 굴항 작업은 2년 동안 약 3만6000명의 백성을 동원했음에도 별다른 진척을 이루진 못했다. 결과적으로 박문수의 진단이 옳았고, 이로 인해 안면도를 비롯한 주변 백성들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에 동원돼 고초를 겪은 것이다.

박범 교수는 “이선은 곡물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3번이나 파직됐지만 모두 선처를 받았다. 공역(굴항)을 해야 하기 때문”이라며 “이로 인해 정부 내에서 갈등이 벌어졌으며, 굴항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안흥진에 한 번 씩 내려오기도 했다. (그들은 모두) 물길을 알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박범 교수는 “이선은 곡물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3번이나 파직됐지만 모두 선처를 받았다. 공역(굴항)을 해야 하기 때문”이라며 “이로 인해 정부 내에서 갈등이 벌어졌으며, 굴항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안흥진에 한 번 씩 내려오기도 했다. (그들은 모두) 물길을 알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이선은 곡물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3번이나 파직됐지만 모두 선처를 받았다. 공역(굴항)을 해야 하기 때문”이라며 “이로 인해 정부 내에서 갈등이 벌어졌으며, 굴항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안흥진에 한 번 씩 내려오기도 했다. (그들은 모두) 물길을 알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당시 박사창이라는 사람은 굴항 작업을 지켜보며 “팔도 백성의 인력과 많은 재화가 아니고서는 완공이 불가능하다”고 했을 정도라고 한다.

박 교수는 “자연지형으로 인한 한계를 극복해 방어영으로 만들고자 했지만 실패했다”고 말했다.

계속해서 박 교수는 “당시 안흥첨사는 7개 리에 거주하는 약 400호 정도를 관리했다. 안흥진에서 따로 세금을 거뒀는데 바로 전복이었다”며 “내의원에 진상했는데 이것은 안흥진이 가진 특이한 점”이라고 분석했다.

이에 앞서 충남역사문화연원 문광균 선임연구원은 안흥첨사의 재임 실태에 대해 분석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문 선임연구원에 따르면 안흥첨사를 지낸 134명이 문과에 급제한 평균 나이는 29.8세로, 부임 시기는 급제 이후 약 28년 전후로 분석됐다. 다시 말해 50대 후반기에 안흥첨사로 내려왔다는 얘기다.

세미나에 앞서 최근 발견된 조선 수군 군적부의 실물이 전시되기도 했다.
세미나에 앞서 최근 발견된 조선 수군 군적부의 실물이 전시되기도 했다.

또한 안흥첨사의 평균 재임기간은 약 17개월 4일로 나타났으며, 총 36명이 조운선 운송 문제나 군향곡 관리 미흡 등으로 파직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함께 이희오(1828년), 이희명(1831년), 가행건(1853년), 박동진(1889년) 등은 빈민 구제 등 선정을 배푼 것으로 조사됐다.

이밖에 목원대 서태원 교수와 공주대 문경호 교수가 발제를 이어갔으며 고려대 송양섭 교수의 사회로 덕성여대 최주희 교수, 충남대 이근호 교수, 경기대 이왕무 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 정해은 책임연구원 등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세미나에 앞서 최근 발견된 조선 수군 군적부의 실물이 전시되기도 했다. 태안군은 이날 세미나에서 논의된 내용을 토대로 안흥진성에 대한 국가지정문화재 승격을 적극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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