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황산벌의 신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황산벌의 신화,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이규식
  • 승인 2017.09.23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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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벌의 신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백중보름이라 했다
그런 날이면 어쩌다 붉은 달을 볼 수 있다 했다
나는 그 달을 가슴에 품었다
내 생애 처음으로 한 남자를 만나 품었던 뜨거운 가슴으로,
달이 울고 있었다
붉게 멍든 가슴으로 울음 삼키고 있었다

(......)

칼을 받아라
나의 마지막 사랑이니라
여인은 울지 않았다, 허리를 곧게 펴고
계백의 깊은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그 큰 사랑이 황홀하여 목을 길게 늘였다
늙으신 어머니와 아이들이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백사장에서 평화롭게 모시조개를 건져 올리던 아이들
백강 위로 짙은 안개 서서히 풀리며 햇살 드러나고 있었다

계백은 울지 않았다
백제불멸의 제단에 바쳐질 운명
운명에 앞서 이미 스스로 내일을 정각했던 계백
그는 아들을 베인 칼을 함부로 휘두르지 않았다
투구를 들어 올린 소년은 입술이 붉었다
끝내 되돌아온 화랑의 용(勇)과 기(氣)를 죽일 수는 없었다
아비의 가슴으로 관창의 머리를 돌려보냈다
죽이지 않는 것이 자극하지 않는 것임을 계백은 익히 알고 있었다

황산벌 불멸의 신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세상의 그 어느 사랑이
목숨을 접수함으로 사랑을 완성한 계백의 사랑보다 더 고귀한 사랑있으랴
하늘까지 뻗친 장도의 날 끝에서 영원히 빛부실 휴머니즘이여
21세기의 청명한 동편의 밤하늘에
피를 삼킨 붉은 달이 울고 있었다
계백의 달이었다

- 윤순정, ‘계백의 달’ 부분

[굿모닝충청 이규식 한남대 프랑스어문학과 교수] 예전에 학교에서 배웠던 역사는 지금 생각하니 적잖이 사실(史實)에서 벗어난 것이었고 승자(勝者)중심, 승자독식 역사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승자위주에 더하여 지배자의 시각으로 서술된 역사의 맥락은 사회기층 계급이나 패자의 입장을 간과할 수 있다. 지배자의 인식으로 바라본 역사가 혹여 진실을 가리지는 않았는지. 승자를 현양하고 패자를 폄하하는 야멸찬 논리 아래 숱한 인물들이 패배했다는 이유로 묻혀졌다. 계백과 백제쇠퇴기 역사가 그러하다. 쇠잔해 가는 왕조의 여러 모습을 과장되게 희화화하고 더러 사실을 왜곡하여 그려낸 역사의 대목은 특히 청소년들의 건전한 사관형성과 의식함양에 적지 않은 걸림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신라의 도읍 경주와 백제왕조가 둥지를 틀었던 공주와 부여의 현격한 외관과 관심도 차이, 아직도 뚜렷한 대비를 이루는 여러 현실이 그렇다. 더구나 정권 차원의 편애와 대중의 무관심으로 백제사는 합당한 조명과 대접이 턱없이 부족한 채 그 문화의 빛남은 오히려 일본을 통하여 조명되고 있다.

‘계백의 달’은 풍전등화 백제사 고비 빛나는 별, 계백의 최후를 조명한다. 서정의 가락을 깔고 유연하면서도 격정적인 리듬으로 우리를 1357년 전 백제왕조로 이끌어 간다. “관념적인가 하면 사실적이고 사실적인가 하면 서정성의 아늑한 은유를 뿜어내고 있다. 그의 언어의 직조는 삼베처럼 거칠다가도 어느새 명주처럼 곱게 짜여진다.”라고 시집 ‘계백의 달’ 해설에서 이근배 시인은 이 작품의 특성을 요약한다. 우리 현대시에서 그리 찾기 쉽지 않은 주제의 하나가 역사인물을 중심으로 한 긴 호흡의 내러티브 전개일진대 누구나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계백장군의 충절과 용맹, 속 깊은 성정 그리고 꺼졌으나 꺼지지 않은 백제혼의 연면한 불꽃이 이 작품을 통하여 독특한 울림으로 되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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