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입술과 우표가 나누는 아름다운 내통”을 기억하는가
[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입술과 우표가 나누는 아름다운 내통”을 기억하는가
  • 이규식
  • 승인 2017.01.14 05: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입술과 우표가 나누는 아름다운 내통”을 기억하는가

우표의 뒷면은
얼어붙은 호수 같다
가장자리를 따라 얼음 구멍까지 뚫어 놓았다

침이라도 바를라치면
뜨건 살갗 잡아당기는 것까지
우표는 쩔걱쩔걱한 얼음판을 닮았다

우표와 마주치면 언제라도
혓바늘 서듯 그대 다시 살아나
지난 몇십 년의 겨울을 건너가고 싶다 
꼬리지느러미 좋은 화염의 추억에 초고추장 찍어
아, 그대의 입천장 들여다보고 싶다

편지봉투를 불자, 아뜩하게
얼음 깨지는 소리며 빙어 튀어 오르는 소리 올라온다
불면의 딱따구리가 내 늑골에다 파놓은 구멍들
그 어두운 우체통에 답장을 넣어다오
저 얼음 우표가 봄으로 가듯
나의 경계도 소통을 꿈꾼다
우표의 울타리, 빙어 알만한 구멍들도
반절로 쪼개지며 온전한 한 장의 우표가 된다

우표의 뒷면에 혀를 댄다
입술과 우표가 나누는 아름다운 내통
입맞춤의 떨림이 사금파리처럼 싸하다

그대 얼음장 안에 갇혀 있는 한
성에 가득한 혓바닥, 그 끝자리에
언 목젖을 가다듬는 내가 있다

 - 이정록 ‘우표’ 전부

[굿모닝충청 이규식 한남대 프랑스어문학과 교수] 필자의 서명이 있는 저서를 받으면 연장자와 선배의 경우 어김없이 육필편지로 답장을 보낸다. 흔해빠진 A4 용지 대신에 그럴듯한 무늬가 찍힌 편지지에 상투적인 내용에 가깝지만 그래도 마음을 담은 몇 줄 사연과 함께 주소며 우편번호 등을 찾아 적고 한꺼번에 많이 사둔 우표를 잘라 입술로 침을 묻혀 정성스레 봉한다.

이정록 시인의 ‘우표’를 읽으며 이런 편지쓰기 작업 일거수 일투족이 몰래 카메라에 찍힌 듯 조금 당황스러웠다. 특히 침을 바를 때 “쩔꺽쩔꺽한 얼음판”의 감각을 느낀다는 비유며 “빙어 알만한 구멍들도 반절로 쪼개지며 온전한 한 장의 우표가 된다“는 대목은 탁월하다. 이 시 전편에 산재한 섬세한 감성과 투명한 시선에서 우표의 추억, 편지의 향수 그리고 이메일이며 문자, 카카오 톡 등으로 옮겨가 버린 우리의 소통경로 변천사가 되읽힌다.

앞으로 손으로 쓴 편지는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구시대의 유물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리고 우표며 우표를 붙일 때의 그 독특한 느낌도 생소한 감각의 차원으로 비켜설 것이고 보면 “입술과 우표가 나누는 아름다운 내통, 입맞춤의 떨림”은 중장년, 노년층만이 기억하는 고적한 체험이 되고 말 것인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굿모닝충청(일반주간신문)
  • 대전광역시 서구 신갈마로 75-6 3층
  • 대표전화 : 042-389-0080
  • 팩스 : 042-389-0088
  • 청소년보호책임자 : 송광석
  • 법인명 : 굿모닝충청
  • 제호 : 굿모닝충청
  • 등록번호 : 대전 다 01283
  • 등록일 : 2012-07-01
  • 발행일 : 2012-07-01
  • 발행인 : 송광석
  • 편집인 : 김갑수
  • 창간일 : 2012년 7월 1일
  • 굿모닝충청(인터넷신문)
  • 대전광역시 서구 신갈마로 75-6 3층
  • 대표전화 : 042-389-0087
  • 팩스 : 042-389-0088
  • 청소년보호책임자 : 송광석
  • 법인명 : 굿모닝충청
  • 제호 : 굿모닝충청
  • 등록번호 : 대전 아00326
  • 등록일 : 2019-02-26
  • 발행인 : 송광석
  • 편집인 : 김갑수
  • 굿모닝충청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굿모닝충청.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mcc@goodmorningcc.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