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신탄진, 또는 모두의 가슴에 남아있는 그곳
[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신탄진, 또는 모두의 가슴에 남아있는 그곳
  • 이규식
  • 승인 2017.01.21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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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영 시비

신탄진, 또는 모두의 가슴에 남아있는 그곳

江이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江가에 가득한 밀밭 위로

바람이 넘치고 있었다.

흰 모래톱에 던지는 돌팔매

하늘위의 몇 마리 새들과

무심한 물결이

빈 가슴에 들어와

어둠을 허물고 있었다

키 큰 밀밭 사이로

지난 밤의 하찮은 불면이

구름처럼 사라져 가는 것이

보였다

- 이덕영, ‘신탄진’ 전부

[굿모닝충청 이규식 한남대 프랑스어문학과 교수] 대전이 낳은 걸출한 시인 이덕영. 41세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 지금은 더 성숙해졌을 시세계와 감성의 농축을 볼 수 없는 안타까움 속에 그는 여전히 청년시인으로 남아있다. 21세인 196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화석’으로 당선하였고 같은 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꽃’이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뽑혀 한해에 신춘문예 2관왕에 오르는 흔치 않은 기록을 세웠다. 1960년대 초반, 시인이 지금처럼 많지 않던 시절 스물 한 살의 어린 시인은 토착언어가 자아내는 정취에 서정을 절묘하게 결합하였다. 이른바 ‘언어의 연금술’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적인 언어로 형상화한 탁월한 기량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더러 의미 없이 회자되는 “가장 향토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문구에서 자칫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과거지향의 감성을 향토성으로 오해하고 있는 이즈음 이덕영의 시는 어원 그대로의 향토애와 거기서 빚어낸 소박하지만 정치(精緻)한 언어구사로 돋보인다.

제목으로 붙인 신탄진, 대전의 여러 지역 가운데 역동적이며 사람 사는 냄새가 강렬한 신탄진. 그러나 현대화, 상업화 개발의 물결에서 번번히 비껴나면서 대전광역시 5개 자치구 가운데 유일하게 전철이 닿지 않는 교통상의 불리함을 비롯하여 도시를 견인하는 랜드마크나 대규모 개발로 면모를 일신시킬 프로젝트를 찾기 어렵다. 그래서 신탄진은 약삭빠르고 타산적인 도회지의 체취에서 벗어난 고향과 향토의 원형질에 접근해 있다. 지금도 그러할진대 1960∼70년대 이덕영 시인이 시를 쓸 무렵 신탄진의 곡진한 향토정서는 시 ‘신탄진’을 통하여 전승된다. 별반 특출할 것 없는 어휘, 비유와 상징없이 풀어 나가는 정경묘사는 여린 듯 하지만 힘이 있다.

대청댐 인근에 조성된 이덕영 시비에 새겨진 ‘신탄진’은 마흔 한 살 나이에 세상을 떠난 시인이 고향을 그리는 진솔하고 순수한 감성을 옮겨놓고 있다. 하나하나 낱개로 풀어보면 평범한 일상의 단어지만 이렇게 12행 짧은 시에서  조합을 이룰 경우 강력한 연대와 상승의 힘으로 읽는 이들 모두에게 나름 다양한 느낌을 던져주는 듯하다. 그래서 독자들은 제목 ‘신탄진’을 각자 자신의 고향이나 오래 살았던 거주지 또는 잊지 못할 추억의 그 장소 이름으로 치환하셔도 좋으리라. 조용하지만 여운이 있는 서정의 힘은 지금처럼 개인적인 감각과 추억의 물꼬를 천착하는 현대시의 흐름 속에서도 여전히 빛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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