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홍철의 아침편지-슬로우 라이프
염홍철의 아침편지-슬로우 라이프
  • 염홍철
  • 승인 2014.08.28 13:0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36번째 월요일 아침편지를 띄웁니다.

최근 들어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사회경제적 가치관과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개념 중 하나가 ‘슬로우(slow)’입니다. 경제적 이익과 효율을 강조하는 패스트 이코노미(Fast Economy)의 대안적 개념인데, 적용되는 영역이 날이 갈수록 광범위해지고 있습니다.

패스트 이코노미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움과 편리함을 안겨준 대신 자연환경의 파괴, 지구온난화, 불평등의 심화, 물질만능주의, 인간 존중 정신의 훼손이라는 큰 대가와 희생을 야기했지만, 우리는 그동안 이를 외면해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빨리, 많이, 편리, 최고, 일류 등 패스트 이코노미의 상징처럼 여겨져 왔던 개념들에 대한 반성과 진정한 삶에 눈뜨면서 우리들 인류는 ‘단순한 삶’, 로하스(LOHAS, 건강하고 지속적인 생활), 친환경과 상생을 전제로 한 ‘지속 가능한 발전’ 등과 같은 새로운 방식의 사회경제적 패러다임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들 중 특히, ‘느림’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달성하는데 필요한 정신적, 실천적 대안을 제시하면서 다양한 분야에서 뿌리를 내려가고 있습니다.

제가 최근 읽은 책 중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책은 심리학자로서는 최초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천재 심리학자 대니얼 캐너먼의 <생각에 관한 생각>입니다. 행동경제학의 바이블로 평가되는 이 책은 사람의 대화와 판단, 그리고 행동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우리의 생각에서 느림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실증적 연구와 검증을 통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사람의 생각은 직관에 의존하는 빠른 생각과, 이성적인 느린 생각으로 나뉘는데, 빠른 생각의 직관적인 편향으로 인해 우리는 착시를 경험하고, 착각이나 오류에 빠지고, 크고 작은 잘못된 판단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캐너먼은 합리적인 생각과 행동을 위해서는 빠른 생각에 대한 위험성을 인식하면서, 속도를 줄이고 느린 생각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것을 당부합니다. 다시 말해 생각과 행동에서 빠르고 감정적인 면을 개선하고 일희일비하지 않을 때 궁극적으로 삶의 질이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생각을 느리게 한다고 해서 삶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생활에 투영될 때 어떤 형태로든 삶의 내용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슬로우 라이프 두 가지를 소개하고, 도시마다 슬로우시티를 특화시킬 것을 제안하고 싶은데, 이 또한 서둘러서는 안 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 번째가 걷기입니다. 한국계 일본인으로 슬로 운동의 선구자인 쓰지 신이치가 쓴 <슬로 라이프>에도 산책을 가장 먼저 언급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작가 소로우는 ‘하루를 행복하게 시작하고 싶으면 걸으라’ 했고, 철학자 니체는 ‘진정 위대한 모든 생각은 걷기에서 나왔다’는 말을 남겼으며, 만류인력의 법칙도 산책 중에 발견됐습니다. 실제로 바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걷다보면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신이 맑지고 몸에 활력이 생깁니다.

