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시인의 울음이 주는 위로여, 카타르시여
[이규식의 이 한 구절의 힘] 시인의 울음이 주는 위로여, 카타르시여
  • 이규식
  • 승인 2016.05.17 15: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사진= 백인덕, 이상, 베를렌, 뮈세 (왼쪽부터)

시인의 울음이 주는 위로여, 카타르시여

산비탈 비스듬히 골목을 오르다
삐져나온 바위 그루터기에 앉아
울었다.
“시는 무엇이며, 인생은…”
바람이 담뱃불조차 꺼버린 어둠,
진득하게 고인 시간 속에서
누구는 나한테 “바다”를 보라 하지만
-거긴 죽음을 먹어치운 해파리만 가득하고
누구는 나한테 ‘꽃’ 을 보라 하지만
-색색의 표면 아래 들끓는 생식의 욕망 가득하고
누구는 나한테 ‘바다와 꽃과 시’를 보라 하지만
허기진 날 바람은 더욱 매섭고
아무래도 삶은 ‘라깡’이 아니라 '새우깡‘ 인데
어둠이 깊어갈수록 더 크게 웃는 당신,
당신들이여!
오층 창가에 아주 잠깐 반짝이는 ‘반딧불이’ 는
내 서러운 어둠을 위해, 이 밤도
울고 있음을…
돌 벽에 수없이 머리 찧어도 번개가 일지 않는
흐리고 흐린 밤, 비스듬한 골목을 오르다
마지막 담뱃불을 꺼뜨리고
나 실실 울다.

- 백인덕, ‘나 울다’ 전부

 

▲ 이규식 한남대 프랑스어문학과 교수, 문학평론가

[굿모닝충청 이규식 한남대 프랑스어문학과 교수] ‘시인’하면 일제강점기 홀연히 나타났다 스물 일곱에 사라진 불세출의 천재시인 이상(李箱)이 떠오른다. 깡마른 얼굴에 덥수룩한 수염, 낡은 옷차림에 깊은 시선... 광복 이후 이런 이미지는 베레모에 버버리 코트 차림의 시인들로 바뀌더니 그 후 시인이 급증하면서 이런 정형화가 어렵게 되었다. 시세계가 각기 다르듯 외양이나 풍기는 인상 역시 일괄적인 유형화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름기 흐르는 얼굴에 뚱뚱하고 머리가 벗겨진 시인보다는 수척하고 맑은 눈빛의 시인에게 더 믿음이 가고 그의 시구를 보다 유심히 보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예전 이상으로 상징되는 궁핍한 상황 속 시인의 이미지가 21세기에도 여전히 일부분 유효한 탓일까.

백인덕 시인은 그런 의미에서 시인의 원형질에 근접해 있다. 그와 교유하게 된 것은 수년전부터지만 만날 때마다 전형적인 시인의 모습을 본다. 다정다감, 술을 마실 때면 질풍노도 때로는 비감해지면서 시인으로서의 긍지와 시의 사명 등에 대하여 펼치는 담론은 격정적이다. ‘나 울다’에서는 시인으로서의 삶, 시인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물신사회 속 외로움과 허전함이 시행을 타고 진솔하게 흐른다. 이 독백은 굳이 시인이 아니어도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딜레마를 보여준다. 일은 안 풀리고 세상이 답답하고 출구마저 보이지 않아 모든 것이 부질없이 느껴지는 순간, 설움이 치솟고 왈칵 울고 싶어지는 그 순간을 시인은 노래한다.

골목을 오르다 울었고 어느 정도 울다가 그치면 언덕 아래쪽 도시의 불빛이 더 찬란하게 또는 흐릿하게 보일 것이다. 프랑스 상징시인 폴 베를렌은 까닭모를 괴로움이 가장 슬픈 고통이라고 토로했던가, 낭만파 시인 알프레드 뮈세는 ‘슬픔’의 마지막 연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내게 남은 유일한 재산은 가끔 울었다는 것 뿐이다”. 이런 맑은 눈물, 정신과 육체를 닦아주는 정화제 눈물마저 점점 말라가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굿모닝충청(일반주간신문)
  • 대전광역시 서구 신갈마로 75-6 3층
  • 대표전화 : 042-389-0080
  • 팩스 : 042-389-0088
  • 청소년보호책임자 : 송광석
  • 법인명 : 굿모닝충청
  • 제호 : 굿모닝충청
  • 등록번호 : 대전 다 01283
  • 등록일 : 2012-07-01
  • 발행일 : 2012-07-01
  • 발행인 : 송광석
  • 편집인 : 김갑수
  • 창간일 : 2012년 7월 1일
  • 굿모닝충청(인터넷신문)
  • 대전광역시 서구 신갈마로 75-6 3층
  • 대표전화 : 042-389-0087
  • 팩스 : 042-389-0088
  • 청소년보호책임자 : 송광석
  • 법인명 : 굿모닝충청
  • 제호 : 굿모닝충청
  • 등록번호 : 대전 아00326
  • 등록일 : 2019-02-26
  • 발행인 : 송광석
  • 편집인 : 김갑수
  • 굿모닝충청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굿모닝충청.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mcc@goodmorningcc.com
ND소프트