다음으로 독서입니다. 독서인구가 줄면서 출판업계가 점점 어려움을 겪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현대인들은 저마다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기 때문에 책을 읽기가 쉽지 않은 게 현실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럴 때일수록 책을 가까이 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독서를 통해 삶의 속도를 늦추고, 그 속에서 얻어지는 재미와 지식은 정신과 내면의 뜰을 풍성하게 가꾸어 줍니다. 그래서 독서는 취미가 아니라 일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정책결정자들은 도시 전체는 아니더라도 ‘전주 한옥마을’ 같은 컨셉으로 슬로우 시티 조성을 시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슬로우 시티는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일이 아니라 빠름과 느림, 농촌과 도시, 로컬과 글로벌, 아날로그와 디지털 간의 조화로운 삶의 리듬을 지키는 것으로 달콤한 인생과 정보시대의 역동성을 조화시키는 처방입니다. 그러나 며칠 전, 지리산행 길에 잠깐 들른 전주 한옥마을은 유명세를 타면서 깔끔하고 편리해진 반면에 아이러니하게도 정감 넘치는 옛 풍경들 대신 우후죽순처럼 들어선 현대식의 콘크리트 한옥들과 상점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습니다. 이제라도 진정한 슬로우 시티로서 정체성이 회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법정 스님은 “우리의 목표는 풍부하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존재하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빠르고 많고 편리한 이 세상에서 생각과 행동의 속도를 좀 늦추고, 느림의 미학을 몸소 실천 할 때에야 풍성한 존재로 거듭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8월의 마지막 주를 시작합니다.

늦여름 오후에
- 홍신선

오랜만에 장마전선 물러나고 작달비들 멎고
늦여름 말매미 몇이 막 제재소 전기톱날로
둥근 오후 몇 토막을 켜 나간다
마침 몸피 큰 회화나무들 선들바람 편에나 실려 보낼 것인지
제 생각의 속잎들 피워서는
고만고만한 고리짝처럼 묶는
집 밖 남새밭에 나와
나는 보았다, 방동사니풀과 전에 보지 못한 유출된 토사 사이로
새롭게 터져 흐르는 건수(乾水) 투명한 도랑줄기를.
지난 한 세기의 담론들과 이데올로기 잔재들을 폭파하듯 쓸어 묻고는
천지팔황 망망하게
그러나 자유롭게 집중된 힘으로 넘쳐흐르는
마음 위 깊이 팬 생각 한 줄기 같은
물길이여
그렇게 반생애 살고도 앎의 높낮은 뭇 담장들 뜯어치우고는
범람해 흐르는 개굴창 하나를 새로 마련치 못했으니
다만 느리게 팔월을 흐르는 나여
꼴깍꼴깍 먹은 물 토악질한
닭의장풀꽃이
냄새 기막힌 비누칠로 옥빛 알몸 내놓고 목물 끼얹는
이 풍경의 먼 뒤꼍에는
두께 얇은 통판들로 초저녁 그늘 툭툭 쌓이는 소리.

===============================================================================
홍신선(1944~ ) 시인은 경기도 화성에서 출생하여 동국대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서울예대와 안동대, 수원대 등을 거쳐 동국대 문창과 교수를 역임했습니다. 1965년 월간 <시문학>추천으로 등단하여 시집으로는 <서벽당집> 외 다수의 시집이 있습니다. 현재는 계간 <문학선>의 발행인 겸 편집인 일을 하며 시업詩業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굿모닝충청(일반주간신문)
  • 대전광역시 서구 신갈마로 75-6 3층
  • 대표전화 : 042-389-0080
  • 팩스 : 042-389-0088
  • 청소년보호책임자 : 송광석
  • 법인명 : 굿모닝충청
  • 제호 : 굿모닝충청
  • 등록번호 : 대전 다 01283
  • 등록일 : 2012-07-01
  • 발행일 : 2012-07-01
  • 발행인 : 송광석
  • 편집인 : 김갑수
  • 창간일 : 2012년 7월 1일
  • 굿모닝충청(인터넷신문)
  • 대전광역시 서구 신갈마로 75-6 3층
  • 대표전화 : 042-389-0087
  • 팩스 : 042-389-0088
  • 청소년보호책임자 : 송광석
  • 법인명 : 굿모닝충청
  • 제호 : 굿모닝충청
  • 등록번호 : 대전 아00326
  • 등록일 : 2019-02-26
  • 발행인 : 송광석
  • 편집인 : 김갑수
  • 굿모닝충청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굿모닝충청.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mcc@goodmorningcc.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